〈 1023화 〉 1023.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카일은 저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흐르는 강을 넘어 적들이 보였다.
코발트 왕국의 군대.
그 숫자는 5만 언저리다. 코발트 왕국 전체를 대표하는 군대라고 하기엔 그 숫자가 매우 적다. 라고 비웃으며 경시하기엔 카일은 저 군대를 격퇴하지 못했다. 코발트 왕국의 군대는 한 명, 한 명이 모두 정예였다.
병사 한 명부터, 기사 한 명까지.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모두 강했다.
카일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오러 마스터인 그의 시선에는 코발트 왕국의 지도자가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둘리바드 국왕. 카일에게도 밀리지 않는 실력자다.
카일은 그와 몇 번이나 마주했으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둘리바드가 군대를 향해 무언가를 지시한다. 기사 중 한 명이 나팔을 불었다. 코발트 왕국의 병사들이 몸을 돌렸다.
둘리바드는 떠나기 전,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카일을. 아니, 카일의 너머를 노려보다가 퇴각했다.
“경하드립니다, 카일 님! 드디어 전쟁이 끝났군요!”
다소 경박하여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울렸다. 카일은 물러가는 코발트 왕국의 군대에게서 시선을 뗐다.
부드러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화려한 남자가 있었다. 입가에 짙은 미소를 그리고 있는 그는 몇 개월 전에 카일을 섬기기 시작한 올론드 글베트 남작이다. 카일은 그를 보자마자 마음이 안정화되는 걸 느꼈다.
“여기 전쟁만 끝났을 뿐이지, 아직 대륙 전쟁은 진행 중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의 전쟁이 끝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카일 님. 지금 이 승리를 즐기시지요. 카일 님은 명백한 승자이십니다.”
“승리라… 승리가 맞긴 한데 찝찝하단 말이지.”
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승리한 것치고는 얻은 것은 명성뿐이다. 코발트 왕국의 군대는 그저 자신들보다 먼저 퇴각한 것뿐이다.
“테리우스는?”
“그는 거처에서 쉬고 있습니다. 전장에 나가기를 계속 바라고 있던데… 이럴 수가. 전장이 없어졌군요. 나중에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네야겠습니다.”
글베트 남작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카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글베트 남작의 말투는 대부분 저러니.
테리우스.
카일의 병사였던 테리우스는 전장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광전사 테리우스.
좋은 뜻은 아니었다. 전장에서 미친 듯이 날뛰다가 얻은 명성이었으니까.
“나중에 만나봐야겠군.”
카일에겐 유능한 부하들이 많았다. 그 유능한 부하들에 비하면 테리우스는 어딘가 부족하다. 무력 수준은 뛰어나긴 하나 피만 보면 미친 듯이 날뛰어서 제어하기 힘들다. 부하들 중에서 손이 많이 가는 부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테리우스가 계속 신경 쓰였다. 그건 아마도 적대하는 대상이 같기 때문이겠지.
“카일 님. 긴가민가했는데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으시군요.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가문의 일이야.”
“하하. 왜 이러십니까. 지금껏 카일 님을 전력을 다해 보필해왔습니다. 이제 와서 절 밀어내려 하십니까? 정말 섭섭합니다.”
카일은 쩔쩔맸다. 인간 상성이라 해야 할까. 그는 왜인지 다른 이들보다 글베트를 상대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이대로 돌아가면…. 아버지는 후계자로 유진을 선택할 거라 생각했을 뿐이야.”
카일은 승승장구해왔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듭했다. 사람들은 어느새 그를 영웅이라 불렀다. 허나, 영웅이 된 건 카일뿐만이 아니었다. 유진은 북쪽에서 승리했으며, 며칠 전에는 서쪽 비트라세 왕국의 군대를 박살 내며 엘프 마을을 구했다는 말이 들렸다. 카일의 업적은 유진의 업적에 밀렸다.
거기에 더해 유진은 알게 모르게 뒤에서 손을 쓰고 있었다. 공주가 유진에게 대적하고 있긴 하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재력을 가진 유진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커져간다.
“카일 님. 약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약한 소리가 아니야. 현실이 그래. 유진은 나보다 더 유능해.”
올론드가 얼굴에 웃음기를 없앴다. 카일은 저도 모르게 흠칫 떨었다. 정색한 올론드는 한순간 자신을 압도할 정도의 기괴한 기백이 있었다.
“겨우 그런 이유로 프루커스 백작위를 포기하실 겁니까?”
“…포기고 뭐고 현실이 그렇다니까.”
“카일 님. 유진 프루커스 남작은 뛰어납니다. 예. 불세출의 영웅이지요.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성격은 영웅에 어울립니까? 그가 백작위를 물려받는다면 사람들이 행복할까요?”
“…그건….”
카일은 최근에 들었던 유진에 관한 소문을 떠올렸다. 유진은 수천 명의 노예를 처형했다고 한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유는 노예들의 반란이었다. 의심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카일 님. 유리아 그레이스를 떠올려 보십시오. 유진 프루커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그녀는 어쩌면 학대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그럴 리가…. 유진과 유리아의 관계는 연인사이에 가깝다.”
카일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리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뛰고 얼굴이 붉어진다. 머릿속이 유리아로 가득 찬다. 보지 못한 지 얼마나 됐지? 만나고 싶다.
“얼마 전에 있었던 노예 학살을 기억하십시오. 유진 프루커스의 실제 성격은 포악합니다. 유리아를 노예처럼 부리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최악의 경우 매일 범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능성이 있었다.
카일은 유진에게 억지로 범해지는 유리아를 상상하고 이를 꽉 물었다. 분노와 증오가 치솟는다.
“…유리아를 구해야 해. 하지만 후계자가 되지 못하면 방법이….”
“카일 님. 후계자가 될 가장 쉬운 방법은 경쟁자를 없애는 일입니다. 동시에 마지막 방법이기도 합니다.”
“…….”
유진을 죽여라.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카일은 그 방법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무작정 쳐들어가서 죽일 수는 없다.
“카일 님에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유진 프루커스는 지금 헤버스이트 산맥에 있습니다.”
헤버스이트 산맥은 라펠리 왕국 북부에 있는 산맥이다. 크기가 작은 편이고 워낙 척박해서 몬스터는 물론이고 사람도 살아가지 않는 곳이다.
“…유진이? 거긴 왜?”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유진 프루커스의 곁에는 유리아 그레이스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카일은 숨을 삼켰다.
머릿속에는 몇 가지의 단어가 떠돈다.
기회, 유리아, 유진, 헤버스이트 산맥, 프루커스 백작. 등등.
어지럽다. 어지러운 와중에 글베트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듣고 싶은 말들을 해온다. 그중에서도 카일의 마음을 흔드는 단어가 있었다.
“유리아. 유리아를 구하셔야죠. 카일 님.”
“…맞아. 유리아를 구해야 해.”
“카일 님은 그 누구보다 유리아를 사랑하시지 않으십니까? 유진의 손에 학대 받는 유리아를 구하셔야죠.”
“나는 유리아를 사랑한다. 유리아를….”
“마침, 전쟁이 끝났습니다. 잠깐의 휴식이라 할지라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제가 카일 님과 함께하겠습니다. 헤버스이트 산맥으로 카일 님을 안내하겠습니다. 아 참, 테리우스를 데려가시지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설마 아직도 망설이고 계십니까?”
“…아니. 망설이지 않기로 했어. 유진을 죽이고 유리아를 구하겠어. 그리고 내가… 유리아를 행복하게 해주겠어.”
“바로 그겁니다, 카일 님! 유리아도 분명 카일 님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카일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허공을 멍하니 바라봤다. 유리아가 아른거렸다.
???
나는 유리아와 엘레나를 데리고 헤버스이트 산맥으로 향했다. 라펠리 왕국 북부에 있는 이 척박한 산맥에는 유리아를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로 이끌어줄 힘이 있다.
물론 무조건 유리아가 그랜드 마스터가 되는 건 아니었다. 실패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나는 유리아를 믿는다. 유리아라면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다만, 내가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헤버스이트 산맥의 상태였다. 밖에서 볼 때 멀쩡해 보였으나, 산맥에 직접 오른 끝에 보인 광경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마석문(魔石門).
마름모 형태의 커다란 검은색 돌이 산맥의 중심에서 마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석문은 달리 데몬 게이트라고도 불린다.
즉, 헤버스이트 산맥은 악마회 놈들이 먼저 점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원작에선 이런 일이 없었는데… 뭐가 원인으로 이렇게 바뀐 거지?’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마석문…. 옛날, 골드웨이 아카데미에서 한 번 봤었지. 그때는 드래곤인 프리실라가 알아서 처리했지만… 지금은 프리실라가 없어.’
프리실라를 부르는 방법도 없었다.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저걸 없애려면 평범한 힘으로는 안 된다.
‘유리아랑 엘레나가 있으니 가능하려나?’
나는 천안을 이용해 마석문을 빤히 쳐다봤다. 마석문을 통해 마계에서 악마와 마수가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악마와 마수는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지. 그런데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꽤 깊숙이 숨었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일단 마석문은 없애는 편이 좋다. 마석문의 목적은 두 가지. 마계의 마수와 악마를 불러오는 것과 이 세계의 환경을 마계의 것으로 바꾸는 것.
그리고 이 마석문을 설치한 악마회의 최종 목표는 마왕을 이 세계에 소환하는 것이다.
“엘레나. 저거 환술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없앨 수 있겠어?”
엘레나는 마석문을 조용히 주시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한계 돌파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저번에 보았던 역병의 악마 수준의 격이 저 돌덩이에게서 느껴지는군.”
“유리아. 너는?”
“명령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없애겠습니다. 다만, 무력으로 없애버린다면 마석문의 마기가 폭발하며 주변을 휩쓸 수 있습니다.”
“……나중에 없애자.”
지금 당장 마석문을 없애기에는 한 가지 우려되는게 있었다. 이 산맥 어딘가에 있을 드래곤 로드의 심장이다. 심장은 유리아가 얻어야 한다. 그래야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테니까.
‘마석문이 폭발하며 드래곤 로드의 심장에 영향이라도 끼치면 최악이야. 어차피 마석문은 당장 위험한 게 아니니 나중에 처리하면 돼.’
결론을 내린 나는 마석문을 모른 척했다. 급한 게 아니니까. 마석문이 좀 더 존재하더라도 변하는 건 크게 없다.
‘드래곤 로드의 심장이 영향을 안 받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척박한 산맥 주위를 둘러봤다. 산맥의 나무는 말라비틀어졌고, 땅에는 흑색 바위들이 가득했다. 괜히 척박함으로 유명한 산맥이 아니었다. 이 산맥 어딘가에 있는 드래곤 로드의 유해를 찾아야 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는 건가?”
엘레나가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어.”
“하아. 골 때리는군. 그럼 단서라도 말해라. 마법을 이용해서 찾아주지.”
“그게… 단서가 없어.”
이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작의 주인공인 카일도 우연히 발견한 것이 드래곤 로드의 유해다. 거기에 그 위치에 관한 정보는 두루뭉술하게 묘사되어서 어느 장소를 특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헤버스이트 산맥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 전부다.
“…후우. 일단 움직이지.”
엘레나의 말대로 일단 움직여야 했다. 가만히 있어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우리는 산맥 여기, 저기를 돌아다녔다. 마석문을 제외하면 특별한 것도 없었다.
쿠구구구구구궁.
산맥 위를 터덜터덜 걷던 우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냥 흔들리는 게 아니다. 땅속에 무언가가 있다.
나는 발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천안을 발동하며 땅속을 투시한다. 거대한 지렁이 같은 마수가 우리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
“유리아, 엘레나! 지하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