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4화 〉 1024.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쿠구구구구구궁.
산맥 위를 터덜터덜 걷던 우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냥 흔들리는 게 아니다. 땅속에 무언가가 있다.
나는 발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천안을 발동하며 땅속을 투시한다. 거대한 지렁이 같은 마수가 우리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
“유리아, 엘레나! 지하에서 온다!!”
엘레나가 마법을 사용했다. 몸의 무게가 갑자기 가벼워지더니, 우리들의 몸이 공중으로 부유했다. 그리고 몇 초후, 지하에서 커다란 지렁이 같은 마수가 위로 솟구쳤다.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는 피부를 가진 놈은 우리를 잡아먹기 위해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러나 놈의 입이 우리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놈의 몸이 아래로 추락한다.
‘뇌전!’
콰콰쾅!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마수의 길쭉한 몸을 타고 흐른다. 효과는 있었다. 놈이 몸을 비틀거렸다.
위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이잉!
바위 같은 몸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왔다. 자세히 쳐다보니 딱정벌레를 닮은 벌레였다. 평범한 벌레는 당연히 아니다. 마수였다. 자세히 보면 입안에 톱날 같은 이빨이 회전하고 있는 게 보였다.
“벌레! 보기만 해도 역겹군! 다 태워주지!”
파지지지지지직.
벌레들을 향해 뇌전을 흩뿌렸다. 전류에 맞은 벌레는 약간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쿠구구구구구궁!
땅이 흔들린다. 나는 곁눈질로 아래쪽을 쳐다봤다. 거대 바위 지렁이가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위로 솟구친다. 아직 우리를 노리고 있었다.
“건방진 벌레입니다. 흙먼지만 일으키고 있군요. 처리하겠습니다.”
유리아가 아래로 내려갔다. 슉하는 순간 지상에 도착해 있었다. 지금 내 실력으로는 유리아의 움직임을 완벽히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바위 지렁이는 지상에 내려온 유리아를 향해 입을 벌리고 헐레벌떡 달려들었다. 유리아가 단검을 들었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쭉 늘어난다고 느낀 순간,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커다란 지렁이는 반으로 갈라져 기괴하게 생긴 내장과 붉은 피로 땅을 적시며 죽었다.
나는 벌레들을 처리하고 지상에 내려왔다. 유리아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구구궁!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렁이는 한 놈만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
헤버스이트 산맥을 3일 동안 돌아다닌 끝에 드래곤 로드의 유해를 찾았다.
어느 장소의 지하에 있었다. 근처를 보면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었다. 인위적인 느낌은 아니고 거대 바위 지렁이들이 날뛴 흔적에 가까웠다. 본래 지상에 있었는데 지하로 떨어진 듯싶었다.
‘이게 드래곤 로드의 유해인가.’
직접 본 드래곤 로드의 유해는 딱딱한 바위처럼 생겼다. 자세히 봐야 드래곤처럼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진짜 드래곤의 뼈처럼 생겼으면 사람들이 알아보고도 남았지.’
나는 바위 앞으로 다가가 주먹을 쥐고 두들겼다. 퉁퉁, 안쪽에서 소리가 반사되어 울린다. 내부가 비어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엔 힘을 주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앙!
바위가 부서지고 내부에 숨겨져 있던 드래곤 로드의 뼈가 드러났다. 손가락 끝에 뇌전을 일으켰다. 어두운 공간이 밝혀진다. 긴 세월 때문일까. 드래곤 로드의 뼈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여기엔 심장이 없군. 다른 곳에 있나.’
바위는 지금 이것을 포함해 총 7개였다. 나머지 6개 중에 심장이 있을 것이다. 느긋하게 움직여도 된다. 시간은 내 편이다.
2번째와 3번째 유해도 확인했다. 심장은 없었다.
“주인님. 불청객이 찾아왔습니다.”
4번째 유해를 찾는데 유리아가 말했다
“불청객?”
유리아의 시선을 따라 바깥을 쳐다본다. 3명의 남자가 있었다. 1명을 제외한 2명은 내가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카일과 테리우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귀공자처럼 생긴 얼굴. 카일은 예전에 봤을 때와 변한 게 거의 없었다.
반면에 테리우스는 변했다. 잘린 팔은 붙어 있고 온몸이 근육질에 키는 2M가 넘었다. 근육이 얼마나 단단한지 순간적으로 인간이 아닌 바위로 이루어진 골렘으로 보였다.
‘그리고 저들 옆에 있는 금발 푸른 눈의 화려한 남자는… 보고로 들었던 올론드 글베트 남작인가.’
올론드 글베트 남작. 몇 개월 전에 카일의 부하가 되었고, 카일은 글베트를 거의 항상 데리고 다닌다는 보고를 받았다.
저쪽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멈칫했다.
나는 일단 손을 들어 카일에게 흔들어주었다. 나와 카일은 형제다. 지금 당장은 나쁘지 않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카일 또한 날 동생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나와 마주해서 손을 흔들 것이다.
“…….”
카일은 반응이 없었다. 분위기가 평소의 그와 달랐다. 카일은 나와 유리아를 번갈아 보다가 검을 뽑아 들었다.
“카일 형?!”
“…….”
카일을 불렀다. 카일은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상황, 암살하기 딱 좋은 상황이 아닌가.
‘카일이 나를 여기서 죽이려 한다고? 젠트가 아니라 카일이?’
카일의 정의로운 성격상 암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의 적이라면 모를까. 나는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경쟁자이며, 형제다. 그의 적이 결코 아니다.
‘원작이 바뀌면서 카일도 바뀌었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혀를 찼다. 카일을 이용해 먹겠다는 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유진 프루커스으으으으!!!!”
내 이름을 외치는 놈이 있었다. 테리우스였다. 팔 병신이었던 놈은 증오와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짖으며 달려들었다. 놈의 양손에는 커다란 대검이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유리아, 엘레나. 죽이지는 마. 뭐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봐야겠으니까.”
“알겠습니다.”
“너와 내가 나설 필요가 있나? 유리아 혼자서도 충분한 것 같다만.”
엘레나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 유리아는 오러마스터 최상급. 혼자서도 충분히 적들을 쓸어버리고 남는다.
유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여유로웠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유진 프루커스!! 죽여버리겠어!! 널 죽이고 네피아를 구하겠어!!”
달려오던 테리우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림자 손에 발목이 붙잡힌 것이다. 성대하게 넘어진 테리우스는 경사진 땅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온몸에 자잘한 상처를 입은 테리우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팍!
유리아의 뒤돌려차기가 테리우스의 후두부에 작렬했다. 테리우스가 정신을 잃고 그대로 넘어졌다. 이어 그림자 사슬이 나타나 테리우스의 몸을 감았다. 테리우스의 제압은 끝났다.
“유리아. 강하구나. 평범하지 않다고는 생각했는데… 이런 힘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카일이 유리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유리아를 향한 카일의 시선과 분위기는 아련했다. 카일은 뭔가 지독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힘을 숨길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카일 님은 못 본 사이에 꽤 변하신 것 같군요.”
“유리아. 넌 유진에게 속고 있어.”
카일이 대뜸 말했다.
“…네?”
유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아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유리아에게 숨기고 있는 일이 있나? 말하지 않은 일들은 제법 있어도 굳이 숨기는 일은 없다. 내가 가장 믿고 있는 건 유리아다.
“유진은 널 이용하고 있잖아. 지금도 봐. 널 앞에 세워 날 가로막으려 하고 있어. 분명 밤에도 널 희롱하겠지. 비켜줘, 유리아. 난 유진을 죽이고 널 구해내겠어.”
“…카일 님. 뭔가 많이 착각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전 주인님에게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주인님이 절 이용하는 건 정당한 일입니다. 설령 주인님이 절 속이셔도 상관없습니다. 전 이미 주인님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쳤으니까요.”
“…글베트 남작의 말대로 유진에게 단단히 속은 모양이구나.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내가 구해줄 테니까!”
카일이 유리아를 지나쳐 나를 노리려고 했다. 그의 검에서 붉은 오러가 일어났다. 오러는 검에 뭉쳐 오러 블레이드가 되었다. 그의 오러 블레이드는 매화처럼 붉었다.
유리아가 카일을 향해 단검을 날렸다. 내게 달려오던 카일이 기겁하여 검을 옆으로 세웠다. 까앙! 단검과 그의 검이 부딪혔다. 튕겨 나간 단검이 땅에 처박히고, 카일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이, 이런 힘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유리아! 비켜줘! 난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카일 님. 뭔가 이상한 것 같군요. 맞지 않는 말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혹시 머리라도 다치셨는지요? 그게 아니면… 누군가에게 이상한 말이라도 들으셨습니까?”
“이상한 건 너야, 유리아! 왜 유진을 따르는 거야? 유진은 단지 널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내 말을 들어!”
유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드물게도 그녀의 표정에 짜증이 서렸다. 카일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카일 님. 되지도 않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포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를 가지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시지요. 제게 가진 마음과 주인님을 향한 질투가 훤히 보이는군요.”
“아, 아니야. 나는 널 위해…!”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카일 님을 특별하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오히려 상대하기 귀찮았습니다. 네, 주인님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카일 님을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유리아의 말에 카일이 주춤거렸다. 그러다 느닷없이 나를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카일의 살기가 내게 향해진다. 오러 마스터의 살의에 등골이 한 차례 오싹해졌다.
“주제 넘는군요.”
싸늘한 말이 울렸다. 직후, 카일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카일은 약간의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유리아를 쳐다봤다.
“유리아. 넌 자유를 원하지 않아? 내가 유진을 죽이고 네게 자유를 줄 수 있어.”
“주인님이 없는 자유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군요.”
“후우…. 유리아. 솔직하게 고백할게. 나는… 유리아, 너를 사랑해. 네가 행복하기를 원해. 내가 널 행복하게 만들어주겠어.”
“전 카일 님이 싫습니다. 주인님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죽여버렸을 텐데…. 안타깝군요.”
“내, 내가 싫다고? 그, 그럴 리가. 넌 날 기다려왔잖아.”
카일이 동요했다.
글베트 남작이 저 멀리서 고함쳤다.
“카일 님!! 정신 차리십시오!! 유리아는 유진에게 세뇌당하고 있습니다! 유진을 죽이고 유리아의 세뇌를 풀어야 합니다! 유진을 죽이십시오!!”
“글베트 남작…. 남작의 말대로야. 유진을 죽이고 유리아의 세뇌를 풀겠어.”
카일이 내게 달려온다. 그리고 유리아의 발차기에 맞아 뒤로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유리아는 무감정하게 카일을 보다가 글베트 남작에게 시선을 옮겼다.
“당신의 목소리에서 악마의 힘이 느껴지는군요. 악마의 힘으로 사람을 홀렸습니까?”
“사람을 홀려? 그 무슨 심한 모욕을. 저는 카일 님의 군사로서 적절한 조언을 해줬을 뿐입니다!”
“목소리가 참으로 역겹습니다. 먼저, 처리를….”
유리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급히 단검을 휘둘렀다.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매화 한 송이가 쩅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유리아…. 계속 방해한다면 너를 쓰러뜨리고 유진을 죽이겠어. 그게 최선 일 테니까.”
카일의 피부가 자주색으로 변했다. 눈동자는 빨갛게 변한다. 아무리 봐도 무인보다는 마인에 가깝다.
‘주화입마…? 카일이 주화입마 상태에 빠졌다고?’
카일의 주위로 보라색 매화가 피어난다.
강기로 이루어진 매화는 회전하며 꽃잎을 산개했다. 유리아는 단검과 그림자로 매화를 하나, 하나 쳐냈다. 매화 냄새가 지독했다.
“유리아! 내가 너를! 유진을 죽이고 구하겠어!!”
유리아는 무표정했다. 그녀의 단검이 매화를 그리는 카일의 검을 박살 냈다. 그림자 사슬이 카일의 다리를 붙잡았고, 유리아의 손에서 투척 된 작은 비수가 카일의 어깨와 팔에 박힌다. 카일이 균형을 잃고 무너졌다. 유리아는 카일의 머리를 발로 밟았다. 쾅! 카일은 그대로 기절했다.
유리아는 기절한 카일을 뒤로하고 글베트 남작을 향해 달렸다. 기겁한 글베트 남작이 뒤로 돌아 도망가려 했으나, 10M도 가지 못하고 붙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