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9화 〉 1029.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나는 여전히 심상 세계에 있다.
“…….”
손으로 목을 쓰다듬었다. 거추장스러운 목줄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걸로 나는 자유다.
‘마냥 기쁘지는 않군.’
상황이 썩 좋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유리아에게 걸리면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 뻔하다. 저번처럼. 아니, 저번보다 더 심하게 구속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 [백환] 세계의 미래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30일 회귀권이라든지, 절대황권같은 사기 아이템이 있긴 한데 지금 쓰기엔 아깝지.’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나무로 된 오두막이었다. 처음 보는 건물이었다. 조심스럽게 창문 밖을 확인했다. 판타지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인 도시가 보였다. 서울이다.
‘적어도 유리아가 있는 곳이랑 멀리 떨어져 있는 건 확실하군.’
저번은 운이 안 좋았다.
설마 심상 세계에 들어서자마자 유리아를 만나게 될 줄이야. 보통의 경우엔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 유리아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닌 건 나도 마찬가지지. 지금도 유리아를 떠올릴 때마다 자지에 힘이 들어가네.’
나는 일단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심상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건 최악에 가깝다. 그래도 몇 가지 좋은 점은 있다.
이 심상 세계는 나만 부활하는 특별한 뭔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유리아에게 당해 죽은 엘레나도 이 심상 세계 어딘가에서 다시 부활해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엘레나에겐 시간 리미트가 있어.’
엘레나는 내가 소환한 존재다. 시간이 지나면 역소환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소환 시간의 기준이 심상 세계가 아닌 현실을 기준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심상 세계의 기준으로 앞으로 열흘 이상은 여유 있을 것이다.
‘원작과는 달라서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엘레나와 합류해야 하나?’
아니다.
아예 따로 활동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내가 유리아의 시선을 끌고, 엘레나가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최악의 경우. 유리아에게 드래곤 로드의 심장을 먹이는 걸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때는 엘레나나 내가 복용하는 게 최선이지. 뭐, 그때쯤 되면 30일 회귀권을 쓰는 게 더 나을 지도….’
나는 일단 내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뇌전.’
손가락 사이로 시퍼런 뇌전이 튀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상 세계 밖에 있을 때와 비교해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찰나.’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4]
스킬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나무 벽을 향해 내질렀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나무 벽이 부서진다. 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몸은 작아졌지만, 힘은 그대로야.’
유리아의 앞에선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 제대로 발휘했다면?’
사슬을 끊지 못한 건 그 재질이 더럽게 단단했기 때문이고, 내 몸을 아무렇지 않게 제압한 유리아가 비정상적으로 강한 것이라면, 그 상황이 설명된다.
‘젠장. 유리아가 적이라고 생각하니 엄청 막막해지네.’
나는 고개를 흔들고 일단 밖으로 나갔다. 드래곤 로드의 심장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도 심상 세계가 사라지지 않은 걸 보니 다른 이 중에 드래곤 로드의 심장을 찾은 이는 없는 모양이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서울을 향해 걸어갔다. 저곳에서 어디에 있는지 모를 드래곤 로드의 심장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다.
‘유리아의 눈에 띄면 안 되니 조심해서 걸어야겠지.’
서울은 여름인지 기온이 뜨거웠다. 조금 걷다 보니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음료수가 먹고 싶어졌다. 두리번거리던 나는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딸랑.
문에 달린 종이 울린다. 편의점 알바생은 반응이 없었다. 여자였는데 다행히도 못생긴 여자였다. 자지가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파지지직.
편의점 알바생에게 뇌전을 던졌다. 감전당한 알바생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잿빛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음료수를 꺼내러 가는데 편의점 밖에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내가 알바생을 죽이는 것을 본 것이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놀라지도 않고,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갈 길을 간다.
‘여긴 심상 세계니까.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야. 사회 시스템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캔 음료를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달달한 음료수는 시원하기까지 했다. 나는 밖으로 나가려다가 편의점 창고로 들어갔다.
‘혹시 모르지. 드래곤 로드의 심장이 여기에 있을지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일일이 물건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장은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가면 저절로 그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근처를 돌아다니며 드래곤 로드의 심장을 찾았으나, 그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하늘의 태양이 저물며 서울에 밤이 찾아왔다.
‘아, 졸리네. 적당한 곳에서 잠이나 잘까. 섹스도 하고….’
거리를 걷던 나는 골목길에 들어서다가 깜짝 놀랐다. 부드러운 금발에 푸른 눈, 서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귀족 복장을 한 남자가 무기력하게 골목길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글베트 남작?”
글베트 남작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피로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오. 유진 님. 겉모습이 달라지셔서 처음에는 누군가 했습니다.”
글베트 남작은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력한 모습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바깥에서는 살기 위해 발악을 하던 놈이었는데… 이것도 어떤 작전인가. 꿍꿍이가 뭐지.’
죽여버리고 싶으나, 죽여봤자 다시 어딘가에서 부활할 뿐이다.
“글베트 남작.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보시는 바와 같이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지난 3일 내내 제대로 먹지도 않고 이 망할 도시를 돌아다니느라 지쳐버렸습니다. 심상 세계인데 육체의 피로를 느낀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말투가 건방져졌군.”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해해주십시오, 유진 님. 아무리 그러해도 의욕이 나지 않습니다. 이 세계에선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전 이미 포기해버렸고, 나태를 품은 순간, 나태함이 증폭되어 버렸으니….”
“무슨 의미지? 글베트 남작. 넌 이 세계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거냐?”
“…….”
글베트 남작이 눈과 입을 닫았다.
“글베트 남작! 대답해라!”
“…….”
몇 번 더 글베트 남작을 다그쳤다. 허나 글베트 남작은 요지부동이었다.
파지지직.
오른손에 전류를 튀기며 글베트 남작에게 다가갔다. 고문을 해서라도 그의 입을 열 생각이다.
글베트 남작은 내 손이 몸에 닿기 전에 눈과 입을 열었다.
“그만! 고문은 하지 마십시오! 말하겠습니다!”
“결국, 말할 거면서 왜 뜸을 들인 거지? 네 주제에 날 시험한 건가?”
“아닙니다. 반응하기 귀찮아서… 귀찮게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살아 있는 것조차 귀찮습니다. 죽어도 의미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저 여기서 숨 쉬고 있을 뿐입니다.”
“정상이 아니군. 네가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말해라.”
“고문은 아프고 귀찮으니 전부 말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이렇게 된 건… 저와 계약한 욕망의 악마, 비트솔 때문입니다.”
나는 글베트 남작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요약하자면, 욕망의 악마인 비트솔의 권능이 이 심상 세계에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감정과 욕망을 자극당한다. 내가 갑자기 치솟는 성욕을 감당하지 못한 것도, 유리아가 내게 집착하는 것도 모두 설명된다.
“너는 왜 그꼴이 된 거지? 원래부터 나태한 놈이었나?”
“…아뇨. 저도 처음에는 의욕적이었습니다. 드래곤 로드의 심장만 얻으면… 저도 초인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제겐 그 자격이 없다는 걸 어제 깨달았습니다.”
“어제?”
“봐버렸지요. 카일 님… 아니, 카일과 유진님이 엘레나라고 부르는 여성의 전투를. 예. 대단했습니다. 카일은 제 생각보다 더 강했고, 그 여인은 그런 카일을 압도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그 전투는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제가 끼어들 세계가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 직후, 귀찮음이 확 몰려오더군요.”
포기해버리면 이렇게 되는 건가. 글베트 남작의 꼴을 기억해두고 물었다.
“카일과 엘레나가 싸워서 이긴 건 엘레나였나 보군. 엘레나는 어느 쪽으로 갔지?”
“동쪽으로 갔습니다. 근데 이 세계에서 동쪽이니, 서쪽이니 의미가 있나 싶군요. 제가 가진 정보는 모두 드렸습니다. 이제 그만 저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않으시겠습니까? 혼자 즐기는 나태란 정말 편하고 좋습니다. 전 이 나태를 더 즐기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비트솔인가 뭔가 하는 악마는 어디에 있지?”
비트솔을 죽인다면 그 권능도 사라지고 유리아도 원래대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모릅니다. 쥐새끼 같은 악마인지라 숨는 것도 뛰어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디선가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글베트 남작이 두 눈과 입을 닫았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놈을 여기서 죽일까?
‘…죽여도 의미 없어. 다른 곳에서 다시 나타나겠지. 꼴을 보니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닌 듯하니… 여기에 내버려둬도 상관없겠지.’
어쨌든 이 심상 세계가 왜 이 꼬라지인지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엘레나가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
콰르르르르릉!
천둥소리가 울렸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검은 번개가 치고 있었다. 유리아가 누군가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 거리는 대충 5KM 정도 떨어져 있다.
‘심상 세계의 몬스터와 싸우고 있나? 아니면 카일이나 엘레나?’
어느 쪽이든 내가 저쪽으로 가는 건 미친 짓이다.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했다. 빠르게 다리를 놀려 도시를 벗어났다. 공간이 획 바뀌었다. 어딘지 모를 산속이었다.
“유진. 그 모습은 뭐야?”
달리던 나는 자리에서 멈춰 서서 내게 말을 건 남자를 바라봤다. 카일과 닮은 남자가 있었다. 카일이라 하기엔 머리카락이 길고 생김새가 조금 달랐으며, 입고 있는 옷이 무협의 그것이었다. 손에 든 검도 무협의 검이다.
“…카일?”
“맞아. 내가 카일이야.”
가짜인가? 카일이라면 내게 산뜻하게 말을 걸 리가 없을 텐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카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 고분고분히 나오니 이상하게 느끼는 거겠지.”
“이 세계에선 욕망과 감정을 자극받아. 카일, 너는 나를 죽이고 유리아를 가지고 싶을 텐데.”
“맞아. 지금도 널 죽이고 싶어. 하지만 의미 없는 짓이란 것도 알지. 죽어봤자 진짜 죽는 것도 아니니까.”
카일은 차분했다.
나는 그 이유를 불현듯 깨달았다.
카일은 글베트 남작에게 조종되고 있었다. 욕망과 감정의 자극이 그에게만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지금 심상 세계 전체로 퍼졌다. 나도 성욕이 들끓고 있으나, 이성을 완전히 잃은 건 아니다. 유리아의 경우엔 그 눈이 항상 내게만 향해 있었으니 아직 판단하기에 섣부르다.
그리고 카일의 욕망은 정확하게는 내가 아니라 유리아에게 더 집중되어 있다.
“방금 유리아를 만났어. 그리고 죽었지.”
카일이 이어 말했다.
“유리아를 보는 순간 이성이 증발되고 유리아에게 달려들었어. 유리아를 손에 넣을 기회였으니까. 근데… 강해도 너무 강하더라고. 내 검은 유리아의 발끝에도 닿지 못했어. 유진, 유리아는 널 찾고 있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유리아에게 널 바치면, 유리아가 날 돌아봐 줄까?”
“해보시던가.”
여기서 카일과 한바탕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카일이 오러 마스터이긴 하나, 그 매화검법은 이미 예전에 파훼법을 찾아냈다. 내가 아니라 유리아가 찾아낸 파훼법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확실하다.
“…아니, 됐어. 유리아는 그래도 날 보지 않겠지.”
“포기했나.”
“그래.”
카일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다. 나는 굳이 파헤치지 않았다.
“진짜 용건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