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8. 다크 문 (888/2,000)

〈 1108화 〉 1108. 다크 문

[유희를 종료합니다.]

[다크 문] 유희 세계에서 30일을 보내고 자동으로 현실로 돌아온 나는 숨을 삼켰다.

[다크 문]에서 30일을 보냈지만, 현실의 시간은 1초도 지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30일간의 기억이 한순간에 밀려드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아프거나,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단순히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질 뿐이다.

‘으음. 내가 몽정을 했다니. 31호는 힘들어도 렉시 교관은 잘만 꼬시면 따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쉬움에 혀를 차면서 기억을 정리했다.

가장 흥미가 가는 건 역시 마법에 대한 기억이었다.

‘…술식은 기억나는데…. 나는데…. 계산하기 어렵군.’

수학 공식은 알아도 그 공식을 풀기가 무척 힘들었다.

‘아스트랄과 마나 로드가 없어. 현실에서 마법을 쓰는 건 불가능하다.’

현실의 마법과 [다크 문] 속의 마법은 엄연히 달랐다. 마법에 대해선 깔끔하게 포기했다.

‘이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나는 손을 들었다.

시퍼런 전류가 뇌전에 모여들며 구체를 이룬다. 2급 마법인 일렉트릭 스파크다. 정확하게는 마법의 술식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전격계 마법 비슷한 거라면… 뇌전을 이용해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아.’

뇌전의 구체는 불안정하게 흔들리다가 사라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능숙하게 구현하기 위해선 훈련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전격계 마법을 쓰는 감각이지.’

[다크 문] 속의 내가 전격계 마법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감각도 선명해진다. 경험이 기억을 통해 남는 것이다.

‘나중에는 썬더 볼트도 구현할 수 있을 것 같군.’

[사용 가능 포인트: 9,257]

유희 세계에 잠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데 약 2,000 포인트가 쌓였다. 설정한 페널티 때문에 다른 유희 세계보다 많은 포인트를 버는 것이다.

나는 고민하다가 스마트폰으로 손을 뻗었다.

‘이런 식으로 강해질 수 있고 포인트도 넉넉하게 챙길 수 있다니. 개꿀이잖아? 그대로 쓸데없이 군대 좆뺑이 치는 건 싫으니 자동 진행도 적절히 써야겠군.’

[다크 문을 선택했습니다.]

[유희를 시작합니다.]

???

211호가 된 지 어느새 5개월이 지났다. 프로젝트 실험체 아이들 대부분이 2급의 경지에 올랐다.

한 달에 2~3번씩 임무를 나갔다. 점점 임무를 나가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임무에서 실패하는 아이들은 죽거나 병신이 되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팔이나 다리 없는 병신이 되면 실험체로서의 가치밖에 남지 않으니까.

나는 병신이 될 바에 죽기로 결정했다. 유리 상자에 갇힌 쥐새끼 꼴은 사양이다.

계급은 상병이 되었다. 다른 아이들 대부분은 일병이었다. 참고로 31호는 병장이었다. 이 부대가 그녀를 편애하는 일은 여전했다.

5개월.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천천히 돌이켜 보면 2개월도 지난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든다.

‘가끔씩 내가 움직였지만, 내가 움직인 게 아닌 듯한 기묘한 이질감이 든단 말이지.’

지금 내게 몇 가지의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성욕과 212호였다.

내무실에서 내 옆자리인 212호는 최근 3개월간 급성장을 이루었다. 육체와 마법 경지, 둘 모두를 말이다.

212호는 2급 마법사이고 보조 마법에 재능을 보였다.

갈색 단발머리였으나 최근에는 머리카락을 기르기 시작했다. 세미 롱 헤어라고 해야 하나.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은 가슴 언저리까지 자랐다. 가슴과 엉덩이가 부풀었고, 여러 경험을 하다 보니 연기 실력도 엄청 늘었다. 지금 와서는 나도 그녀의 연기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다.

“211호. 오늘도 부탁해.”

저녁 점호가 끝나고 천장의 형광등이 꺼진 뒤 212호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가 은밀히 마법을 사용했다. 마법이 그녀와 나의 몸을 감싼다. 사일런스. 소음을 없애는 마법이었다.

“굳이 사일런스 마법을 사용할 필요 있어?”

“혹시 모르니까. 다른 애들한테 민폐잖아.”

212호는 내 이불 속에 손을 침입시켰다. 거침없이 움직이던 그녀의 손은 내 손을 꽉 잡았다. 212호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그녀는 모르는 척 천장을 보며 눈을 감았다.

3주 전, 임무에서 그녀를 구해준 적 있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노골적으로 나를 유혹했다.

‘강자와 친해지면 여러모로 살아남을 확률이 높지. 그건 나도 인정하니 212호를 탓할 생각은 없어.’

212호는 선을 넘지 않는다. 가슴을 은근히 보여준다거나, 지금처럼 손을 잡고 잠들기를 바란다거나. 그녀의 행동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문제가 되는 건 내 성욕이지.

‘…성욕이 쌓이면 화장실에서 처리하고 있는데… 그것도 요즘 한계야. 성욕이 쌓이는 속도가 빨라졌어.’

원인 중 하나는 212호 때문이다. 다른 원인은 가끔씩 꾸는 31호가 나오는 야한 꿈.

‘창녀라도 찾아가서 성욕을 배출하고 싶을 지경이야.’

그러나 내 신분은 노예이자, 실험체. 멋대로 부대 밖으로 빠져나가 창녀를 만날 수 없었다.

나는 212호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손을 놓았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최대한 빨리 잠들기 위해 노력한다.

31호의 알몸이 떠올랐다.

폭포 아래로 떨어졌을 때 보았던 31호의 부드러운 살결과 보지의 생김새.

‘…씨발. 이대로 잠들긴 글렀군.’

나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들끓는 성욕을 가라앉히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내무실을 나가 화장실로 가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212호와 31호를 힐끗거렸다.

[212호의 성감대: 허리, 허벅지]

[31호의 성감대: 겨드랑이, 엉덩이]

어쩌다 보니 몇 달 전에 상대방의 성감대를 알 수 있는 이능을 각성했다.

하등 쓸모없는 이능이었다.

???

다른 고민은 마법 경지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나는 의도적으로 마법 수련을 멈추고 있었다. 3급의 경지가 한 발자국 앞에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성장이 너무 빨라.’

마녀 인자에 의해 마법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31호는 아직 2급이었다. 그녀를 앞질러 3급을 받게 되면 내 재능이 들통나게 된다. 못해도 그녀가 3급이 되고 반년 정도가 지났을 때 3급에 오르는 게 적당하다.

‘내가 익힌 마나 호흡법은 부대가 준 마나 호흡법이다. 일부 개조하긴 했으나, 경지를 숨기는 건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나는 일정 주기마다 신체검사를 받는다.

경지를 숨기려면 특수한 마법이나, 특수한 물건이 필요했다. [다크 문] 게임 속 아이템이 몇 개 떠올랐다. 지금 상황에선 얻는 게 불가능한 아이템들이었다.

‘상황이 답답해서 죽겠네. 진짜.’

아무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211호.”

212호가 불쑥 다가왔다. 나는 몸을 빼고 그녀를 상대했다.

“212호. 무슨 일 있어?”

“임무 일정이 나왔어.”

212호가 건네는 서류를 받아들였다. 이제는 익숙하게 임무 일정을 확인한다. 이번 주 1분대 임무 대상자는 나를 비롯해 총 5명이다. 다른 4명은 단체 임무고, 나는 개인 임무다. 정확한 임무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담당 교관을 찾아가서 들으면 된다.

‘임무 시작은 내일 새벽이니 오늘 저녁까지 장비를 챙겨야겠군. 담당 교관은 렉시인가.’

렉시와 둘이서 하는 임무라면 뻔하다. 저격수로서 아군을 지원하는 임무일 것이다. 몇 번이나 했던 임무였기에 걱정은 없었다.

나는 서류를 다른 임무 대상자인 88호에게 넘겼다. 88호는 서류를 받아들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임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임무에는 항상 죽을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11호. 짐 싸는 거 도와줄까?”

“말은 고맙지만 됐어. 나 혼자도 할 수 있으니까.”

“그래?”

212호가 빙긋 웃었다. 호의가 느껴졌다. 나는 시선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저녁 식사 후에 렉시 교관이 날 사무실로 호출했다. 그녀의 사무실에는 희미하게 초콜릿 냄새가 났다.

“211호. 저녁은 먹었어?”

“먹었습니다.”

“개인 시간에 불러낸 건 미안해.”

“내일 있을 임무 때문이지 않습니까. 이해합니다.”

“장비는 따로 챙기지 마. 임무 지역에서 지원받을 거니까.”

“어떤 임무입니까?”

렉시 교관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뜻을 알아차리고 그녀의 옆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지도를 가리켰다.

“프리셀 왕국 남쪽에 있는 루멜 숲이야. 하페일 공화국과 국경이 겹치는 곳이지.”

프리셀 왕국과 하페일 공화국은 현재 휴전 중이었다.

“하페일 공화국 병사를 저격하는 일입니까?”

“휴전 중인데 그럴 리가.”

렉시 교관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공식적으로 휴전 중이긴 하지만 비공식 소규모 전투는 일상처럼 일어나고 있다는 걸 누구나가 알고 있다.

“프리셀 전략사령부 소속의 올코르 중위가 휴가 중에 레지스탕스에게 붙잡혔어. 놈들은 루멜 숲에 숨어들었고.”

“구출 임무군요.”

표정이 굳어졌다. 구출 임무를 2번 정도 수행해봤는데 모두 실패했다. 인질은 구출하기 전에 적의 고문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조금 달라. 구출은 2순위. 1순위는 사살이야.”

“…군에게 버림받았군요.”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야. 이 양반이 하페일 공화국의 첩자라는 정보가 있어. 확신할 수 없는 정보지만… 상부는 이참에 깔끔하게 죽이기로 선택한 거야. 뭐, 여유롭게 구출할 수 있으면 구출하는 게 목적이야.”

구출보다는 포획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해 보였으나 태클 걸지 않았다.

렉시의 찌푸려진 미간을 보면 그녀도 이 임무를 내켜 하지 않는 게 느껴졌다.

“지원은 어떻게 됩니까?”

“없어. 우리 둘이 전부야. 루멜 숲은 국경지대라 지원이 불가능해. 하페일 공화국의 시선도 닿는 곳이니까. 잘못하다간 전쟁이 터질 수 있어. 그리고 우린 군인이 아닌 용병 신분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거야.”

“…꽤 힘들겠네요.”

“꽤가 아니라 많이 힘들걸. 루멜 숲은 말이 숲이지 실제로는 정글에 가까우니까.”

정글을 상상했다. 끔찍했다. 나락에 처박히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북쪽 설산이 더 나을 것 같다.

“이건 우리가 아니라 특수부대가 해야 할 임무가 아닙니까?”

돌아올 대답을 예상하면서도 투덜거렸다.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넌 뛰어난 저격수이니 특수부대에 소속될 거야. 전략사령부는 네게 미리 경험을 주려는 거고. 고생은 하겠지만 그리 어려운 임무는 아니야.”

“임무 기간은 며칠 정도로 보십니까?”

“빠르면 이틀? 변수가 없기를 빌어야지.”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렉시 교관이 웃으며 내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주물렀다.

“왜 이렇게 처졌어. 오랜만에 이 누나랑 둘이서 데이트하는데 싫어?”

“…뜨거운 숲에서 하는 목숨이 위험한 데이트죠.”

“하하하. 다 경험이야, 경험. 음료수 먹고 기운 내.”

“감사합니다, 렉시 교관님.”

내 앞에 내려오던 오렌지 주스가 위로 올라갔다.

“렉시 누나라고 불러도 되는데?”

렉시 교관이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렉시 누나.”

다시 오렌지 주스가 내려왔다.

나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루멜 숲 지도를 바라봤다. ‘다크 문’ 게임을 통해 본 지도와 똑같았다.

‘마침 내가 원하는 게 루멜 숲에 있다. 아마 게임과 똑같은 곳에 숨겨져 있겠지.’

오렌지 주스로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중요한 건 렉시의 눈을 피해야 한다는 건데… 임무에 변수가 생기면 좋겠군.’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