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6화 > 1276. 페로몬 몬스터
차에서 내린 나는 거리를 걸었다.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을 통해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구에 펭귄 조각품이 있는 집이 보이시죠?
“네. 보이네요. 펭귄을 좋아하시나 봐요.”
-…제 딸이 좋아했어요. 그 집으로 들어가면 돼요. 아무도 없나요?
소피아는 차에서 GPS를 통해 내 위치를 보고 있다. 일반인인 그녀가 직접 움직이는 건 위험했기에, 나 혼자 움직이고 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기감을 퍼뜨렸다. 집 안에 숨어 있는 4명과 밖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6명의 기척이 느껴진다. 적들은 이미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근처에 10명이 숨어 있군요. 모두 저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2명 정도가 B급이고 나머지는 C급 정도로 보이는군요. 쓰러뜨릴까요?”
-…전투는 최대한 피해 주세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자료는 어디에 있습니까?”
-마당의 개집에 있어요. 지붕 오른쪽 아래에 작은 서랍이 있어요. 거기 안에 들어 있는 USB를 가져와 주세요. 서랍은 겉으로 봐서 잘 안 보일 거예요. 손바닥으로 만지면서 찾으세요.
“저놈들이 지금까지 못 찾은 이유가 있군요. 설마 개집에 숨겨뒀을 줄이야.”
-하하.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정문을 통해 소피아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나를 노리고 탄환이 날아온다.
뇌천류(雷天流) 전자기막(電磁氣幕).
탄환은 전자기막을 뚫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망설임 없이 총을 쐈군. 보시 놈. 막 나가기로 했나.’
겨우 총 따위로는 날 죽일 수 없다.
나는 퍼뜨린 기감을 유지하면서 개집으로 다가갔다. 개집치고 꽤 화려해 보였다. 그러나 텅텅 비어있다. 개는 없다.
“애완견은 안 보이는군요. 놈들이 죽인 걸까요?”
-…렉스는 전남편이 데려갔어요.
“아, 그렇군요.”
소피아의 목소리가 우울해졌다. 괜히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남편과 좋게 헤어진 건 아닌 모양이다.
개집 앞에 쪼그려 앉았다. 오른쪽 지붕 아래를 손으로 훑는다. 손가락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잡아당겼다. 서랍이 열리고 USB가 튀어나왔다.
“찾았습니다.”
-역시 그들도 못 찾았군요. 다행이네요.
“근데 전투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벅저벅.
내 오른쪽과 왼쪽에서 두 명의 남자가 걸어왔다. B급 능력자 둘이다. 나머지 8명은 숨어서 대기하고 있다.
“이봐. 그거 이리 넘겨.”
“약속하지. USB만 넘겨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주겠다.”
그들은 각각 칼과 도끼를 들었다. 그들의 무기에 검기가 서린다. 나는 USB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화련비도를 소환했다.
“나도 경고하지. 지금 당장 물러나라. 그럼 살려는 주지.”
도끼를 손에 쥔 털북숭이 남자가 피식 웃는다.
“우리가 B급이라 무시하는 모양인데…. 우리 손에 죽은 A급 능력자만 몇 명인 줄 아나? 7명이 넘는다.”
“오늘 네가 죽을 테니 곧 8명이 되겠군.”
칼을 쥔 말라깽이가 서늘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달려들었다. 나는 검기를 씌운 화련비도를 들어 말라깽이 공격을 막아냈다.
털북숭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목을 노리며 도끼를 휘두른다.
고개를 젖혀서 피한다. 털북숭이와 말라깽이의 공격은 단순한 편이었다.
‘이놈들은 시선 끌기다. 진짜는….’
탄환이 날아온다. 파직! 전자기막이 번뜩이며 탄환을 막아냈다. 떨어진 탄환이 땅바닥을 굴렀다.
‘숨어 있는 8명의 짓이다. 총성이 울리지 않은 걸 보니 마법이나 아티팩트를 쓴 모양이군.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탄환은 구리가 아닌 다른 금속으로 보였다. A급 헌터에게도 통하는 특별한 탄환일 것이다.
후우우웅.
도끼와 칼이 동시에 뻗어 온다.
단순하고 느리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도끼와 칼이 갑자기 일그러지더니 수십 개로 분열했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당황해서 찰나를 사용했다.
반사적으로 그들의 팔과 자세를 분석했다. 내 기준으로 그들의 자세는 엉성했다. 전문적으로 무술을 배운 게 아니다.
‘이건 기술이 아니라 능력이라는 거지. 도끼와 칼이 일그러진 건… 털북숭이의 능력이고… 칼과 도끼가 분열한 건 말라깽이의 능력인가.’
일그러지고 분열해도 바뀌지 않는 게 있었다. 바로 리치. 놈들의 공격 거리가 늘어난 건 아니었다.
나는 가볍게 뒤로 물러났다. 찰나의 효과로 엄청나게 빠른 백스텝이 되어버렸지만.
“뭣.”
“스피드 계열의 능력도 가지고 있나?”
나는 상체와 무릎을 낮추고 화련비도를 옆구리에 가져갔다. 그리고 뇌기를 담아 적들에게 휘둘렀다.
푸른 검기가 그들의 몸을 갈랐다. 털북숭이는 그대로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었지만, 말라깽이는 운이 좋았는지 옆구리에서만 피가 흘렀다.
“일제 사격!!”
말라깽이가 외쳤다.
사방에서 탄환이 쏟아진다. 나는 따로 반응하지 않았다. 반응할 필요가 없었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전자기막이 쏟아지는 탄환을 모조리 무력화시켰으니까.
“망할! 총알이 아예 안 통하는 놈이라는 정보는 못 들었다고!!”
말라깽이가 악을 쓰듯 내게 칼을 휘두른다. 칼날이 3개로 분열한다. 섣불리 막으려 시도하는 대신, 보법을 밟으며 피했다. 그리고 놈의 허점으로 화련비도를 찔렀다.
“커억!”
말라깽이는 피하기는커녕 막아내지도 못하고 가슴을 찔렸다.
“이런 평범한 공격도 못 막는다고? 신체 능력과 마나만 B급이었나. 전투 실력은 C급도 안 되는군. 그래. …너희는 헌터가 아니었군.”
헌터였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헌터가 되고 싶지 않은데도 헌터가 된 건 아닐 것이다. 헌터가 되려면 범죄 이력이 없어야 한다. 이놈들은 능력을 각성하기 전부터 범죄자였던 것이다.
‘뭐, 헌터 일을 하기 싫어한 놈들일 수도 있고.’
말라깽이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숨어서 내게 총을 쏜 놈들이 헐레벌떡 도망치는 게 기감을 통해 느껴졌다.
최대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소피아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화련비도를 역소환하고 소피아에게 갔다.
???
작업실로 돌아온 소피아는 컴퓨터 앞에 앉아 연신 키보드를 두들겼다. 침대에 앉아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콰앙!
커다란 소리에 눈을 떴다. 입가에 흐르는 침을 손등으로 닦아낸 나는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렸다. 의자에서 일어난 소피아가 컴퓨터를 미친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오전 11시였다.
“…소피아. 좋은 아침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군요. 혹시 밤새 일했습니까?”
“……아니요. 도중에 잤어요. 당신이 늦게 일어난 거죠. 편하게 주무셨나요?”
“예. 푹 잤습니다. 소피아는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일이 잘 안 풀렸습니까?”
“잭 테일러가 보시에게 붙잡혔어요. 그 때문에 블루캐드의 활동이 멈췄어요.”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겨우 한 명 붙잡혔다고 블루캐드의 활동이 멈춘 겁니까?”
“잭 테일러가 블루캐드의 중심이었으니까요. 잭 테일러를 따르던 정치인들이 상황을 지켜보기로 판단을 내린 거예요. …그리고 저는 또 헛소리를 지껄이는 기자가 되었죠. 몇몇 언론들이 저를 지지해 주고 있지만… 그것도 오래 안 갈 거예요. 보시는 언론을 너무 잘 이용해요.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정재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보시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어요.”
“……잭 테일러가 붙잡힌 사실을 대중에 알리면 안 됩니까?”
“보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잭 테일러는 현재 공식적으로는 몸이 좋지 않아 활동을 중지한 상태예요. 잭 테일러가 보시에게 붙잡혔다고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을 거예요.”
“음….”
“더 최악인 걸 말해드릴까요? 저와 당신은 수배자가 됐어요. 실시간으로 저희 얼굴이 인터넷에 퍼지고 있죠.”
소피아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나와 소피아의 얼굴이 인터넷 뉴스에 기재되어 있었다. 현상금까지 붙어 있다. 소피아는 5만 달러, 나는 30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려 있다.
“현상금 차이가 너무 나는 거 아니에요?”
“당신은 각성자잖아요. 그것도 A급에 달하는 능력자.”
“흠. 그것도 그렇네요.”
“…침착하시네요. 전 이거 보고 미치는 줄 알았는데.”
“겨우 이런 걸로 흥분 안 해요. 중요한 건 우리가 이다음에 어떻게 하냐는 거죠.”
소피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블루캐드는 잭 테일러를 구출할 계획을 짜고 있어요. 하지만….”
“잘 안되나 보죠?”
“중심이 없어서 그런지 미온적이에요. 따로 시위를 준비하는 모양인데… 큰 효과는 없겠죠. 지금의 블루캐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럼 우리 둘이서 잭 테일러를 구할까요.”
“…아뇨. 그건 힘들어요. 다른 방법은….”
소피아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방법이 있어요. 당신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지만요.”
“제가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너무 무리한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게 뭔지 아시나요?”
“…어, 글쎄요. 자유?”
“자유는 당연한 거예요. 미국인들은 히어로를 좋아해요. 초능력을 가진 슈퍼 히어로 말이에요.”
“그건 저도 압니다. 미국의 잘나가는 헌터들은 따로 히어로라고 불리지 않습니까. 어지간한 연예인들보다 인기가 좋다던데.”
“맞아요. 그래서 말인데… 당신, 다크 히어로가 될 생각이 없나요?”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진심이에요. 저에 대한 평가는 둘째치고, 당신에 대한 여론은 의외로 나쁘지 않아요. 당신이 어제 죽인 3명의 사람은 모두 마피아. 그것도 초능력을 가진 범죄자, 빌런이기 때문이죠. 이미 몇몇 커뮤니티에서 당신을 주피터라고 부르며 찬양하고 있어요.”
“주피터라고요?”
“모르시나요? 그리스 신화의 주신인 제우스….”
“아니. 그건 압니다. 제가 궁금한 건 미국인들이 저를 찬양하는 이유입니다.”
“화끈하게 범죄자를 처벌하는 다크 히어로는 흔치 않거든요.”
실력 좋은 헌터들은 다크 히어로 짓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람들이 원하더라도 다크 히어로는 결국 범죄자기 때문이다.
고작 사람들에게서 인기를 끌기 위해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범죄자가 될 이유는 없다.
“그 다크 히어로라는 거, 꼭 해야 합니까?”
“저희는 이미 범죄자예요. 이대로는 경찰과 현상금 사냥꾼에게 쫓길 일만 남았죠. 하지만 당신이 미국인들이 원하는 완벽한 다크 히어로가 되어준다면…. 미국의 여론을 저희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어요. 주지 보시를 악으로 규정해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가능할 거예요.”
“…….”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런저런 것들을 따져본다.
일단은 꽤 재밌어 보인다.
그리고 다음은 위험성인데…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 만했다.
“까짓것 한번 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