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9화 > 1459. 다크 문
도시는 낮부터 번잡했다.
시민들은 모두 바쁜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뛰어다녔고, 도로에는 말과 마차들이 질주한다. 중무장한 경찰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위압적인 분위기를 내뿜는다.
활기차지만, 질서가 있는 평소의 네오 런던과는 달랐다.
물론 나는 이게 무슨 이유인지 안다. 100일마다 매번 있는 일이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날짜 개념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도시 곳곳에서 어느 유명한 남자 연예인의 녹음된 목소리가 울린다.
-사랑하는 네오 런던의 신사 숙녀 여러분! 이번에도 그날이 찾아왔습니다. 네. 다크 문이 뜨는 날입니다. 아침 공기부터가 스산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스산하다라.
그 표현이 틀린 건 아니었다. 네오 런던의 아침은 항상 안개가 낀 상태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괜히 코트를 여미며 거리를 걸었다. 내 걸음이 향하는 곳은 집도, 가게도, 공장도 아니었다. 나는 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네오 런던은 안전합니다. 다크 문은 아주 먼 과거부터 떴습니다. 네오 런던은 지금까지 다크 문을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실종자는 다크 문이 뜰 때부터 매번 100명 이상 발생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그가 다크 문에 대해 지껄이든, 말든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을 집중하는 건 나 정도일 뿐일 것이다. 내가 그의 열렬한 팬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심심했다. 그가 지껄이는 말에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오후 6시부터 네오 런던의 모든 구역이 봉쇄됩니다. 시민 여러분은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십시오. 일찍 잠드는 걸 추천드립니다. 잠이 오지 않으신다고요? 가까운 약국으로 가보십시오. 약국은 다크 문은 뜨는 날에는 아주 싼 값에 수면제를 판매합니다. 물론 한 사람에게 하루 용량의 수면제만 팝니다. 뜨거운 부부 여러분. 아무리 사이가 뜨거워도 오늘 밤 만큼은 참아주십시오. 제가 아는 친구도 다크 문이 뜬 날에 섹스를 하다가 그만….
섹스.
연예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연예인의 말을 지적하지 않는다. 이 도시에서. 아니, 이 세계에서 노골적이고 직설적이며 더러운 농담은 일상에 가까웠다.
‘다크 문이 뜬 날, 남편과 섹스를 하고 임신을 한 여자가 괴물을 낳았다는 일화를 말하는 거겠지.’
다크 문의 영향을 받아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인간의 씨를 받은 인간의 자궁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이 아닌 괴물들. 인터넷만 조금 할 줄 알면 의외로 쉽게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운이 좋을 경우 인자를 얻은 인간이나, 초능력자가 태어날 수 있지.’
그 덕분에 인생 역전을 노리며 일부러 다크 문에 섹스하며 임신하려는 자들도 많다. 일부러 돈을 주며 실험을 시도하는 과학자들도 적지 않다.
-문은 반드시 잠그십시오. 창문은 합판으로 가리시고, 가급 적이면 집안에서 불을 켜지 마십시오. 불청객들이 불빛을 보고 찾아갈 수 있으니까요. 누군가가 문을 두들기고, 돌아가신 가족이 보인다면 바로 런던 가드에 연락하십시오. 지인이 문을 열어달라고 해도 문을 열지 마십시오. 아이의 성격이 극성이라면 수면제를 먹이고 재우십시오. 조용히, 죽은 듯이, 아무도 모르게 행동하십시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오늘은 다크 문이 뜨는 날입니다. 오후 6시에….
게임 했을 때가 떠오른다. 처음에 게임 속 NPC들의 다크 문을 대하는 반응을 보고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와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일반인들에게 다크 문은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였다. 자연재해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저번 다크 문은 어땠더라.’
100일 전. 나는 네오 런던에서 첫 번째 다크 문을 겪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자고 일어나니 하늘에는 검은 달이 내려가고 평소의 태양이 떠 있었다.
‘그때는 네오 런던에 적응하는 것도 빡세서 얌전히 집에서 생활했지.’
다크 문을 마냥 두려워하는 일반인들과 달리, 자신을 지킬 힘을 가진 자들에겐 다크 문은 기회의 밤이기도 했다.
‘다크 문이 뜬 날에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상당히 많지.’
오늘 내가 네오 런던을 나서는 것도 그 이유였다.
‘지금 내게 급한 건 마나 로드의 수복이야. 마나 로드가 엉망이라 그런지, 마나 로드를 늘리는 것도 쉽지 않아.’
네오 런던에 오고 마법 수련은 꾸준히 해왔다. 그러나 마나 로드는 1개도 늘어나지 않았다.
파괴된 16개의 마나 로드가 내 성장을 막고 있었다.
‘그 치료사를 찾아가려면 그것들이 필요해.’
오늘 밤에는 그 필요한 것들을 얻을 생각이었다.
나는 밖으로 도시 밖으로 빠져나가는 열차를 탔다. 열차 내부는 한산했다. 하지만 손님도 몇몇 있었다. 대부분이 피 냄새가 나는 손님들이다. 나는 그들이 용병이라는 걸 확신했다. 물론 같은 용병이라는 이유로 다가가서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는다. 말을 걸어도 돌아오는 건 십중팔구의 확률로 욕설일 것이다.
조용히 좌석에 앉아 획획 바뀌는 열차 풍경을 구경했다.
***
네오 런던 시외구역.
Z구역 보다 더 먼 곳에 있는 이 구역은 네오 런던의 모든 구역을 합친 것보다 크다.
시외구역이란 네오 런던을 소유한 영토에서, 네오 런던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휘황찬란한 도시와 달리 시외구역은 야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의회는 시외구역의 관리를 아예 포기했지.’
지나치게 위험하면서도 방대하다. 그러면서 얻을 자원은 별로 없어서 투자가치가 없다. 그런 이유로 네오 런던은 시외 구역을 손에서 놓았다. 가끔씩 정리를 하긴 하지만, 그건 정말 가끔이다.
‘다크 문 플레이어에겐 익숙한 곳이지.’
레벨링, 히든 탐험, 히든 퀘스트 등등. 원작 게임 플레이어들에겐 신나는 곳이기도 했다.
‘여기 숨겨져 있는 것들은 모두 내가 얻을 수는 없어.’
지금 내 실력으로도 얻기 힘든 것들이 많다. 그리고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사전에 준비해야 할 물건들도 없었다. 지금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한정적이다.
‘음….’
나는 시외구역을 보며 곤란함에 빠졌다.
게임을 통해 알고 있는 시외구역의 전체적인 모습은 비슷했지만, 세세하게 들어가면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원작은 PC게임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이 방대한 환경을 PC로 전부 구현하는 건 불가능하고….’
아무래도 오늘은 고생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거리를 걸었다. 이곳은 열차 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었다.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주점이 보이고…. 그래. 이건 게임과 같네.’
기억을 더듬으며 마을 거리를 걸었다.
오전이라 주점의 문은 닫혀 있었다. 나는 주점 옆 골목에 널브러져 있는 늙은 남자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NPC 나카리오.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니 NPC라고 부르는 건 좀 그렇지만.
눈을 감고 있던 나카리오는 내가 다가오자 한쪽 눈만 뜨며 세상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한 푼 줍쇼….”
나는 주머니에서 미리 환전해두었던 동전을 꺼냈다. 워치로 간단히 결제할 수 있는 네오 런던과 달리 시외구역에서는 현금이 주로 유통된다.
띵!
그에게 10 크레딧 동전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동전은 포물선을 그리며 그의 앞에 떨어졌다.
“감사. 복 받으실 거요.”
띵!
“오오…. 좋으신 분이구만.”
띵!
“30크레딧이나 주는 거요? 고맙소.”
띵!
띵!
띵!
“…뭔가 내게 원하는 거 있소? 보아하니 네오 런던에서 한탕 하러 온 용병 같은데.”
띵!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동전을 튕겼다.
총 20번. 2,000 크레딧을 그에게 적선한다.
게임에서는 20번을 연속 적선을 하면 나카리오가 고맙다며 팔찌를 준다. 별 대단한 물건은 아니다. 팔찌를 분해하면 소소한 이득을 볼 수 있는 정도?
하지만 나카리오는 게임 속의 반응과는 전혀 달랐다.
“이 개새끼가! 지금 내가 거지라고 무시하는 거냐?! 좆같은 새끼야. 너는 내 꼴이 안 날 것 같아? 빌어먹을 용병 새끼. 나가 뒤져라!”
그는 욕설을 내뱉고 골목길 안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나는 게임과는 다른 나카리오의 반응에 놀라서 굳었다.
게임과 똑같이 행동해도 돌아오는 반응은 전혀 다르다.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확인해보니… 귀찮아질 것 같군. 게임에서는 말을 거는 것만으로 간단히 퀘스트를 받을 수 있었는데… 현실은 그게 안 되니.’
그대로 골목길을 지나쳐 가려던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투박한 팔찌를 발견했다. 게임에서 나카리오가 주는 팔찌와 디자인이 같았다. 나는 팔찌를 주워서 챙겼다. 도시에 가져가서 분해하면 2만 크레딧은 벌 수 있다.
나는 마을을 확인하듯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마을 중심에 있는 분수에는 동전을 던졌다. 1개, 2개, 3개. 분수 안으로 동전이 계속해서 들어간다.
“분수에 동전을 넣으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헛소문을 믿는 거야? 그거 마을 사람들이 외지인의 돈을 뜯으려고 지어낸 개소리야.”
4개째를 던지며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봤다.
키가 큰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검은색 캡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그 아래의 호박색 눈동자는 기계처럼 빛난다. 눈매는 날카로웠고, 검은색 머리카락은 목의 라인이 잘 보이는 짧은 단발이었다.
옷은 회색 롱 코트를 걸쳤다. 열린 코트 사이로 검은색 스키니 팬츠와 복부를 훤히 드러낸 배꼽티를 입고 있다. 드러난 복부는 군살 하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선명한 근육이 자리잡고 있다. 그 위로는 풍만한 언덕이 존재감을 주장한다.
허리춤에는 탄띠를 둘렀다. 허벅지에는 건 홀드를 차고 있고, 코트 안쪽에 나이프 일부가 엿보인다.
나는 그녀를 보고 놀랐다. 한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무척 놀랐다. 그녀가 미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네? 나름 미인이라고 자부하는데…. 그렇게 반응하니 섭섭해지는걸.”
그녀는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며 만들었던 캐릭터 중 하나였다. 컨셉 플레이를 하기 위해 유저가 만든 모드를 이용해 만들었다. 외형은 물론이고 능력치와 스킬, 육체의 은밀한 부분까지 전부 설계해서 만든 캐릭터.
“…너는 짜파구리인가?”
“갑자기 뭔 개소리야? 혹시 정신병자였어?”
짜파구리.
그 캐릭터의 이름이었다.
당시 짜파구리에 빠져 있어서 나도 모르게 설정한 이름이었다. 나름 귀여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던지라 그냥 그 이름으로 플레이 했었다. 원한다면 이름 정도는 언제든지 바꿀 수 있기도 했고.
그녀가 내 몸을 위아래로 훑는다.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포착했다. 기계 눈이다.
“흐음.”
“그 기계 눈으로 날 스캔했나?”
“어, 알아차렸어? 보통이 아니구나. 미안, 이건 일종의 습관이야.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한다. 뭐, 그런 느낌? 딱히 해가 되는 건 아니니 봐줘.”
“그러지. 대신 네가 누군지 말해줬으면 좋겠군.”
“벨 테리어. 용병 나부랭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