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8화 > 1488. 팔라딘 : 악멸의 여정
드디어 발렌티어의 성검의 재련이 끝났다.
아멜리아로부터 성검을 받은 나는 기뻐했다. 발렌티어의 성검을 받았으니 이제 보다 쉽게 악마와 타락자들을 처단할 수 있게 됐다.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발렌티어의 성검이 가진 특성은 관통.’
적의 방어력을 무시하고 고정 데미지를 입힌다. 방어력이 높은 악마일수록 카운터가 되는 성검인 것이다.
‘무엇보다 좋은 건 성검은 어지간해선 부서지지 않는다.’
나는 워낙 검을 험하게 다루다 보니 전투 중에 부서지는 상황이 제법 많았다. 그런 상황이 적어진다는 것만으로 만족스럽다.
“사, 살려주십시오, 팔라딘이시여! 저, 저는 악마가 아닙니다! 타락자 또한 아닙니다!”
한 평민이 내 앞에 무릎 꿇고 손을 싹싹 빌었다. 내 주위에는 성기사와 이단심문관들이 근엄하게 서 있었고, 그 주위에는 발렌티어의 시민들이 숨소리마저 죽이며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너는 악마도, 타락자도 아니다.”
“그, 그럼…!”
“허나 네 몸을 타고 흐르는 죄악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다. 내 눈에는 보인다. 너는 인류의 배신자다. 네 죄가 그 증거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인류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이것 또한 거짓말이었다. 내 눈에는 남자의 죄악이 또렷이 보인다. 도둑질이나 살인 이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
나는 그의 죄를 노려보며 말했다.
“2년 전.”
“예?”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너는 흙탕물로 바지를 적시며 골목길을 뛰었다.”
“그, 그건….”
남자의 두 눈이 흔들린다.
2년 전의 비내리는 밤.
남자가 그날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너는 그때 지붕에 거꾸로 매달린 악마를 만났다. 너는 악마에게 빌었다. 아비를 죽여주소서. 악마는 너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너의 주인이 되었다. 아비의 재산이 그렇게 탐났느냐?”
“어, 어떻게 그걸….”
“말했을 터다. 내 눈에는 네 죄악이 보인다고.”
죄악이 보인다는 건, 그 죄를 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검을 들어 올렸다.
발렌티어의 성검의 검신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이 홀린 듯이 성검을 바라본다.
“히이익!”
남자는 날카로운 두려움에 찬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고 했다. 내 발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놈의 다리를 자비 없이 짓밟는다. 우지끈. 뼈와 살이 으스러지며 피가 흐른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너의 육체를 심판할 것이고.”
대검을 내려찍었다. 검이 남자의 등에 박혔다. 악마도, 타락자도 아닌 남자는 곧 죽을 것이다.
“헤리안느 여신께서 네 영혼을 심판할 것이다.”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놈의 목을 베었다.
경험치가 들어온다.
타락자를 죽였을 때 얻는 그 절반의 절반조차 되지 않는 경험치였다. 하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렇게 모은 경험치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발렌티어의 시민들에게 말했다.
“신앙을 버리지 말도록.”
***
발렌티어는 평화로워졌다.
악마와 타락자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악마와 거래한 이단도 보이지 않았다. 하루에 최소 30명 이상을 죽이고 다니다 보니 시민들은 스스로 몸을 사렸다.
그래도 내 눈을 피해 숨어 있는 이단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발렌티어를 돌아다녔다.
발렌티어의 시민들은 나를 볼 때마다 무릎을 꿇고 헤리안느 여신을 향해 기도했다.
“헤리안느 여신이시여,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내려주시어 감사하옵니다. 저희가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여신님의 은총 덕분이오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헤이안느 여신이시여!”
“헤리안느 여신님이 있기에 저희들이 오늘도 살아갑니다!”
시민들은 열정적으로 기도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렌티어는 어제보다 오늘 더 신실한 도시였다.
철컥철컥.
갑옷 소리를 내며 걷고 대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벽에 멍하니 기대고 있는 거지 노인이 보였다. 나는 노인에게 다가가 말했다.
“늙은이. 너는 왜 기도하지 않느냐?”
“…이거, 이거. 손가락의 대악마 수톤을 죽인 팔라딘이시구려? 팔라딘이여. 나는 헤리안느 여신을 믿지 않나이다.”
“왜지?”
“헤리안느 여신이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지! 헤리안느 여신은 동화 하나, 작은 빵조각 하나 내게 주지 않았소! 그런데 내가 왜 헤리안느 여신을 믿어야 하오?!”
“네가 살아 있는 이유자체가 여신께서 내리신 자비이기 때문이다.”
“크크.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내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오! 헤리안느 여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노인이 소리친다.
노인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노인은 삶의 의지가 없었다. 이미 그 몸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병들어 있었다. 노인은 앞으로 며칠 내로 죽는다. 어쩌면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었다. 죽음의 공포는 노인에게 작은 광기를 선사했다.
“…그렇군.”
“알았으면 가시오. 나는 당장 오늘 죽더라도 기도 따윈 하지 않을 것이오.”
여기서 내가 물러난다?
지금 우리를 지켜보는 눈들이 많다.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시민들이 나를 뭐로 생각하겠나.
“너는 이단이었군.”
“…뭐?”
“시끄럽다, 이단아.”
나는 주먹으로 노인의 머리를 후려쳤다. 안 그래도 시원찮았던 노인의 이빨이 우수수 털린다.
힘 조절은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노인의 머리는 수박처럼 터졌을 것이다. 나는 노인이 죽지 않을 정도로 구타하며 들어 올렸다.
‘이 노인은 죽는다. 오늘을 넘기기 힘들겠군.’
나는 노인의 목덜미를 잡고 주위를 둘러봤다. 시민들이 나를 지켜본다. 그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불경하군.’
인류의 수호자인 팔라딘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심히 거슬리는 눈빛에 이놈들이 이단이 아닐까 싶어 성안을 사용했다.
키이이이이잉.
이단은 아니었다. 죄악도 평범했고, 타락자는 없다.
‘하지만 거슬리는 눈빛을 보니 이단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것들을 붙잡아 한 곳에 집어넣고 타락시키는 것이다. 나는 타락한 놈들을 죽여 경험치는 얻는다.
말하자면 경험치 공장. 더 효율적으로,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아니지. 나는 팔라딘이다. 그런 짓을 저지를 순 없지.’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계에 오고 너무 신실해진 것 같았다.
“전원 들어라. 오늘 저녁부터 기도회를 실시한다. 도시의 모든 이들은 광장에 모여야 할 것이다. 기도회에 나오지 않는 자는… 이단이다.”
나는 시민들에게 말한 뒤 광장으로 갔다.
광장 중심에 십자가를 세우고 노인을 매달았다. 노인의 주위에는 기름에 젖은 땔감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노인은 덜덜 떨었다. 간절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노인의 입이 꿈틀거렸다. 허나 노인의 턱은 박살 났던지라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광장에 발렌티어 시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헤리안느 여신께 기도를 시작하겠다. 모두 무릎 꿇어라.”
시민들이 모두 바닥에 무릎 꿇었다.
파직.
나는 작은 스파크를 일으켜 땔감에 불을 일으켰다. 작은 불은 기름과 땔감을 먹고 순식간에 커졌다. 노인이 산채로 불타오른다. 시민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노인의 비명을 들었다.
“나를 따라 기도하라. 전능하신 헤리안느 여신이시여.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모두 헤리안느 여신의 은덕이옵니다.”
나의 말에 시민들이 일제히 따라 했다.
“전능하신 헤리안느 여신이시여.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모두 헤리안느 여신의 은덕이옵니다.”
“헤리안느 여신이시여, 우리는 모든 것을 바쳐 여신께 봉사하겠나이다.”
“헤리안느 여신이시여, 우리는 모든 것을 바쳐 여신께 봉사하겠나이다.”
“우리는 악마를 죽이고, 타락자를 불태워 여신께 신앙을 증명하겠나이다.”
“우리는 악마를 죽이고, 타락자를 불태워 여신께 신앙을 증명하겠나이다.”
“여신께선 우리가 악에 물들지 않도록 가호를 내려주시옵소서, 한 줄기의 빛을 내려 우리를 인도하시옵소서.”
“여신께선 우리가 악에 물들지 않도록 가호를 내려주시옵소서, 한 줄기의 빛을 내려 우리를 인도하시옵소서.”
기도는 계속 이어졌다.
노인의 몸이 재가 되어 흩날려도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우뚝 멈추어서 사람들 사이에 있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이단심문관들이 그 즉시 남자를 붙잡아 내 앞으로 끌고왔다.
“왜 기도하지 않았지?”
“기, 기도하였습니다! 파, 팔라딘께서 무언가 오해를….”
“방금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금 내 귀를 무시하는 것이냐?”
“바, 방금은 목이 아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마음속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지금은 목소리가 잘도 나오는군. 이단 놈. 너는 나와 헤리안느 여신님을 모욕하였다.”
“절대 아니… 끄아아아아아악!”
나는 남자를 산채로 찢어 죽이고 기도회를 다시 이어갔다.
한참 기도를 이어가는데 또 문제가 발생했다.
도시의 위쪽.
어두운 밤하늘을 장막 삼아 몸을 감추고 있는 악마가 보였다.
나는 즉시 검을 들어 하늘을 날고 있는 악마에게 던졌다. 악마는 급히 피하려고 했으나, 내가 던진 검은 악마의 날개를 꿰뚫었다. 악마가 하늘에서 추락한다.
“우리를 염탐하고 있던 역겨운 악마가 아래로 추락했다. 성기사들이여, 악마를 데려오라.”
“예. 팔라딘이시여.”
성기사들이 악마를 데려왔다. 나는 철 십자가에 악마를 매달았고, 사제들이 악마의 힘을 봉인했다.
“발렌티어의 시민들이여, 보아라, 이것이 악마다. 헤리안느 여신의 적이자, 우리의 원수이다. 그대들의 부모와 형제, 자식들은 악마들에게 잡아 먹혔다. 악마는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모독이다.”
발렌티어의 시민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악마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두려움과 분노가 악마에게 향한다.
이건 딱히 내가 선동하지 않아도 됐다. 악마에 대한 증오는 이미 뿌리 깊게 박혀 있으니.
“크, 크크. 멍청한 인간 놈들. 이 세상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다. 너희는 가축으로서….”
“닥쳐라, 이 악마야!”
“꺽!”
악마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악마의 이빨이 부서졌다.
“참회하라! 참회하라! 악마는 참회하여라!”
주먹을 휘두른다.
퍽! 퍼억! 퍽! 퍽! 퍽!
“참회하라! 참회하라!”
퍽퍽퍽!
“참회하라!”
퍽!
1시간 동안 쉬지 않고 주먹만 휘둘렀다.
오른쪽 눈알이 터지고 온몸이 피투성이인 악마가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참회, 참회하였나이다…!”
“악마야.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냐?”
“헤리안느 여신이십니다!”
“이 더러운 악마 새끼가! 감히 신성한 여신님의 이름을 그 사악한 입에 담는가! 참회하라!”
퍼억!
“끄어어억…!”
“다시 묻겠다. 악마야.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냐?”
“여, 여신님이십니다!”
“여신님 누구.”
“헤리안느 여신님이십니다!”
“그 더러운 입으로 여신님의 이름을 담지 말라! 참회하라!”
“악마야.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냐?”
“……팔라딘이십니다.”
“틀렸다. 나는 헤리안느 여신의 종일 뿐이다. 참회하라!”
“끄아아아악! 나,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건방진 놈! 참회하라!”
“이 미친 팔라딘 새끼가!”
“참외하라! ……아니, 참회하라!”
“아아아아악! 대악마시여! 나를 구원해주소서!”
“대악마 수톤은 내 손에 죽었다. 다른 대악마 또한 내 손에 죽을 예정이다. 너는 진심으로 참회하라!”
퍽퍽퍽퍽퍽!
참회의 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아려오는 주먹을 흔들며 곤죽이 된 악마에게 물었다.
“너, 바퀴벌레보다 못한 악마야. 참회하였느냐?”
“…네. 참회하였나이다.”
“헤리안느 성서 118장 12절을 읊어 보아라.”
“…네?”
“네가 정말로 참회하였다면, 당연히 성서의 구절을 알고 있지 않겠느냐. 빨리 읊어 보아라.”
“저, 저는 성서를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성서의 내용을 알겠나이까?”
“모른다는 거군…. 그건 네가 진심으로 참회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참회하라!”
퍽퍽퍽!
“아아아악! 이 미친 새끼가…!”
나는 몇 번이나 악마에게 성서의 구절을 물었다. 허나 악독한 악마는 참회하였다면서도 끝까지 성서의 구절을 말하지 못하였다.
“새, 생각났습니다! 성서 118장 12절! 나는 빛을 내려 너희를 보살필지어다!”
“…….”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나는 사제에게 눈짓했다. 성서의 내용이 맞냐는 물음이었다. 사제는 항상 들고 다니는 성서를 복사한 책을 펼치며 구절을 찾았다.
“구, 구절의 내용이 아닙니다! 악마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감히 거짓말을 해?”
“미친놈들아! 너희도 성서의 구절을 모르지 않느냐! 너희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냐. 네가 진정으로 참회하였다면 자연히 성서의 내용을 알게 될 것이다. 참회하라!”
한참을 악마를 패던 나는 시민들 사이에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이단심문관에 의해 아이가 내 앞으로 끌려왔다. 아이는 벌벌 떨었다. 아이의 아비는 어제 내게 찢겨 죽었다.
“이단의 아이야. 고개를 들어라.”
“파, 팔라딘이시여. 저는 이단이 아닙니다…!”
“알고 있다. 허나 너의 아비는 이단이었다. 너의 아비를 이단으로 이끈 건 저 악마다. 너의 아비가 죽은 건 모두 저 악마 때문이다.”
나는 아이에게 참회봉을 건네주었다. 아이는 작은 손을 덜덜 떨며 참회봉을 받았다.
“악마를 참회하라. 너의 신앙을 증명하라.”
“으, 으으… 으아아아악! 참회하라! 이 악마야! 참회하라!”
아이가 악마를 향해 참회봉을 휘두른다.
“참회하라! 참회하라!”
퍽! 퍽퍽퍽!
아이는 팔이 빠지도록 있는 힘껏 참회봉을 휘둘렀다. 나는 아이의 신앙에 감격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말에 후창했다.
“참회하라! 참회하라!”
그러자 시민들도 외친다.
“참회하라! 참회하라!”
“참회하라! 참회하라!”
“참회하라! 참회하라!”
십자가에 매달린 악마는 두려움에 가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친… 미친 것들…!”
“참회하라! 참회하라!”
나는 시민들을 둘러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팔라딘으로서 발렌티어의 시민들을 계도하였다.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슬슬 졸리니 자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