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0화 > 1500. 팔라딘 : 악멸의 여정
나는 주먹으로 성소의 문을 후려쳤다.
쾅!
부서진 문이 바닥을 뒹굴었다.
드러난 성소의 모습은 경악스러웠다. 성스러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건 오직 불경뿐이었다.
성수가 흐르는 벽에는 피가 흐르고, 성수가 고이는 연못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여신을 조각한 신상은 반쯤 부서져 있었다.
여신상 아래에는 여신을 닮은 악마가 다리를 꼬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왔어? 꽤 늦었네?”
“죽어라!”
신성검 스킬을 사용하며 집행검을 휘둘렀다. 황금빛 검기가 허공을 가르며 블레아트에게 날아갔다. 블레아트가 집게손가락을 세웠다. 마치 장난치듯이 집게손가락을 까딱인다. 보이지 않는 방어막과 함께 신성검이 사라졌다.
나는 얼굴을 굳혔다.
방금 것은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그런 일격이 한순간에 막힌 것이다. 물론 손가락 하나에 막힌 건 아니다. 손가락을 까딱인 건 단순한 퍼포먼스에 가깝다. 진짜는 그녀가 운용하는 막대한 마력이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쉽게 막혔다.’
출렁.
고여있는 핏물이 요동친다.
저것들은 모두 인간의 피다. 저 연못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간이 희생되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대악마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멀리서 공격하는 게 통하지 않는다면… 가까이 가서 죽인다. 그 추악한 몸통에 집행검을 쑤셔 박아 직접 대악마의 숨통을 끊을 것이다.
“재밌는 거 알려줄까? 우리 대악마들과 네가 그렇게 물고 빠는 여신은 태생이 같아. 내 얼굴이 왜 여신과 똑같겠어? 헤리안느와 나는 자매야.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함께 태어났지.”
“그래서?”
“…그 반응을 보니 이미 알고 있었구나?”
다섯 대악마와 여신의 시작점은 같았다.
태초의 악마.
네 명의 대악마는 태초의 악마의 육신에서 태어났고, 블레아트와 헤리안느 여신은 태초의 악마의 갈라진 영혼이었다.
흔한 이야기다. 블레아트는 영혼의 악한 부분이고, 헤리안느는 영혼의 선한 부분.
태초의 악마에게 선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초의 악마는 이름만 ‘악마’일 뿐이지, 실제로는 창조신에 가깝다. 태초의 악마라는 것도 악마들이 붙인 이름일 뿐이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헤리안느가 관능적인 숨을 내쉬었다.
“나와 헤리안느는 이어져 있어. 내가 죽으면, 헤리안느도 죽어. 네 손으로 여신을 죽일 거야?”
“헛소리 마라.”
집행검을 휘두른다. 위에서 아래로. 찰나까지 사용한 최속의 검격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블레아트의 몸이 일그러지더니 옆에 있는 피로 가득한 연못에 나타났다.
“안 통하네. 맞아. 헛소리야. 이미 우리는 분리되었으니까.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지. 하지만 영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내가 죽으면 헤리안느는 최소 천 년 이상은 힘을 못 쓸걸?”
“너를 비롯한 대악마들이 소멸하면 여신께서 힘을 쓸 일도 별로 없으실 거다.”
“우리가 사라지면 헤리안느가 만족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헤리안느의 목적은 귀환이야. 우리에게 추방된 그년은 단순히 이 땅에 돌아오고 싶을 뿐이야. 돌아온 후에? 인간은 헤리안느의 가축이 될 뿐이지.”
“아니, 우리는 가축이 아니라 신자가 될 것이다.”
“진실을 말해줘도 답이 없네. 그럼 이건 어때? 성녀. 네가 사랑하는 성녀를 살리고 싶지? 신앙을 버리고 우리에게 돌아서. 그럼 천년이고 만년이고 성녀와 살 수 있게 해줄게. 둘이서 영원을 함께하는 거야.”
“…….”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이 분노는 눈앞의 악마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향했다.
한순간이지만 진심으로 흔들렸다. 모든 걸 버리고 그녀와 함께 영원을 살아가는 걸 꿈꿨다.
그러나 내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멜리아 또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타락은 곧 변질이고 포기다.
타락하는 순간 인간의 감정은 무용지물이 된다. 악마와 타락자는 사랑을 모른다.
“블레아트. 더 이상 네년의 말에 귀담아듣지 않겠다. 진작에 이래야 했다.”
뇌천류(雷天流) 질풍신뢰(疾風迅雷).
파지지지직.
황금빛 번개가 내 몸을 감싼다.
‘홀리 오라.’
내 머리 뒤로 황금빛 후광이 번뜩인다.
‘신성검.’
손에서 시작된 황금빛이 집행검을 코팅했다. 질풍신뢰의 영향을 받아 그런지 그 형태는 번개와 흡사했다.
블레아트를 향해 돌진했다. 눈 깜짝하는 순간에 거리를 좁히고 그 가슴팍에 집행검을 찔러넣으려 시도한다.
블레아트는 박쥐와 같은 날개를 퍼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지면에서 악마의 손이 튀어나와 내 몸을 후려쳤다. 나는 천장을 박살 내며 하늘 높이 날아갔다.
점점 작아지는 발렌티어의 도시를 보며 피를 토했다. 갑옷 사이로 핏방울이 하늘에 흩날렸다.
나는 죽었다. 공격당했을 때 신성력이 흔들렸다. 흔들린 신성력을 비집고 블레아트의 마력이 몸속에 파고들었다. 심장을 비롯한 내장들이 폭발했다.
‘지쳐 있었던 게 문제였다.’
그러나 기회는 있었다.
부활.
몸이 회복되었다. 지친 육신에 활력이 돌았다. 몸은 다시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온몸에 신성력을 휘감았다. 파지지직. 황금빛 전류가 몸 전체에 퍼져나간다.
저 아래, 성당 꼭대기에 요염하게 서 있는 블레아트가 보였다. 블레아트는 나를 보며 비웃고 있었다. 집행검의 끝을 블레아트에게 겨누었다.
‘천심. 찰나.’
[천심(天心)을 발동합니다. 1분 동안 지속됩니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2]
영천류(影天流) 극기(極技) 천광(天光).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지상으로 떨어졌다.
사방이 휩쓸린다. 번개가 몰아치고, 건물 파편이 튀었다.
도시 내에서 추격전이 벌어졌다. 나는 미친 듯이 달려 블레하트의 뒤를 쫓았고, 블레아트는 나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몸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공격만 해대는 건 아니었다. 블레아트는 내게서 도망치면서 교묘하게 반격했다.
‘이래선 안 된다.’
나는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반면에 블레아트는 지칠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가 내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다. 블레아트가 노리는 것도 그것이겠지.
‘세크리파이스.’
완전 회복을 믿고 목숨을 버린다.
[완전 회복을 사용합니다.]
희생의 기적은 막대한 힘으로 돌아왔다.
용솟음치는 전능감을 느끼며 집행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허공에 실선이 그려졌다. 세상에 선이 그어지고 베어진다.
“어어…?”
먼저 블레아트의 날개를 베었다. 기동력을 잃은 블레아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지면을 박차며 거리를 좁힌다.
정면에서 마력의 해일이 땅을 뒤엎으며 달려들었다.
‘신성검!’
마력의 해일을 베어 가른다.
땅에서 악마의 손들이 나타나 내 몸을 잡으려 했다. 나는 도약하며 무시했다.
뛰어서 도망치려는 블레아트의 다리를 벤다. 블레아트가 바닥에 쓰러졌다.
전능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힘이 쭉 빠지며 탈력감이 밀려왔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게 마지막이다.
“악마는 멸절할 것이다!”
블레아트의 가슴에 검을 쑤셔 넣었다.
***
헤리안느 여신이 눈앞에 있었다.
나는 여신의 앞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고했다.
“여신이시여! 모든 대악마를 죽였습니다! 이 어둠에 빠진 세상을 여신의 빛으로 채워주소서!”
여신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윽고 여신의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가 그려진다.
“팔라딘이여. 그대는 의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젠 그대에게 필요한 건 안식이니, 마지막 남은 의무를 행하라.”
“제게 남은 마지막 의무는 무엇입니까?”
“악의 싹을 지우는 것이다.”
여신과 나의 사이로 인간들이 나타났다. 젖도 떼지 못한 갓난아기부터 작은 여자아이, 씩씩한 소년도 있었다. 연약한 노인과 병든 청년도 있었으며, 기도하고 있는 여자도 있었다.
“그들은 악의 씨앗이니, 언젠간 씨앗이 발아하여 악마가 될 것이다. 그들을 죽일 것이다.”
나는 집행검을 들고 일어났다.
여신께서 악의 종자를 없애라고 말씀하시니, 팔라딘으로서 마땅히 그 의지를 따라야 했다.
가장 먼저 발끝이 향한 곳은 가증스럽게도 여신께 기도하고 있는 여자였다. 악의 종자인 주제에 여신께 기도한다? 아주 건방졌다.
나는 그녀의 목을 베려다가 멈칫했다.
“…여신이시여. 그녀는 불쌍한 여자입니다. 악의 종자가 아닙니다.”
“내 말이 틀렸다는 것이냐?”
“그녀는 성녀입니다.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그녀는 타락했다. 기어코 악의 씨앗이 심어졌지. 자, 최후의 팔라딘아. 악의 씨앗을 제거하거라.”
“…그렇군요. 깨달았습니다.”
나는 오른손으로 집행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왼손이 번개처럼 움직여 여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어어억?!”
“여신이시여, 어찌하여 타락하셨나이까.”
여신이 버둥거린다. 양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륵고, 새하얀 날개가 퍼덕거린다.
“타락했으면.”
푸욱.
집행검이 여신의 바닥에 갈렸다. 여신의 피가 내 몸에 튀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지금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동시에 신앙을 증명하고 있다.
“죽어야지.”
목을 부러뜨리고 검을 아래로 내리긋는다. 여신의 피와 내장이 쏟아졌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여신의 비명이 귓가를 때렸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양손에 검을 쥐고 있었고, 아래에는 대악마 블레아트가 검에 꽂힌 채 쓰러져 있었다.
상황 파악은 순식간에 끝났다.
“개수작을 부렸군, 블레아트…!”
“끅…. 미친 새끼…. 설마 자기가 믿는 여신을 타락했다고 판단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죽여버릴 줄이야…. 심지어 타락했는지 확실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블레아트의 어깨를 밟았다. 검이 움직이며 그녀의 배를 가른다.
“…여신보다 더 중요한 신앙이라…. 망할. 어디서 이런 미친 새끼가 튀어나와서는…!”
키이이이잉.
성안이 자동으로 발동한다.
블레아트의 영혼이 급격히 압축되는 게 눈에 보였다.
자폭.
블레아트의 마지막 발악이다.
“신성검.”
황금으로 빛나는 검이 떨어져 블레아트의 영혼을 갈랐다. 블레아트의 영혼은 힘을 잃고 내 몸에 달라붙었다.
비로소 모든 대악마를 처단했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었다. 대악마의 영혼은 소멸하지 않았으니까.
“…….”
해결해야 할 문제는 남아 있었다.
***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사람들이 함성을 지른다. 그 활기찬 함성은 교황청의 성소까지 들려왔다.
대악마 블레아트를 처단한 지 반년.
나는 세계 각지에 숨어든 악마를 처단한다는 이유로 대악마의 영혼을 멸하는 멸악 의식을 최대한 미뤘다.
실제로는 지난 반년 동안 멸악 의식을 치르지 않고 대악마의 영혼을 소멸시킬 방법을 찾았다.
없었다. 고서를 뒤져도, 비밀스러운 고대 유적을 찾아도, 오랫동안 살아온 악마를 붙잡아 고문해도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팔라딘이시여,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표정을 푸시고 웃으시지요.”
“…글쎄. 아무리 생각해봐도 웃음이 안 나오는군.”
아멜리아가 성스러운 연못에서 걸어 나왔다. 성수로 몸을 깨끗이 씻은 그녀는 하얀 천으로 몸을 닦고, 하얀 사제복을 입었다.
그녀는 대악마의 영혼들과 함께 죽는다.
십자가에 매달려 불타서 죽을 것이다.
수 만명의 사람들은 그녀의 고결한 희생을 환호할 것이다.
“불에 타 죽는 거다. 두렵지 않나?”
“두렵습니다. 하지만 이건 저의 의무입니다.”
“…여신께서 희생의 대가를 치렀다고 했지? 그게 무엇이지?”
“가족들이 역병에 걸렸었습니다. 저는 여신님께 가족들을 구원해달라고 부탁하였고, 여신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그게 전부인가? 그 가족들은 어떻게 됐지?”
“악마에게 잡아 먹혔습니다.”
“…….”
성녀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했으나, 목소리에 담긴 슬픔을 온전히 지우지 못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팔라딘이시여. 저와 이 세상은 팔라딘께 구원받은 것입니다. 저는 약속대로 팔라딘의 죄와 대악마의 영혼들을 짊어지고 떠나겠나이다.”
그녀가 성소 밖으로 걸어 나간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녀를 끌어당겼다. 성녀의 몸의 떨림은 더 강해졌다. 내 품에 안긴 그녀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뺨에서 눈물이 흐른다.
“팔라딘이시여,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의식은 제시간에 진행되어야….”
“내 의무를 빼앗지 마라.”
“…네?”
“악마를 죽이는 건 내 일이다. 그리고 내 죄는 내가 짊어진다.”
신성력이 움직였다.
지금 시점에서 내 신성력은 성녀의 막대한 신성력을 가볍게 압도했다. 그녀의 등에 새겨진 봉인이 깨진다. 대악마의 영혼 4개가 풀어졌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내 몸에 달라붙었다. 대악마를 죽인 건 나다. 대악마의 영혼들이 마땅히 저주해야 할 대상은 나인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견디지 못했겠지만, 성녀 이상의 신성력을 가진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대악마의 영혼이 10개라도 거뜬하다.
“팔라딘이시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멜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기뻐하지 않고 나를 꾸짖을 테지. 그리고 기어코 자신을 희생하려 하겠지. 아멜리아가 어떻게 나올지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너무 예상대로라서 웃음이 나왔다.
아멜리아가 살아갈 동기를 부여 해야했다. 그리고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성녀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네가 죽으면, 뱃속의 우리 아이도 죽는다. 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희생시킬 생각이었나?”
“네…? 그, 그럴 리가. 저는 여신께 모든 걸 바쳤습니다. 여신께서 허락하실 리가….”
“그렇게 해댔는데 임신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지.”
성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와 그녀는 틈만 나면 섹스를 했다. 악마도 거의 멸절한 상태라 여유 시간이 제법 많았다.
“음. 못 믿는 눈치군? 확인해 봐라.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녀가 신성력을 사용해 자신의 몸상태를 철저하게 확인했다. 그녀의 입이 경악과 당혹으로 일그러진다.
“아멜리아. 너는 살아라. 살아서 아이를 길러라. 훌륭한 어머니가 되었으면 좋겠군. 그래. 기왕이면 성모라 불릴 정도로.”
“이건… 이건… 너무 하시는군요. 저의 마지막 의무를 이렇게 빼앗아 가십니까?”
그녀의 눈물이 끊임없이 흐른다. 나는 그녀의 뺨을 잡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나 그녀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잠깐 그녀를 보다가 입을 맞췄다. 그제야 성녀의 눈물이 멈췄다.
“원망스럽나?”
“…슬플 뿐입니다. 제가 팔라딘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네가 날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하나다.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이기도 하지. 살아라. 그거면 됐다.”
그녀는 내 가슴에 기대어 울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후에 그녀를 떨쳐내고 성소 밖으로 나갔다. 교황청의 복도를 걷는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뒤를 돌아본다면 나는 아마도 아멜리아가 슬퍼할 만한 선택을 또 하게 되겠지.
다른 걸 생각하기로 했다.
멸악 의식.
성녀가 아닌 내가 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나는 성녀처럼 희생양으로 정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겐 믿는 구석은 있었다.
‘상태창.’
[이름: 유진
출신: 성기사
레벨: 99
힘: 121 민첩: 92 체력: 97 신성력: 150
보유 스킬: 성안(Lv. Ultimate), 홀리 오라(Lv. Ultimate), 신성검(Lv. Ultimate), 질주(Lv. Master), 홀리 라이트(Lv. Master), 신성 강화(Lv. Master) 부활(Lv. Master), 강림(Lv. Master), 세크리파이스(Lv. Ultimate), 완전한 육체(Lv. Master), 여명의 날개(Lv. Master). 성화(Lv. Master), 빛의 속박(Lv.Master)]
세크리파이스.
기적을 일으키는 스킬.
나는 대악마 블레아트를 죽이고 얻은 심장으로 세크리파이스를 강화했다. 내가 기대를 거는 건 오직 이 스킬이었다.
실패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교황청에서 벗어났다. 눈 부신 태양이 나를 반겼다. 교황청 입구에는 광장으로 향하는 길이 이어져 있었다. 나는 길을 걸었다. 아멜리아는 성소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 최대한 의연하게 걸었다.
길의 주위를 지키고 있는 사제와 성기사들이 당황했다.
“파, 팔라딘이시여?”
“어째서 이곳에…?!”
“당황하지 마라. 그리고 그녀를 부탁한다.”
환호하던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환호하는 군중들을 보면 좀 짜증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오늘은 희생의 날이지만, 악마들이 멸절하는 경사스러운 날이었으니까.
“여신이시여, 이 몸을 바치나이다.”
세크리파이스를 사용했다.
몸이 터지는 격통과 함께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황금색의 빛은 길이 되어 십자가로 나를 인도했다.
“악멸은 실현되었고, 내 의무는 이것으로 끝나니… 부디,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가호하소서.”
나는 헤리안느 여신이 염치가 있는 여신이라고 믿는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아멜리아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세크리파이스.
[완전 회복을 사용합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나와 아멜리아 사이로 이어져 있던 무언가가 끊어졌음을 느꼈다.
나는 땔감이 잔뜩 쌓인 의식대 위로 올라갔다. 십자가에 등을 기댄다.
파지직.
전류에 불이 붙었다. 땔감이 순식간에 활활 타오른다.
세크리파이스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건 멸악의 의식을 망치는 일이었으니까. 괜히 편히 죽겠다고 세크리파이스를 썼다가 대악마의 영혼이 풀려나면 곤란하다.
시뻘겋던 불꽃은 어느 순간 황금빛으로 변하여 내 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마아아아앙아아안!
-살려줘어어어어어어!
대악마들이 비명을 지른다. 나는 그것들의 비명을 원동력으로 고통을 참았다. 죽어가는 와중에 교황청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아멜리아가 보였다. 손을 꼭 모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여신이시여. 그녀를 축복하소서.”
내 중얼거림에 화답하듯, 하늘에서 빛이 떨어졌다. 빛은 나를 감쌌다.
나는 고통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