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5화 > 1505. 광명승천도
천마신교의 영역에 있는 내유시(內硫市)에 오봉과 함께 왔다.
영역내에 있다고 하더라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나와 오봉은 일주일 동안 이동한 끝에 내유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땅덩어리가 더럽게 넓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천마신교의 영역은 대한민국보다 최소 3배 이상은 클 것이다.
남자 새끼랑 둘이서 여행하게 됐다. 솔직히 도망치고 싶었다.
‘자동 진행이 없었다면 도망쳤을 거다.’
저 멀리 내유시가 보인다. 제법 발전한 도시였다. 인구수로 따지면 못 해도 몇만은 될 것 같다. 도시가 보인다고 해서 바로 도착하는 건 아니었다. 내 시력이 워낙 좋아서 도시가 보이는 거다. 실제로는 상당히 떨어져 있다.
나는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오봉에게 물었다.
“조장님. 임무에 대해 다시 한번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왜? 그새 잊어먹었냐? 오면서 말해줬잖아.”
자동 진행으로 확 넘긴 터라 알지 못했다.
“확인차 듣고 싶습니다. 따로 걸리는 것도 있습니다.”
“흠? 그래? 심심하기도 하니 말해줄게. 도착하려면 반 시진은 남았고. 내유시는 빙악문(氷鍔門)이 자리 잡은 곳이다. 빙악문이 내유시의 치안과 행정을 도맡아 하고 있지. 빙악문의 저력은 그저 그렇지만… 신교에 순종적이다. 지난 몇백 년 동안 문제 한 번 일으키지 않았지.”
“평화로운 곳이군요.”
“그렇지. 신교의 영역에 있어서 외침을 받을 걱정도 없고, 딱히 특출난 것도 없어서 신교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곳이니까. 그런데 보름 전에 그 평화로운 내유시에서 변이 일어났지.”
변. 좋지 않은 일.
오봉은 무덤덤하게 내유시에서 일어난 참사를 입에 담았다.
“내유시 외곽에서 훈련하던 빙악문의 전투부대가 몰살당하고, 그 근처에 살던 신민들도 모두 죽었지.”
“습격입니까?”
“몰라. 빙악문의 보고에 따르면 시체 일부가 사라졌다더군. 이상하게도 무기나 갑옷은 남긴 채로 말이야.”
“돈도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짓이 아닐 수도 있군요.”
이 세계는 요괴와 영물이 있었다. 둘 다 모두 평범한 인간은 상대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인간에게 호의적이지도 않다. 평범한 인간이 요괴와 영물과 마주치면 죽는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런 일의 경우 성격이 포악한 요괴의 짓거리일 확률이 높았다.
“확신할 수는 없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건을 조사하고 흉수를 찾는 일이야.”
“흉수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대주에게 한 소리 듣겠지.”
오봉이 귀를 후비며 말했다.
천마신교는 이 일을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외부의 침략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요괴의 짓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적멸대를 파견한 건… 보여주기식인가? 빙악문에게 말하는 거지. 너희를 위해 적멸대를 파견했다고.’
적멸대.
천마신교에서 손꼽히는 악명이 자자한 부대. 그런 부대에서 사람을 파견했다는 것만으로도 신교는 체면을 차릴 수 있다.
‘적멸대의 평균 경지는 오기(五氣). 오기면 중형 문파의 문주급이다.’
오기는 이 세상 어딜 가나 대접받을 수 있는 경지다. 강호에서는 경지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대협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생각보다 시시한 임무지.”
“…….”
“낄낄. 구석아, 너무 심각한 얼굴 하지 마라. 이런 임무를 즐기는 방법을 친히 가르쳐 줄 테니까.”
도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봉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에서 사악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 미소의 의미를 도시 입구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
적멸대를 뜻하는 흑적의를 입고 도시 입구를 당당하게 걸어간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인파가 쫙 갈라지며 길이 열렸다. 오봉은 당연하다는 듯이 갈라진 인파 사이를 당당하게 걸었다.
입구를 지키는 빙악문의 무인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절도있게 포권하며 고개를 숙인다.
“빙악문의 해수직이 신교의 적멸대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봉이 걸음이 멈췄다. 오봉은 포권하지 않았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무인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침묵의 시간이 이어질수록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군.”
오봉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접을 이따위로 하나? 빙악문, 이거…. 좋게 보고 있었는데… 안 되겠군.”
“…저희가 무식하여 어떤 실례를 범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신다면 실수를 바로 잡겠습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주십시오.”
빙악문의 무인이 저자세로 나섰다. 지나칠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단순히 적멸대의 악명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오봉은 보이지 않는 기운을 이용해 무인을 압박하고 있었다.
“무식한 새끼.”
오봉이 욕을 뱉었다.
“…….”
무인은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내리깔았다.
적멸대. 오기경에 오른 강자. 강자존.
“우리 적멸대가 신교의 임무를 받아 빙악문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런데 너희는 우릴 전혀 환영하지 않았지. 꽃길 정도는 바라지도 않는다. 인파를 통제하지 못한 것도… 뭐,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너희들 따위가 우리를 맞이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문주는 힘들어도 장로나 소문주가 우리를 맞이해야 하는 게 강호의 법도 상 맞지 않냐?”
무인의 입장에선 억울할 것이다.
여긴 빙악문의 입구가 아니다. 빙악문이 있는 내유시의 입구였다. 문파의 소문주나 장로가 문파 입구도 아니고, 도시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게 말이 되는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허나 무인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당장 본문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본문에서 대협들을 만족스럽게 마중할 테니 이만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한 식경 주지. 우리에게 걸맞은 자를 데려와라.”
“…감사합니다. 대협.”
무인들이 움직였다.
오봉이 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봤냐?”
씩 웃는 꼬라지를 보니 별로 화나지도 않았으면서 일부러 갑질을 한 게 확실했다.
“…네. 잘 봤습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막내야. 우린 적멸대다. 신교의 전투부대지. 우린 대접 받을 권리가 있다.”
“오오.”
나는 감탄했다.
적멸대는 여러 가지로 유명했다.
대표적으로는 전투력이었다. 적멸대가 나서면 어지간한 중소문파는 하루 만에 멸문시킬 수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 소문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유명한 것은 적멸대의 악행이었다. 적멸대는 그 뛰어난 무력만큼이나 악행도 많이 벌였다. 적멸대의 잔혹함과 악독함은 신교내에서 둘째가라 서럽다.
“우리는 마귀(魔鬼)다. 그리고 마귀는 마귀다워야 해. 너도 약자의 눈치는 보지 마라. 웬만한 일은 적멸대가 해결해줄 거다. 뭐, 그렇다고 너무 선을 넘진 말고. 적멸대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일도 있으니까.”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 빙악문의 소문주가 나타났다. 경공을 발휘해 달려온 것이다.
“빙악문의 소문주인 빙선옥이 적멸대의 대협들을 뵙습니다!”
중년으로 보이는 소문주가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인다.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 자가 나왔군. 빙악문으로 먼저 가기 전에… 여기 유명한 기루가 있다지? 그곳에서 목을 축이고 싶군. 소문주, 안내 부탁하지.”
“맡겨만 주십시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기루에 갔다. 비싸고 화려한 요리와 술들이 차례차례 식탁 위로 올라온다. 오봉은 술을 마시며 기녀를 품에 끼고 낄낄 웃었다.
나도 기녀를 끼면서 술을 마셨다.
“막내야! 어떠냐! 좋지 않냐!”
“네. 좋습니다.”
“숙맥인 줄 알았더니 여자도 만질 줄 아는구나. 그런데 음식은 왜 안 먹냐?”
“제 입맛이 아닙니다.”
나는 기녀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욕망을 억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오봉이 안고 있는 기녀도 빼앗아 침대로 가고 싶었다.
오봉은 기녀가 따라주는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오봉은 기녀보다 술에 더 관심이 많았다. 여자는 한순간이지만, 술은 영원하다가 오봉의 신조였다.
‘젠장. 오봉 때문에 침대로 갈 수도 없고….’
무엇보다 아직 날도 저물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나와 오봉은 일하는 도중에 기루에 들려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딸꾹! 으으…. 기분 좋구만…. 막내야! 일어나라! 일하러 가야지!”
오봉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봉 정도의 실력자라면 취기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몰아낼 수 있으나, 오봉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취한 상태로 빙악문으로 들어갔다.
빙악문 문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객실을 준비해두었습니다. 그곳에서 쉬시지요.”
“문주. 우리는 쉬러 온 게 아니오. 사건을 조사하고 싶소. 시신은 정리했소?”
방금까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쉬며 즐겼던 오봉이 딸꾹질을 하며 문주에게 말했다. 그래도 문주라고 하오체를 썼다.
“술법사를 시켜 시신을 보관해두었습니다.”
“지금 바로 보겠소. 그 후에는 사건 현장을 둘러봐야겠군.”
오봉은 자기 집을 거니는 것처럼 거침없이 움직였다.
시체 보관소에 도착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창고였다. 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오봉은 죽은 자에 대한 배려도 없이 관을 열어 시체를 확인했다.
“막내야.”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술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시체들을 봐라. 어떻게 생각하냐?”
관 속에 안치된 시체들을 확인한다.
“절단면이 깔끔하군요. 제법 괜찮은 실력입니다.”
“무슨 무기로 자른 것 같냐?”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말했다.
절단면만 보고 검이니, 창이니, 칼이니 무기를 유추하는 재주 따윈 내게 없었다. 별 관심도 없었다.
“이건 무기가 아닐 확률이 크다.”
“절단면만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아니. 시체의 상태를 보고 유추하는 거지. 이 시체는 왼팔과 하반신이 잘려있어. 근데 칼이나 검을 쓰면 이런 식으로 베지 않아. 일부러 그렇게 베지 않는 이상은.”
“일부러 그렇게 베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사건 현장에서 수십 명이 동시에 죽었다. 사람을 한 명, 한 명을 정성껏 벨 시간은 없었을 테지.”
“…적이 한 명이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내 목소리에는 귀찮음이 담겨 있었다. 이 일에는 여전히 관심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소란은 더 일어났겠지. 내 생각에는 한 명의 강자가 나타나 이들을 도륙한 걸로 보이는군. 그는 술법사이거나, 요괴일 확률이 가능성이 크다. 문주, 사건 현장으로 가야 하니 안내하시오.”
“…소문주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아니, 문주가 직접 안내하시오. 설마 우리 따위는 안내하고 싶지 않다는 거요?”
“결코 아닙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빙악문주가 서둘러 말했다.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오봉을 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