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6화 > 1506. 광명승천도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지면의 피 얼룩을 제외하면 현장은 깨끗했다.
오봉은 현장을 한 번 둘러보고는 내력을 움직여 취기를 몰아냈다. 그리고 진지한 눈으로 현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시작은 저기서부터군.”
오봉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의 말에 대꾸한 문주였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피의 방향이 저기서부터 시작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다만, 그 이후로는….”
시작은 알겠으나, 끝 지점은 알 수 없었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기 때문이다. 피 얼룩의 모양만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측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현실의 과학 수사 기술이 있었다면 모를까. 이 세계에는 그런 게 없었다.
“흐음. 막내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문주 말대로 시작은 알아도 이후로는 잘 모르겠군요. 근데 이게 종요합니까?”
“중요하지. 이렇게 진한 흔적이 남아 있으니까. 일단 상대는 술법사는 아니다. 술법사였다면 어느 정도 정리를 했을 것이다. 이렇게 대량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흔적이라… 전 잘 모르겠습니다. 피 얼룩의 형태로 뭘 알 수 있는 겁니까?”
“피 얼룩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피 얼룩 그 자체지. 막내야,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알겠냐?”
“…….”
모르겠다고 답하기 전에 생각하는 척을 했다. 그래야 성의가 있어 보이니까. 오봉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정답은 술법이다. 웬만한 일은 술법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지!”
“…오봉 님은 술법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술법사가 아니어도 술법은 이용할 수 있다. 봐라.”
오봉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하얀 종이에 검은색 먹물이 그려진 부적이었다. 신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우웅.
공기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직후, 오봉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빙악문주를 주시해라. 일이 벌어지면 바로 문주의 목을 쳐라.
전음이 들렸다. 나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빙악문주는 부적을 보며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대협. 그건 무슨 무적입니까? 술법 중에는 땅의 기억을 보는 술법도 있다고 하던데… 혹시 그것입니까?”
“그런 고위 술법은 부적에 담기 무척 힘드오. 이 부적에는 혈추록(血追錄)이라는 술법이 담겨 있소.”
“혈추록? 피를 쫓는 술법입니까?”
“혈겁을 일으킨 당사자를 쫓는 술법이오. 술법가는 원혼이 어쩌고 설명했지만…. 단순히 말하면 혈겁이 일어난 장소에서 사용했을 때 학살자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술법이오.”
“그런 술법도 있었군요.”
“이 세상에는 신비한 술법들이 아주 많소.”
술법사도 아닌 오봉이 뻗대면서 부적을 허공에 던졌다. 부적이 타오르더니 하얀빛을 뿜어댔다. 빛은 도시 안쪽으로 뻗어나가더니 사라졌다.
오봉은 빛을 보며 혀를 찼다.
“…쯧. 범인은 도시 내에 있는 모양이오. 요괴가 범인이라 생각했는데… 인간의 짓일 가능성이 있겠군.”
나는 몸에서 힘을 풀었다. 오봉은 문주가 범인이라 예측하여 내게 전음을 날렸었다. 빙악문주를 굳이 이곳에 데려온 이유도 빠르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이리라. 허나 빙악문주는 범인이 아니었다.
“빛을 보니 대략적인 방향을 알려주는 거로군요. 가까이에 범인이 있었다면 다르게 반응했겠지요. …혹시 대협께선 저를 의심하셨습니까?”
빙악문주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봉은 어떠한 죄책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에 의한 합리적인 추론이었소.”
“경험에 의한…? 대협께서 이런 일을 저지른 적 있으시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 이런 비슷한 임무를 수행한 적이 많다는 뜻이오.”
오봉의 말투에는 귀찮음이 뚝뚝 묻어 나왔다. 빙악문주는 해명을 원하는 눈빛으로 오봉을 노려봤다. 오봉은 한숨과 함께 설명했다.
“오기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벽에 가로막히게 되오. 꾸준한 수련으로 벽을 타파할 수 있으면 좋지만… 인간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소. 그렇게 조바심을 느낀 무인들은 다른 방법을 찾기 마련이지. 특히 마인의 경우 강해지는 방법이 다 거기서 거기오.”
“제가 그깟 벽을 넘지 못해 부하들을 죽일 것 같습니까? 대협께선 저를 잘못 보셨습니다!”
“마인이 고귀한 척하지 마시오. 나는 힘을 얻기 위해 자기 가족을 잡아먹는 자도 봤소. 빙악문주. 좋게 넘어가시오. 문주는 범인이 아니란 게 증명되지 않았소.”
빙악문주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곧 몸에 힘을 풀었다.
“…범인을 찾는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도시에 있다는 것 말고는 다른 단서는 없습니까?”
“없소. 우선 도시를 봉쇄하시오. 그리고 한 명, 한 명 조사하시오.”
“대협들은….”
“우린 좀 쉬겠소. 신교에서 달려오느라 쌓인 여독을 풀어야지. 뭐, 불만 있소?”
“…아닙니다. 편히 쉴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봉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우린 아까 그 기루에나 가자. 거기 술맛이 좋더라.”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물었다.
“정말 이래도 됩니까?”
“되고말고. 빙악문주는 자기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니 직접 처리하고 싶을 거다. 체면이란 게 있으니까. 우린 나중에 숟가락만 잘 얹으면 되고.”
우리는 기루에 들어가 흥청망청 놀기 시작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열흘이 지났다. 도시 봉쇄 조치가 열흘 동안 이어진 것이다. 시민들은 짜증과 분노를 느꼈으나, 차마 빙악문에 대들지 못했다.
그리고 빙악문주가 죽었다.
그의 집무실 앞에 빙악문주의 목이 걸려 있었다. 빙악문주의 몸통은 보이지 않았다. 문주의 부하들도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간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와 오봉은 기루에 있었기에 참극에 개입하지도 못했다.
“소문주가 보이지 않는다. 재물을 챙기고 도망쳤나? 소문주가 범인이었군.”
“오봉 님. 예상하고 있었습니까?”
“혈겁의 첫 피해자는 빙악문의 전투 부대였다. 훈련을 진행 중이었다지? 훈련 정보는 문파의 기밀 정보다. 그 정보를 알고 전투 부대를 상대했다면… 빙악문 내부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크지. 그래서 문주를 의심한 거기도 하고…. 설마 그 약해 빠진 소문주가 내 기감을 속일 정도로 능숙하게 힘을 감추고 있을 줄은 몰랐다만.”
“추적해야 하지 않습니까?”
“해야지. 근처에 있을 거다. 따라와라.”
“근처에 말입니까? 저라면 헐레벌떡 도망쳤을 겁니다만.”
“문주와 무인들의 시체를 봐라. 시체 일부가 없지 않나. 시체를 가져갔다는 소리다. 사람의 신체를 이용한 마공을 익힌다는 뜻이다. 아마 식인 계열 마공이겠지. 그쪽 계열 마공은 시체의 신선도가 중요하다. 아마 지금쯤 얻은 힘을 소화하느라 바쁠 테지.”
우봉은 품에서 여러 도구를 꺼냈다. 어디다 쓰는지 모를 도구들로 주위를 세심하게 둘러봤다.
“흔적을 찾았다. 이쪽이다.”
우봉의 뒤를 따라갔다. 나는 솔직히 아직 돌아가는 판을 잘 모르겠다. 다만, 한가지 알 수 있는 건 우봉이 이 일에 매우 익숙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도시 외곽에 있는 허름한 민가를 찾았다. 우봉은 허리춤에 걸린 4자루의 도끼를 매만지며 말했다.
“빙악문주를 죽인 놈이다. 방심하지 마라.”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아니. 이럴 땐 멀리서 공격하는 게 최선이다.”
그의 손이 눈 깜짝할 사이에 움직였다. 4자루의 도끼가 회전하며 민가와 부딪쳤다.
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민가가 무너진다.
무너진 민가에서 소문주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피부는 검게 변하고, 어깨에는 굵은 가시가 툭 튀어나왔다. 눈동자는 황금색의 파충류 같았고, 앞으로 튀어나온 주둥이에선 보라색 액체가 뚝뚝 흐른다.
“저거 요괴 아닙니까?”
“마공에 먹혔군. 막내야, 협공이다.”
허리춤에서 칼을 뽑으며 질주했다. 발도와 동시에 소문주를 향해 검기가 날아간다. 소문주는 팔을 세워 검기를 막았다. 팔에 혈선이 그어지며 피가 튀었다. 그러나 겉보기 보다 얕은 상처는 3초 만에 회복되었다.
휘휘휘휘휘휙!
4개의 도끼가 날아와 놈의 등을 때렸다. 놈의 몸이 한순간 흔들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코앞으로 접근했다.
“카아아아아악!”
요괴가 된 소문주에게선 이성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칼날을 타고 푸른색의 기운이 흐른다. 기운은 순식간에 압축되어 칼날을 코팅했다. 별처럼 은은히 빛나는 강기(?氣)였다.
참귀도법(斬鬼刀法) 악참(惡斬).
사선으로 휘둘러진 참격이 놈의 검은색 몸을 가른다. 붉은색 피가 튀었다. 나는 마무리를 위해 놈의 목에 칼끝을 찔렀다. 놈이 오른손으로 칼을 잡아 역으로 휘둘렀다. 나는 미련스럽게 버티는 대신 칼자루를 놓고 물러났다. 회전하는 4개의 도끼가 다시 놈의 뒤를 노렸다.
콰콰콰콰쾅!
폭음이 울렸다. 4개의 도끼는 계속해서 놈을 공격했다. 나는 힐끗 오봉을 쳐다봤다. 오봉은 두 눈을 부릅뜨고 도끼를 조작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염구석! 떨어져라!”
바로 떨어졌다.
오봉은 품에서 부적을 꺼내 허공에 흩뿌렸다. 20장이 넘는 부적들은 요괴의 몸에 달라붙었다. 부적에서 나온 황금빛 기운이 요괴의 몸에 스며들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요괴가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하하! 소림사 특제 항마부 맛이 어떠냐! 이 요괴놈아!”
쿵!
요괴의 무릎이 쓰러졌다. 요괴의 상체도 아래로 내려간다.
항마부의 효과는 지나칠 정도는 좋았다.
“운이 좋네. 이제 막 요괴로 변한 놈이라 쉽게 제압할 수 있었어.”
“소림사의 항마부는 왜 가지고 다니시는 겁니까?”
“요괴놈들을 상대하는데 항마부가 최고의 가성비를 잘아하거든. 뭐, 이런 일이 제법 많고 말이야.”
오봉이 요괴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도끼 두 자루를 각각 한 손에 쥐고 높이 치켜들었다. 도끼날에 강기가 서렸다.
콱콱콱!
그는 요괴의 머리를 계속 내려쳤다. 30번 정도 내려치니 요괴가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끈질긴 놈! 항마부가 없었으면 꽤 고생했겠어.”
“끝난 겁니까?”
“잠깐만 기다려 봐.”
오봉은 요괴의 옷을 뒤졌다. 다 찢어진 옷이었지만, 그 품속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비책이었다. 사악한 기운이 흐르는 책.
“역시 있군. 역마신공(易魔神功). 이번 일도 묵지련(墨地聯)의 소행이다.”
묵지련(墨地聯).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내가 알기로 묵지련은 천마신교 외의 음지에서 활동하는 세력이었다.
그것도 온갖 불법적인 일을 하는 조직. 나는 이 조직 뒤에 빙의 천마, 즉, 천유운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묵지련이 확실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