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7화 > 1507. 광명승천도
“묵지련이 확실합니까?”
오봉은 내 질문에 꽤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묵지련은 알고 있냐?”
“질이 좋지 않은 범죄 조직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마외도 그 자체인 조직이긴 하지.”
“그리고 묵지련의 활동 구역은 이곳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몇 년 전부터 활동 영역을 이곳으로 넓혔어. 덕분에 아주 골치야. 보아하니 자세히는 모르는 모양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물음에 긍정했다.
이 세계의 원작 중 하나 ‘깨어나 보니 천마가 되어 있었다.’에도 묵지련이 나온다. 소천마로서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천유운의 눈과 귀, 손과 발이 되는 조직이 묵지련이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묵지련은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요괴들의 집단도 아니다.
‘배경이 달라지면서 묵지련의 성질도 달라졌다. 신중한 천유운의 성격상 이렇게 묵지련을 활용할 리 없어.’
묵지련과는 이전에 마주친 적 있다. 만무탑으로 갈 때였다. 그때도 요괴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 세계에선 묵지련을 창설한 게 천유운이 아닐 수도 있겠군.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의 천유운은 묵지련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오봉에게 묵지련에 관해 적극적으로 질문을 했다.
“이제 까지와는 달리 적극적이군. 묵지련에 원한이라도 있냐?”
“좋지 않은 일로 엮이긴 했습니다.”
묵지련은 천유운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묵지련이란 줄을 타고 올라 가다보면 결국은 천유운이 나온다. 천유운이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숨겼다고 하더라도 흔적이 아예 없을 수 없다. 묵지련과 천유운의 관계만 증명된다면, 천유운의 입지가 흔들릴 것이다.
‘이대로 있으면 천유운은 무난히 교주 자리에 오른다. 천유운의 천마신공을 얻으려면 그건 막아야지.’
가만히 있는다고 기회는 오지 않는다. 천마신공을 얻으려면 뭐든 해야 했다.
“최근 묵지련은 요괴의 힘에 집중하고 있다. 이 역마신공(易魔神功)이 바로 그 증거지.”
“요괴로 변하는 마공이라니…. 그게 무공이긴 합니까?”
“마공인데 뭐가 불가능하겠어? 뭐, 이게 무공이 아니란 것에는 나도 동의해. 알아본 바로는 절반은 술법에 가깝다더군. 그것도 아주 고위의 술법.”
오봉은 역마신공이 적힌 비책을 쥐고 허공에 탁탁 흔들었다.
“그 역마신공. 제가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너 정도면 역마신공의 영향을 받지 않겠지. 잠깐 훑어보기만 해. 신교에 제출해야 하니까.”
오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역마신공을 줬다.
나는 역마신공을 훑어봤다. 꽤 세세하게 구결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도중부터는 식인을 하며 무공을 수련하라는 말도 적혀 있다.
“마공 중의 마공이군요. 따라할 엄두도 안 납니다.”
“그건 네가 급하지 않아서 그런 거지. 벽에 가로막히고, 수명도 얼마 남지 않은 놈들, 힘을 갈구하는 놈들은 주저하지 않고 역마신공을 익힐 거다.”
벽이란 말에 약간이지만 역마신공을 익히는 놈들이 이해됐다.
나도 현재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염구석이 아닌 진짜 나의 경지는 현재 오기(五氣) 10단이다. 오기의 끝이다. 벽만 넘으면 삼정(三頂)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런데 그 벽을 넘는 게 영 쉽지 않았다.
‘이 세계에선 벽을 넘지 못하고 몇 십년 동안 제자리에서 머물다가 죽는 일은 흔하다.’
일반인보다 수명이 길어도 결국 끝이 있었다. 그렇기에 조바심을 느끼며 마공에까지 손을 뻗는 것이다.
‘내겐 광명승천도랑 천강성 시스템도 있으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지.’
역마신공을 덮고 오봉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임무가 끝났으니 귀환해야지. 그냥 가기 아쉬우니 좀 놀다가 갈까?”
“묵지련을 추적하진 않습니까?”
“단서가 없잖아. 신교의 명령도 없고 말이야. 우리 임무는 여기까지야. 오늘 일이 있었으니 다음 임무는 묵지련을 추적하는 임무가 되지 않을까 싶긴 한데…. 뭐, 넌 처음이니 비교적 간단한 임무부터 수행하게 될 거다.”
“저 혼자 수행합니까?”
“적멸대는 기본적으로 혼자서 수행하니까. 우리 짬에 몰려다니는 건 말도 안 되지.”
그의 말이 맞긴 했다.
적멸대의 평균 수준은 오기 이상이다. 강호에서도 대접받는 강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자존심도 강하다. 거기에 그런 자들이 뭉쳐서 행동하면 시간과 능력을 낭비하는 꼴이다.
“급할 거 없어. 천천히 놀다가 귀환하자고.”
그는 요괴의 시체를 갈무리했다. 오기 급에 이른 요괴의 시체였다. 그 자체만으로 돈이 된다.
요괴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부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소림사의 항마부라 했던가?
“오봉 님. 항마부는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흑점(黑店). 거기엔 뭐든 팔거든.”
***
“하아.”
낙월산의 정상에 위치한 거처. 미령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허망함이 담긴 눈으로 낙월산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한숨 소리에 나까지 답답해지는구나. 무슨 일이냐?”
미령의 옆에는 낙월신녀 위유가 썬베드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조막만 한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상태로 하얀 살결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느긋한 태도에서 여유로움이 흘러나왔다.
썬베드의 옆에는 칵테일이 올려져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오두막에서 녹차를 마시던 위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칵테일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낙월신녀는 세속에 찌들었다. 아니, 현실 문명에 굴복했다.
“뭔가… 시간을 허비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래도 되는 걸까 싶어서요.”
낙월신녀 위유는 미령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미령 또한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고운 피부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방금까지 미령은 수영장에서 개헤엄을 치고 있었다.
“이년이 또 지랄병이 도졌군.”
“네?”
“…이런. 말이 헛나왔구나.”
“잠깐만요. 지랄병이라니요! 너무한 거 아니에요?!”
“말이 헛나왔대도. 고민이 있으면 말해보거라. 심심하니 들어주마.”
“아,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할 말이 없으면 저녁밥이나 준비하거라.”
위유는 허리를 비틀며 자세를 바꿨다. 다리를 꼬고 양손은 머리 뒤로 올렸다. 매끈한 겨드랑이가 태양을 향해 드러났다. 다소 민망한 자세였지만, 어차피 보는 눈이라곤 한정되어 있었다.
햇볕은 매서운 기세로 위유의 새하얀 피부를 쏘았다. 허나, 그녀의 피부는 햇볕 따위에 지지 않았다.
미령은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계속 이러고 있어도 될까요? 서방님은 벌써 삼정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전 계속 제자리걸음이잖아요. 이러다가 서방님에게…. 이 세상에서 도태되는 게 아닐까요?”
위유는 생각했다. 미령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방에 틀어박힌다. 게임, 드라마, 만화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방 밖에 나와 시간을 보냈다.
‘게임을 죄다 한 거군.’
모든 콘첸트를 소모하고 현자 타임을 느끼는 것이었다.
‘역시 지랄병이구나.’
게으른 여우는 말하는 와중에 술법을 이용해 발톱을 관리하고 있었다. 자기 미모를 관리하는 일에는 아주 철저했다.
위유는 미령의 말을 무시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미령은 잡일에 능했다. 특히 요리 실력이 뛰어났다. 여기서 함부로 대응했다간 저녁 식사가 초라해질 수 있었다. 위유는 미령에게 대충 어울려 주기로 했다.
“수련이 막힌 모양이구나.”
“…네에. 그렇죠. 무공 수련과 술법 수련은 다르니까요.”
무공 수련은 기본적으로 단순하다. 그저 무공을 반복해서 사용하면 그게 곧 수련이었다.
하지만 술법은 무공과 궤를 달리했다. 반복해서 술법을 사용한다? 그것도 술법의 수련이다. 하지만 경지에 이른 술법사에겐 단순한 술법 사용보다는 술법을 연구하는 쪽이 더 도움이 된다.
미령은 현대의 지식으로 재미를 봤다. 이 세계의 술법사와 달리 막혀 있던 사고가 트였다. 다른 시점으로 술법을 보며 연구했다. 덕분에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됐었다. 허나 요즘은 그것도 막혀 있었다.
“네게 필요한 게 뭔지 알겠다. 영감을 줄 새로운 술법이겠지. 차라리 산 밖으로 나가는 게 어떠냐?”
“하산하라고요?”
“세상으로 나가 식견을 넓히라는 소리다. 무인이 강호행을 택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출세. 다른 하나는 경지 상승을 위한 경험. 이 세상은 네게 좋은 자극이 될 거다.”
“…흐음. 글쎄요. 세상을 돌아다니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는데 말이죠. 재미도 없을 것 같고요.”
미령은 회의적이었다. 새로운 술법은 원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기준 이하였다. 땅덩어리는 더럽게 넓은 주제에 문명 수준까지 떨어졌다. 현대의 편리함과 재미를 맛본 그녀가 중세 시대를 돌아다녀봤자 재밌을 리가 없었다.
“그 녀석을 쫓아다녀 보는 게 어떠냐?”
“…서방님이요?”
“그 녀석은 질리지도 않고 세속을 돌아다니지 않느냐.”
“그야 서방님은 사건을 몰고 다니니까요.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역시 서방님뿐이겠죠. 아, 생각해 보니 서방님을 쫓아다니는 건 재밌을 것 같기도….”
미령의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위유는 마음속으로 그것도 잠깐이라고 생각했다. 미령은 잠깐 밖을 돌아다니다가 돌아올 것이다. 미령의 천성이 그러했다. 다른 세계의 말로는 집순이라고 한다지.
“넌 축지술법을 이용하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지 않느냐? 그 녀석에게 말해서 공간 이동 주문서인가 뭔가를 받는 방법도 있고.”
“그렇네요. 그래도 혼자 나가기엔 좀 그런데… 린과 설이랑 같이 갈까요?”
“안 된다.”
위유가 딱 잘라 말했다. 무척 단호했다.
“린이는 조만간 폐관 수련에 임할 거고, 설이는 하산하기엔 약하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다.”
“…으음.”
미령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위유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은 무엇이냐?”
“오늘 저녁이요? 아직 안 정했어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스테이크와 로제 파스타.”
“…저도 저지만, 위유 님도 위유 님이시네요.”
“나도 내가 채신머리가 없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내 입맛은 이미 변해 버렸다.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피식 웃은 미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짙어진 하늘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비키니에 감싸인 거대한 가슴이 출렁인다.
“아아아~! 이만 저녁 준비나 하러 가볼게요.”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미령을 보며 위유는 생각했다.
‘결정을 내린 모양이군.’
그녀는 낙월산 밖을 보며 씁쓸함을 느꼈다. 시원한 칵테일이 그녀의 씁쓸함을 달래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