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09화 > 1509. 광명승천도 (1,289/2,000)

< 1509화 > 1509. 광명승천도

“어우, 퐉스라뇨. 전 미령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답니다?”

미령이 간드러지게 웃으며 내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웃음은 요염함 그 자체였다. 그녀가 살짝 손을 흔들었다. 공간을 감싸는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결계를 친 것이다.

나는 이쪽으로 시선이 모이는 걸 느꼈다. 내가 지랄을 할 때보다 더 많은 시선이 모이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미령의 미모는 절세 미녀 그 자체였다. 게다가 삼정이라는 흔히 볼 수 없는 경지의 술법사. 뿜어지는 아우라부터가 남달랐다.

그리고 미령이 입고 있는 특이한 복장도 시선을 끄는데 한몫했다. 정확하게는 이 세계에서 특이한 복장이었다.

“한복은 왜 입고 있는 거야?”

검은색의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한복을 입고 있었다.

“으음. 구미호라서?”

“구미호 아니잖아.”

미령의 꼬리는 내가 알기로 4개에 불과했다.

“에이. 잘 어울리면 됐죠. 뭐가 문제예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잘 어울리니 문제없다.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녀는 원판 자체가 뛰어나니 어떤 옷을 입혀도 잘 어울릴 것이다.

“조선제일검 무적유진 님! 소첩이 술 한 잔 올리겠나이다~”

미령이 웃으며 죽엽청 술병을 잡았다. 볼이 빵빵해지고 입가가 실룩거린다. 나는 그녀에게 술잔을 내밀며 물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서방님이 도시에 들어왔을 때부터요? 술법으로 지켜보고 있었죠.”

그녀는 내가 이곳에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 이야기했으니 이상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녀가 날 도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의아할 뿐이다.

쪼르르륵.

술병이 기울어지며 술잔이 차올랐다. 술잔을 들자 황금빛이 도는 투명한 액체가 찰랑였다. 나는 강호 고수의 기품을 잃지 않으며 술을 마셨다.

“제가 왜 서방님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별로. 네가 하고 싶어서 한 거겠지.”

나는 딱히 미령을 어느 한 곳에 가둬둘 생각은 없었다. 그럴 권리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둘 생각이다. 그녀의 자율 의지를 존중한다.

“그렇죠. 이건 제 의지니까요. 사실 요즘 전 슬럼프를 느끼고 있거든요.”

“슬럼프?”

“네. 눈앞에 커다란 벽이 있어서, 마땅히 지나칠 방법이 없는 벽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죠. 그래도 괜찮아요. 이 벽을 극복할 방법은 알고 있으니까요.”

나도 공감한다.

오기 10단.

삼정의 경지를 넘지 못하고 있는 나니까. 하지만 느끼는 답답함은 다를 것이다. 내겐 유희 생활 어플과 천강성 시스템이 있는 반면에 미령에겐 아무것도 없다.

“그 방법이 뭐야? 영약?”

“영약도 나쁘지 않죠. 제 경지에 통할 정도로 질 좋은 영약이 많이 필요하겠지만요. 하지만 그것보다는 영감이 더 필요해요. 아주 작은 영감이라도 좋아요. 그 영감만 있다면 두꺼운 벽에 금을 내고 부술 수 있겠죠.”

“영감이라…. 내겐 썩 와닿지 않는 단어네. 그 영감은 어떻게 얻으려고?”

“서방님을 따라다니면서 얻으려고요? 서방님은 이 세상의 중심이잖아요. 같이 다니면 심심하지 않겠죠.”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진짜 원하는 게 뭐야?”

“술법사에게 필요한 게 뭐겠어요? 당연히 술법이죠. 이 세상은 넓어요. 하물며 전 다른 대륙에서 왔으니 제가 모르는 술법도 이곳에 많겠죠. 최대한 많고 특이한 술법들이 필요해요. 그 술법들이 제게 영감을 줄 테니까요.”

술법은 무공만큼이나. 아니, 어떤 의미로는 무공 이상으로 구하기 힘들다. 하물며 그녀가 원하는 건 특이한 술법이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녀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령은 그런 내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제가 서방님을 최대한 도울게요.”

“네가 날 도와주는 건 고마워. 근데 없는 술법이 막 튀어나오진 않아.”

“서방님의 목적은 천마가 되어 천마신교를 지배하는 것이잖아요? 천마신교에 있는 술법. 그리고 천마신교의 힘을 이용해 다른 술법들을 쉽게 모을 수 있겠죠. 그때 절 도와주세요.”

“내 여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군…. 알겠다. 조선제일미 퐉스 미령.”

“아, 정말! 그렇게 부르지 마요!”

그때였다.

점소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미령이 살짝 손을 흔들었다. 결계가 사라졌다.

“저, 대협.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점소이는 다리를 덜덜 떨면서도 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점소이의 짬밥이 느껴진다.

“죽엽청 한 병.”

“네. 죽엽청 한 병….”

점소이의 시선이 미령에게 향했다. 미령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는다. 요염함 그 자체였다.

“후후. 전 됐어요.”

점소이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그러다가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죽엽청 한 병!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나는 점소이를 보며 감탄했다. 점소이는 자기 주제를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죽엽청이 나왔다. 미령이 술병을 잡고 천천히 따르고, 나는 부서진 창문 밖의 경치를 보며 술을 마셨다. 미령은 점소이가 사라지자마자 다시 결계를 쳤다.

“죽엽청을 마시는 이유가 있나요? 뭐, 짐작은 가지만요.”

“모르는 건가? 죽엽청은 강호 고수들의 술이다.”

나는 조선제일미에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뭐, 그녀의 피에는 조선인의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여 있지만.

“네에. 네에. 참으로 대단하시네요. 무적유진 대협. 그거 아세요?”

“뭘?”

“종남의천제요. 종남파는 50년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요. 반년 뒤가 딱 그 시기죠.”

“50년마다 하는 행사인가. 그래서?”

“종남의천제가 진행되는 열흘 동안 종남파 일부가 개방돼요. 일반인도 종남파에 들어갈 수 있죠. 제사에 참석해 절을 올려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요.”

나는 그녀의 말에서 진한 흥미를 느꼈다.

종남파 정도의 대문파가 일부라고 해도 개방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종남의천제에 참가하자는 거야? 이유 없이 그러는 건 아니지?”

“종남파는 도교 계열의 문파예요. 특유의 도술로 술법사들을 육성할 수 있다는 거죠. 제가 원하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종남파의 술법인가.”

“의욕이 없어 보이네요?”

“미안한데 술법에는 영 관심이 없어서. 네가 사정사정한다면 도와줄 수 있어.”

“어머나. 제게 그렇게 사정하고도 부족하셨나요?”

미령이 음흉한 표정을 짓는다. 솔직히 그녀가 육체적으로 날 유혹한다면… 난 그녀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종남파는 대문파예요. 종남파에는 삼정의 경지에 오를 때 도움을 주는 영단이 존재해요. 이름은 연정단(連頂丹)이라고 하죠.”

이건 구미가 당긴다.

벽을 넘어 경지를 오를 때 주화입마에 들어설 수 있다. 영단 같은 게 있으면 안정성과 경지 상승 확률이 올라간다.

“도둑질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하기로 정했죠? 무르기 없기예요.”

그녀는 술법을 얻고, 나는 영단을 얻는다. 그야말로 윈윈하는 계획이었다. 물론 자세한 계획은 더 짜봐야겠지만.

***

“머무를 곳은 없으시죠?”

“적당한 집을 구하려고 했어. 임무비도 받아서 여유롭거든. 영 못 구할 것 같으면 낙월산에서 지내면 되니까.”

천마신교에서 제공한 임무비가 상당히 많았다. 일반인은 평생 손도 못 댈 정도의 돈이다.

“집이라면 제가 구했어요. 아늑한 집이에요.”

나는 미령을 따라 움직였다.

도시 외곽. 숲과 맞닿은 곳에 집이 있었다.

집은 크지 않았다. 둘이 살기에 딱 적당한 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최근에 지어졌는지 깨끗했다. 문제라고 한다면 숲과 닿아 있다는 것.

“아주 싸게 샀겠네.”

이 세계의 숲은 위험했다. 숲에서 짐승이 튀어나오는 건 애교 수준이다. 호랑이 같은 맹수가 튀어나올 수 있고, 요괴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보통 이런 집에는 실력 좋은 사냥꾼들이 거주한다.

“제가 직접 인부들을 고용해 지었어요. 겉보기와 달리 내부는 넓어요. 술법을 사용했거든요. 결계가 있어서 짐승이나 요괴들이 덤벼들진 못할 거예요. 아니면 혹시 서방님은 도심 쪽이 좋으신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현대 서울이면 모를까. 이 세계의 도시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사람이 지나치게 많아 시끄럽다. 어두운 골목길에 들어가면 거지들이 넘쳐난다. 대궐 같은 집에 산다면 모를까. 일반인들이 사는 집은 불결하고 방음도 되지 않아 시끄럽다. 차라리 도시에서 떨어진 장소에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편이 훨씬 낫다.

“천년만년 여기서 살 것도 아니니 괜찮네.”

집 앞으로 걸어간 나는 멈칫했다. 뒤늦게 알아차렸는데 이 세계의 건물 양식과 좀 달랐다.

‘한옥이네. 그것도 현대식에 가까운 깔끔한 한옥.’

미령이 한복을 입고 있는 것에서부터 감이 왔다. 그녀는 나름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뭐, 조선제일검이라 칭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냥 익숙하지 않은 한옥이 있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해도 한옥을 접할 기회는 딱히 없었다. 보통 TV나 교과서로만 봤지.

‘마당도 있군.’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술법을 걸어뒀다는 말답게 내부는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조금 더 넓었다.

“텅 비어 있잖아.”

“제가 집을 구했으니, 혼수품은 서방님께서 구하셔야죠?”

“보통 반대 아니야?”

“반대면 어때요. 중요한 건 이곳이 우리들의 보금자리라는 사실이죠.”

미령이 내 옆으로 성큼 다가왔다. 양팔로 내 오른팔을 끌어안는다. 내 팔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 사이로 정확히 들어갔다. 말랑한 살덩어리의 감촉에 정신이 팔린다.

“뭐, 가구 정도야 금방 채우지.”

“서방님. 그래도 제가 준비해둔 건 있어요.”

그녀가 나를 끌고 안방으로 향했다.

안방에는 두꺼운 이불이 깔려 있었다. 베개는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살짝 옛날 느낌이 나는 이불은 붉은색으로 화려했다. 아늑한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2인용 이불. 야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미령을 돌아보니 무언가를 기다리듯 예쁘게 웃고 있었다.

“아주 노골적인걸?”

“으응. 싫으세요?”

“그럴 리가.”

나는 그녀를 잡고 이불을 향해 던졌다.

“꺄앙!”

푹신한 이불에 떨어진 그녀가 웃음기 섞인 비명을 질렀다.

나는 차려진 밥상을 엎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단숨에 옷을 벗어 던지고 이불에 쓰러진 미령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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