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4화 > 1514. 광명승천도
-어쩔까요? 우리가 먼저 기습할까요?
머릿속에서 미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에 목소리를 실어 은밀하게 전달하는 전음과는 다르다. 텔레파시에 가까웠다. 이것도 술법이리라.
나는 그녀처럼 텔레파시를 못하기에 전음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기다리자. 정척과 낭인들이 곧 나타나 주의를 끌 거야. 그때 시작하자.
독박을 쓰듯 나 혼자 일하고 싶지 않았다.
일다경 정도 기다렸을까.
숨죽이고 있던 검은 호랑이들이 무언가를 느낀 듯 우두머리 흑호를 바라봤다. 바위 위에 앉아 있던 흑호가 몸을 일으킨다. 흑호는 다른 호랑이들과 달리 사람처럼 두 발로 일어섰다.
흑호가 숲의 어느 곳을 바라보며 포효했다.
“어흐으으으으응!”
그 소리는 숲을 울리며 퍼져나갔다. 우두머리 흑호들을 제외한 검은 호랑이들이 움직였다. 서서히 다가오는 낭인들을 먼저 기습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이번에는 우두머리 흑호도 움직일 생각인지 느릿하게 바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마치 자신은 특별하다는 듯 천천히 두 발로 걸어간다.
‘지금인가.’
나는 미령에게 끼어들지 말라는 언질을 준 뒤 흑호에게 달려들었다. 그 검은 털가죽을 향해 푸른 강기가 서린 칼을 냅다 휘두른 것이다.
“?!”
흑호가 반응했다. 온몸을 기민하게 움직여 내 습격을 피한다. 그리고 놀랐다는 듯이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놀랍군.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나는 죽었을 거다.”
요괴의 반응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저 한 번에 죽이지 못한 것에 아쉬울 뿐이었다.
‘완벽한 타이밍의 기습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감각 하나만큼은 나보다 더 뛰어난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흑호가 유리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는 감각 하나만으로 승패가 결정될 정도로 단순하지 않으니까.
“닥치고 네놈 가죽이나 내놔라.”
뇌천류(雷天流) 질풍신뢰(疾風迅雷).
파지직.
전신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가속을 사용합니다. 10분 동안 유지됩니다. 남은 스택: 6]
전투를 질질 끌 생각은 없었기에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가속했다. 거리를 좁히고 칼을 휘두른다.
칼의 휘두름 자체는 삼류 무인도 비웃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저 아무렇게나 휘둘렀으니까. 그러나 누구도 내 칼을 비웃지 못한다. 일격에 담긴 무리가 형편없어도, 그 속도만큼은 일반인의 인식을 초월했으니까.
지금의 내 일격은 소리보다 빨랐다.
“크으으으윽!”
흑호의 오른팔에서 피가 튀었다. 팔은 자르지 못했다. 흑호는 음속을 초월한 일격에 반응하며 몸을 뒤로 뺀 것이다.
나는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으며 지면을 바라봤다. 흑호의 족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족적에서 규칙성이 느껴졌다.
“무공을 익혔나?”
“무공이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느냐?”
“그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다. 보통 요괴들은 무공보다는 자기 능력을 갈고닦으니까.”
“내 능력은 튼튼한 육체뿐이다. 육체를 사용하는 무공과 궁합이 좋더군. 특히… 이 조법(爪法)이란 무공이!”
흑호가 손톱을 휘두른다. 응축된 4개의 검은 강기가 날아온다. 나는 피하는 대신 강기로 받아쳤다. 4개의 강기가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강기에 닿은 나무와 바위가 베어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조법. 손톱을 이용한 무공. 무공 중에서도 익히는 자들이 드문 꽤 마이너한 무공이었다.
“클클. 어디 이것도 받아내 보거라!”
흑호의 팔과 다리가 현란하게 움직인다. 쉐도우복싱을 하듯 보이지 않는 대상을 공격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놈이 팔과 다리를 휘두를 때마다 강기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아까처럼 받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받아내는 것에 집착하다가는 쉬지 않고 이어지는 강기에 몸이 썰릴 것이다. 호신강기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피하고 접근한다.’
뇌천류(雷天流) 뇌음보(雷音步).
보법을 밟는다. 발끝에서 천둥이 울린다.
날아오는 강기들을 모조리 피하며 접근했다. 흑호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내 다리를 견제하며 최대한 거리를 벌린다. 허나 서로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다.
흑호는 쉬지 않고 손톱과 발톱을 휘둘렀지만, 영원히 강기는 날릴 수는 없었다. 그의 호흡이 흐트러지는 순간이 있었고, 나는 그 틈을 노렸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진다.
뇌천류(雷天流) 뇌사(雷蛇).
칼끝이 뱀처럼 꼬불거리며 흑호의 가슴 중심을 노렸다.
“걸렸구나! 백연(白煙)!”
흑호가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훅 불었다. 하얀 연기가 폭발하듯 일어나 나를 밀어냈다. 나는 연기에 밀려 뒤로 날아갔다. 거리가 너무 멀어지기 전에 지면에 칼을 박고 버티려고 했으나, 하얀 연기는 멈추지 않고 뿜어져 나와 내 몸을 끝까지 밀어냈다.
‘빌어먹을. 이건 무공이 아니라 법기의 능력이군.’
몸이 뜨겁다. 호신강기를 뚫고 하얀 연기가 스며든다. 이대로 있으면 인간 훈제 고기가 될 것이다.
나는 지면에서 칼을 뺐다. 몸이 붕 떠 오르며 뒤로 날아간다. 그 와중에 정신을 집중하고 칼을 휘두른다.
뇌천류(雷天流) 뇌광(雷光).
푸른 빛이 하얀 연기를 갈랐다. 갈라진 연기 끝에 검은 호랑이가 오연히 서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뇌음보를 밟으며 흑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씨익.
검은 호랑이가 웃으며 나를 향해 손톱을 내민다. 손톱 끝에 강기가 모여 뭉치며 구체를 이루었다.
강환(罡丸)이다. 강기를 압축하여 만든 작은 폭탄.
강환이 내게 날아왔다. 찰나를 쓰더라도 완벽히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4]
찰나를 사용했다. 느려진 세계에서 답을 구했다. 지금이라도 회피한다면 죽지는 않겠지만, 팔다리 하나쯤은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완전 회복을 믿고 전진하는 것도 좋다.
‘겨우 이따위 공격에 당하면 자존심이 상하는데….’
고민하던 나는 천재의 시간을 발동했다.
[10초 동안 천재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흑호의 강환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강환의 구조가 보였다. 강환이 폭발하게 되면 압축된 강기가 폭풍처럼 사방을 휩쓸어 모든 것을 벨 것이다.
‘방법은 하나다. 저 강환을 통째로 베어버리면 된다.’
말은 쉽다. 그리고 현실은 호기롭게 내뱉는 말처럼 쉽지 않다.
‘이번만큼은 다른 것 같군.’
감각과 영감이 이끄는 대로 칼을 움직인다.
뇌천류(雷天流) 뇌강인(雷罡刃).
벤다.
단순히 베어서만은 안 된다.
강환을 이루고 있는 그 핵심을 베어내어야 한다. 그건 분명 물리적인 법칙을 넘어선 개념의 영역이다.
‘가능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흑호 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다.
번개의 칼날이 휘둘러진다. 강환이 반으로 쪼개진다. 강환은 폭발하는 대신 허공에 녹아들 듯이 사라졌다.
뇌천류(雷天流) 허도(虛道)..
허공을 내달린다. 막아서는 것이 없다. 나는 벼락이 되어 놈의 가슴팍에 칼을 찔러넣었다.
“폭발하지 않는다고?!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경악한 흑호가 외친다. 짐승의 냄새가 났다. 그 목소리에선 억울함이 가득 느껴진다.
“수작은 무슨. 그냥 네가 나보다 약한 거다.”
흑호의 손톱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칼을 위로 올려 놈의 머리를 베었다.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흑호의 거체가 뒤로 넘어가 쿵 넘어졌다. 확인 사살을 할 필요는 없다. 놈은 확실하게 죽었다.
“수고하셨어요.”
미령이 옆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하얀 수건으로 내 머리를 닦아 주었다. 수건은 흑호의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엉망이었다. 멀쩡한 나무가 없었다. 땅이 뒤집어진 것 같았다.
“미령아. 우선 챙길 것부터 챙기자. 놈이 가지고 있던 공간함은 없어?”
“음. 있을걸요? 오기(五氣)의 경지면 공간함 정도는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근데… 이 요괴는 옷도 안 입고 있어서….”
“보통 요괴들은 자기 몸 안에 넣고 다니기도 하지.”
물론 그런 요괴는 무척 드물었다.
파지직.
내 손에서 일어난 전류가 흑호의 몸을 한 차례 훑었다. 일종의 스캔이다.
“발견했어요?”
“귀 안에 있어. 깊숙이 넣은 건 아니고 걸쳐둔 느낌이랄까?”
오른쪽 귀에 손을 넣었다. 손바닥보다 약간 작은 목함을 어렵지 않게 꺼냈다. 나는 공간함의 물건들은 전부 꺼냈다.
철오조법(鐵烏爪法)이라는 무공서가 가장 먼저 떨어졌다. 뒤이어 싸구려 영약과 인간 고기들이 쏟아진다. 인간 고기만 300kg 넘게있었다. 대부분 머리와 허벅지 부위다.
“우웩. 누가 요괴 아니랄까 봐 인간 고기를 가지고 다니네요. 음? 서방님?”
나는 홀린 듯이 바닥에 떨어진 비급을 손에 쥐었다. 그 표지에는 역마신공(易魔神功)이란 단어가 떡하니 적혀 있었다.
“역마신공의 비급을 왜 이놈이 가지고 있는 거지? 설마… 이놈도 묵지련 소속인가?”
“역마신공이요? 흐음. 그 책에서 특이한 기운이 느껴지네요. 잠깐 제가 봐도 될까요?”
“어. 상관없어. 대신 익히지는 마라.”
“에이. 이렇게 불길한 기운을 줄줄 흘리는 걸 제가 왜 익혀요?”
미령이 역마신공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갈수록 그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나는 우선 정리부터 했다. 인간 고기는 전부 버리고 흑호의 시체와 싸구려 영약들을 공간함에 넣었다. 철오조법이란 무공은 그냥 불태웠다. 흥미도 가지 않는다.
“서방님. 이거… 꽤 위험한 술법이에요.”
“술법에 가까운 무공이라고 하던데. 진짜 술법이 걸려 있었던 거야?”
“책 자체는 악한 기운이 있다는 걸 빼면 평범해요. 여기에 적힌 구결대로 내력을 운용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술법을 쓰게 되는 구조예요. 그래도 그것뿐이라면 괜찮아요. 겨우 그 정도로 술법이 활성화될 정도로 간단한 술법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인육을 섭취하는 순간 술법은 완전히 발동돼요.”
“요괴로 변하는 술법 말이지?”
“네. 그리고 요괴는 더 강한 힘을 얻겠죠.”
“……요괴에게도 효과가 있다고?”
그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여기에 적혀 있는 술법은 애초에 요괴를 위한 술법이니까요. 나찰의 술. 인간을 먹고 강해지는 나찰의 술법이에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청난 술법이란 건 알겠다. 하지만 그게 미령이 심각할 표정을 지을 정도인가?
“왜 그렇게 심각해? 이건 익히지 않으면 해를 끼치는 술법이 아니잖아. 문제가 있다면 역마신공 놈들이 치러야 할 문제지.”
“나찰의 술은 이 세상의 술법이 아니에요.”
“다른 세계의 술법이야?”
“네. 나찰의 술은 명계의 술법. 즉, 마술(魔術)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