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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5화 > 1515. 광명승천도 (1,295/2,000)

< 1515화 > 1515. 광명승천도

나는 멀뚱히 미령을 쳐다봤다. 미령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솔직히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심각한 일이야?”

“심각한 일이죠.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다른 세계와 이어져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알아. 대표적으로 선계, 명계, 환수계, 중간계 등이 있잖아.”

대표적인 4개의 세계다. 그 외의 자잘한 세계도 있는 모양이지만, 가장 큰 세계는 4개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중간계다. 생물이 죽으면 명계로 떨어지고, 등선하면 선계로 올라간다.

그리고 등선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세계는 각각의 법칙이 있어요. 그 법칙들이 맞물려 세계가 유지되고 있죠. 그런데 명계의 마술이 중간에 떠돌고 있다? 이건 명계가 중간계에 영향을 끼치려 한다고 보일 수도 있어요. 이걸 시작으로 해서 최악의 경우에는 균형이 흔들리고 법칙이 바뀔 수도 있어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

“중간계 혼란이 오겠죠. 아주 거대한 혼란이.”

“묵지련이 역마신공을 중간계에 퍼뜨리는 건 명계의 뜻이란 거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명계의 뜻을 제가 알 리가 없잖아요?”

“……음. 그러니까 네 말은 역마신공이 떠도는 걸 막아야 한다?”

“아니요.”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어떻게 하자고?”

“그거야 서방님의 뜻에 달렸죠. 저야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자기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으니 상관없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아니겠죠. 서방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애초에 마술인가 뭔가 하는 술법 하나로 세상이 혼돈으로 가득 차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음. 그렇긴 해요. 명계의 계획이 이렇게 엉성할 리 없고… 선계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네요.”

정말 해프닝으로 끝날지는 모르겠다. 저번 만무탑에서의 일 때문에 명계가 무언가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이 세계는 여러 창작물이 뒤죽박죽 섞인 세계관이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언가 일이 터질 수 있다. 아니면 이미 터졌거나.

“우린 할 걸 하면 돼. 정리하고 가자. 그거, 역마신공은 어떻게 할 거야?”

“제게 주시면 안 될까요? 명계의 술법을 연구해보고 싶어요.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으니까요.”

“상관없어.”

“아,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광명승천도도 빌려주시면 안 돼요?”

“광명승천도를? 왜?”

“광명승천도는 술법도 강화할 수 있다면서요? 어떤 식으로 강화되는지 알고 싶어요. 강화된 술법을 연구하면 얻는 성과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생각해보니 광명승천도를 그런 식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미령의 입장에선 광명승천도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강화할 수 있는 광명승천도. 역시 엄청난 물건이다.

“그래. 빌려줄게.”

깊게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지금 광명승천도는 영약을 강화하는 데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강화된 영약은 이미 꽤 쌓여 있으니 미령에게 빌려줘도 상관없었다.

“아싸!”

미령이 좋아했다. 그녀는 공간 술법으로 만든 자신만의 공간에 역마신공을 넣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나무 사이로 구지검 정척이 다가왔다. 피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대협. 전투 흔적을 보니 흑호와 이미 한바탕 한 모양이구려.”

“흑호는 내가 죽였다. 시체는 내가 챙겼지.”

“배월시로 돌아가서 시체를 보여줄 수 있겠소? 의뢰인을 납득 시켜야 하오.”

“뭐, 그 정도야 상관없지. 대신 시체의 소유권은 내 거다. 보수도 확실하게 받을 거다.”

“물론이오. 무적유진 대협께는 그 자격이 있소.”

무적유진. 처음에는 재밌다고 낄낄 웃었지만 계속 듣다 보니 나를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내 이름은 사실 유진이다. 앞으로 유진이라 불러라.”

“알겠소. 유 대협.”

나는 뭐라 말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굳이 내 본명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귀찮기도 하고.

“떨거지들은 어떻게 됐지?”

“낭인? 흑호? 누구 말이오?”

나는 그 질문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척, 이놈은 정파 대협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명 따위는 별 관심도 없다는걸. 아나 낭인이 전부 죽더라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다. 뭐, 이상한 건 아니었다. 나도 그러니까.

“둘 다.”

“유 대협이 우두머리 흑호를 맡아준 덕분에 우리의 피해는 적었소. 흑호는 살아남은 몇 놈이 도망쳤소. 우두머리가 이곳에서 죽었으니 이 근처에는 안 나타날 것이니 추적은 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개혈도는 돌려주시오. 아끼는 물건이오.”

“꽤 쓸만하더군.”

나는 그에게 개혈도를 주고 배월시로 먼저 귀환했다. 내가 낭인들을 도와 뒤처리를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기장사 황소동을 만났다.

“어쩐 일이십니까. 제 대답은 이전과 같습니다. 이 도시를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 그거 안타깝군. 오늘은 일도 의뢰하러 왔다.”

“…일이라면?”

나는 공간함에서 칼과 흑호의 시체를 꺼냈다. 황소동의 시선은 먼저 칼로 향했다.

“칼을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상관없다.”

황소동이 칼을 들어 천천히 살펴봤다. 그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가득 찬다.

“특별한 기장술을 이용해 만든 물건은 아닙니다. 하지만 명도입니다. 이 칼을 만든 이는 대장장이 실력만 따지면 저보다 더 위에 있군요. 누가 이 칼을 만든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도 모른다.”

“아쉽군요. 왜 제게 칼을 내미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칼에 저주가 걸려 있군요.”

“이틀 전이었다. 기루에서 마음에 안 드는 놈 하나를 죽였지. 술법사더군. 죽기 전에 내게 저주를 걸었다. 대충 걷어내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 저주가 칼에 달라붙었다.”

“으음. 이런 경우 다시 재련하는 게 낫습니다. 다만… 제 실력이 미천하여 원래보다 못한 칼이 될 것입니다.”

“그래? 그럼 뭐 적당히 버려야겠군.”

“……버린다고요? 이 좋은 칼을?”

“설마 내게 그 칼 한 자루만 있는 줄 아나? 내겐 그것 말고도 좋은 칼이 많다.”

그건 드워프가 만든 칼 중 하나였다. 드워프가 드물게도 역작이라며 소리치긴 했는데, 그런 건 관심 없고 겉모습이 그럴싸해서 차고 다녔다.

“실례했습니다. 괜찮으시면 이 칼을 제가 매입하고 있습니다.”

“저주받은 칼을?”

“술법사에게 부탁하여 저주를 정화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또 저주를 봉인하고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워낙 좋은 칼이니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미령에게 먼저 가져갔으면 알아서 저주를 해제해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관뒀다.

미령은 지금 역마신공을 연구한다며 바빴다. 고작 이따위 칼 한 자루 때문에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를 줄 거냐?”

“매입은 다른 것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흑호의 시체를 가져왔다는 건 제게 법기 제작을 의뢰하려는 것이겠지요.”

“돈을 대신해서 무료로 법기를 제작해주겠다고?”

“네. 마음에는 드십니까?”

“뭐, 나쁘지 않지.”

“다만 이 흑호의 시체로 만들 수 있는 법기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고기나 내장은 쓸모없고, 가장 좋은 건 가죽과 발톱이군요.”

“내가 원하는 건 장포다. 튼튼한 건 둘째 치고 청결함을 유지하는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군.”

“청결함 말입니까? 의외로군요. 그런 효과는 보통 원하지 않는데….”

“피가 묻으면 찝찝하다. 갈아입기도 귀찮고.”

“알겠습니다.”

“며칠 걸리지?”

“보름이면 됩니다.”

***

보름 뒤에 다시 황소동을 만났다.

그의 손에는 멋진 흑생 장포가 있었다. 별하나 없는 밤하늘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새까만 장포였다.

“흑호포입니다. 이름은 단순하게 지었습니다.”

“이름과 달리 호랑이 가죽 느낌은 전혀 안 드는군.”

“기장술은 단순히 가죽을 잘라 옷으로 만드는 것과는 다릅니다. 가공하는 과정에서 추가로 재료가 섞이며 원래의 촉감이나 형태가 달라지는 건 흔한 일입니다. 그래도 그 천에는 흑호 가죽의 특징이 녹아 있습니다. 어지간한 도검에는 베이지도 않습니다.”

“아니, 널 탓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좋다. 청결은?”

“흑호포(黑虎袍)는 피를 흡수하고, 그 외의 오물을 털어냅니다. 흑호포가 찢어지더라도 피를 먹이면 재생합니다.”

“아주 마음에 든다.”

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흑호포를 걸친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옷의 감촉도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화련비도를 소환해 허리춤에 걸며 폼까지 잡아봤다. 강호 지존의 분위기가 확 살았다.

황소동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는 마른침을 연신 삼키며 내 앞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 칼, 그 칼에서 범상치 않은 힘이 느껴집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제게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화련비도를? 화련비도는 내가 아끼는 칼이다. 변태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네놈에게 보여줄 것 같냐? 썩 꺼져라!”

“흐헉…!”

살기를 느낀 황소동이 뒤로 물러나 고개를 조아렸다. 마음 같아선 베어 죽이고 싶으나, 이놈은 포섭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흑호포를 보니 짜증도 금방 사라졌다.

나는 화련비도의 붉은 도신을 바라봤다. 금 간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빨리 화련비도를 고쳐야 하는데….’

화련비도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당분간 화련비도는 사용하지 않는다. 금 간 화련비도가 전투로 인해 완전히 부서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라면 몰라도 여긴 광명승천도 세계야. 방심할 수 없는 세계지.’

그러니 화련비도는 최대한 아낀다.

화련비도가 아니어도 쓸만한 칼들은 많다. 드워프를 쥐어짜 만든, 명품 중의 명품인 칼들이다. 물론 화련비도 보다 못한 칼들이지만.

나는 적당히 멋있는 칼을 차고 도시를 배회했다.

원래 새 옷을 입으면 산책하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보아라, 좆밥들아. 이게 바로 강호 고수의 풍모다!’

펄럭펄럭!

장포를 휘날리며 거리를 걷는다. 나를 본 사람들은 모두 길을 비켜섰다. 고수의 풍모에 모두 쫄아버린 것이다.

주제 모르는 강호 좆밥들이 시비를 걸어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명성은 이미 배월시 전체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응?’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에 있는 여인 중 일부가 한복을 입고 있었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손으로 비비며 다시 봤다.

다시 봐도 한복이었다.

‘한복이 왜?’

짐작 가는 건 하나뿐이었다.

‘미령이 계속 한복을 입다 보니 유행이 된 거군.’

한복을 입은 여인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젊고 피부가 하얗다. 이 세계에서 피부가 하얗다는 건 단순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돈이 많다는 걸 뜻한다.

좀 놀라긴 했으나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한복이 유행한다고 해서 내가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니까.

어쨌든 나는 장포를 과시하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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