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16화 > 1516. 광명승천도 (1,296/2,000)

< 1516화 > 1516. 광명승천도

묵지련(墨地聯).

내가 천유운에게서 받은 부탁 중 하나가 종남산에 위치한 묵지련의 지부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묵지련에 대해 조사했다.

기루에서 은근슬쩍 묵지련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 것이다. 고급 기루는 부자나 실력 좋은 무인들이 자주 찾으며 술을 마시는 곳이니 이런저런 정보가 오간다.

기녀에게 정보가 뜯기겠지만, 반대로 기녀에게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묵지련의 정보를 얻는 건 쉬웠다. 묵지련은 어느새 음지에서 유명한 조직이 되어 있었다. 알만한 놈들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다만 기녀들이나 사람들은 묵지련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묵지련이요? 거기 나름 괜찮은 곳이에요. 돈만 주면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을 구해주거든요.”

“제가 아는 무인은 묵지련을 통해 영약을 얻었대요. 상승무공도 판매한다는 말이 있어요.”

“일종의 흑점 같은 곳이에요. 대단한 곳은 아닌 것 같아요.”

기녀들의 대답이었다. 묵지련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상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만큼 묵지련이란 곳이 철저한 곳이니까.

나는 화월루주 공비를 부리는 것도 생각해봤다. 정보 수집 능력 하나는 최고 수준이니까.

‘여기서 활동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여기 기녀들보다는 많이 알고 있겠지.’

적당히 정보를 얻고 난 뒤에는 미령에게 은신부를 받아 묵지련으로 잠입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졌다. 공비를 만나러 가기 전에 묵지련이 내게 접촉한 것이다.

나는 묵지련이 건넨 쪽지를 따라 도시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허름한 객잔으로 향했다. 여행객들을 위한 객잔이다. 딱 봐도 수상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한 명의 남성이 앉아 있었다. 냉담한 인상의 그는 조용히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앞에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

“묵지련?”

그가 입을 열었다. 멀끔한 외형과 잘 어울리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묵지련 종남 지부의 지부장인 마호벌 입니다.”

나는 그의 몸을 위아래로 살폈다. 기세를 완벽히 숨기고 있어서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삼정이었다면 더 강압적으로 나왔을 테니…. 아마 나와 비슷한 수준이겠지.’

몸에 걸치고 있는 무기는 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숨기고 있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다. 그게 아니면 권각을 수련했거나. 기공 혹은 술법을 수련했을 수도 있다.

“조선제일검 유진이다.”

“그리고 천마신교의 적멸대원 섬전도 염구석이기도 하시지요.”

내 정체를 알고 있다.

‘그걸 바로 까발려? 주도권을 잡겠다는 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바로 칼을 뽑았다. 챙! 칼날에 푸른 강기가 모인다.

“진정하십시오. 전 당신과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난 너와 싸워도 상관없다.”

“제가 이곳에서 죽으면 당신에 대한 정보가 천하에 퍼지게 됩니다. 종남파가 가장 빠르게 반응하겠지요.”

“날 협박하려고 여기에 불렀나?”

그가 어이없다는 듯 날 보았다

“협박은 염 대협이 하고 있잖습니까.”

난 혀를 차며 일단 칼을 갈무리했다. 기세는 거두지 않았다. 강호 고수가 되어서야 놈에게 압도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같잖은 소리를 하려고 불렀다면 죽여버리겠다.”

“차라도 한잔하며 강호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원치 않으시는 모양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천마신교에서 묵지련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으셨습니까?”

“나를 알면서도, 내가 받은 임무는 모른다라. 어중간하군.”

“염 대협의 정체는 행적을 조사하며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천마신교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닌지라… 기밀 정보를 얻는 건 쉽지 않더군요.”

“내 임무를 왜 묻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묵지련에 대해 너무 대놓고 묻고 다니셔서 말입니다.”

“맞다고 한다면?”

“거래를 제안하겠지요.”

“아니라고 한다면?”

“그 또한 거래를 제안하겠지요. 저희는 대협과 싸울 정도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

생각에 잠겼다.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이놈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갈성전.”

“…….”

“갈성전을 데려와라. 나는 그놈과 대화하겠다.”

마호벌은 침묵했다. 한참 사색을 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갈성전이 누구입니까?”

“모르는 척하는 거냐? 연기 실력이 제법이군.”

“연기라뇨. 정말 몰라서 그렇습니다. 저희 지부에는 갈성전이란 이름의 사람이 없습니다.”

“모른다고? 지부장이 되어서 묵지련주의 이름도 모르는 거냐?”

[깨어나 보니 천마가 되어 있었다.]에서 천유운은 갈성전이란 남자와 함께 묵지련을 만든다. 천유운은 천마신교를 쉽게 벗어날 수 없기에 일종의 바지사장을 세운 것이다. 물론 갈성전은 능력이 있는 놈이었다. 능력이 없다면 묵지련을 관리하지 못하니까.

“후우.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갈성전이란 자는 묵지련주가 아닙니다.”

“여기까지 와서 발뺌이냐?”

“정말입니다.”

“……그럼 누가 묵지련주지?”

“죄송합니다만, 그건 기밀입니다. 저를 찢어 죽이셔도 말할 수 없습니다.”

“…….”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갈성전이 표면적인 묵지련주가 아니다?

‘역마신공도 그렇고… 내가 알고 있는 묵지련과는 아예 달라졌군.’

그럼 지금 묵지련주는 누구지?

나는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묵지련의 조사는 천마신교로부터 직접 받은 임무는 아니다. 묵지련주가 누구인지 알려주면 자세히 알려줄 수 있다.”

“그 대답만으로 충분합니다. 이젠 제가 제안할 차례군요. 묵지련에 소속될 생각은 없으십니까? 가짜 신분과 영약 지원, 무공 또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역마신공을 수련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묵지련에 들어 간다라…. 이중 첩자 질을 내게 시킬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천마신교의 동향이나 정보를 저희에게 전해주시면 됩니다. 저희는 대협이 천마신교 내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혹시 적멸대원의 자리로 만족하고 계십니까?”

그럴 리가.

내 목표는 천마신교의 꼭대기였다.

적멸대? 발판에 불과하다.

“이미 천마신교의 높으신 분들을 포섭했나?”

“완벽히 포섭한 건 아닙니다. 허나 끈은 이어 놓았습니다.”

“거래 관계군.”

“그들이 우리를 이용하고, 우리도 그들을 이용하는 관계지요.”

끌리는 제안이었다.

내가 천유운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건 천마신교 내에서 빠르게 직위를 올라가기 위해서다. 그런데 원작과 달리 천유운의 성장 속도와 계획 진행도가 느릿했다. 이 세계의 배경이 선협 세계라 그렇다. 따져야 할 게 너무 많은 것이다.

‘무엇보다 천유운이 묵지련을 완벽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이것저것 따지다 보니 이상함을 깨달았다.

“고작 지부장 주제에 이런 제의를 한다고?”

“…그게 무슨 뜻입니까?”

“천마신교와 관련된 일이다. 네가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니지. 묵지련주가 시켰나?”

“그렇습니다.”

“건방지군. 직접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해라.”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완벽히 자신을 숨기며 대답했다.

“…묵지련주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내가 신교로 돌아가기 전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건 제가 확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묵지련주께서 정하실 일입니다.”

코웃음을 친 난 자리에서 일어나 객잔을 떠났다.

‘건방진 새끼. 강호 고수인 내게 배웅을 안 해? 기회가 되면 이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놈은 강호의 도리를 져버렸다. 고로 죽을 이유는 충분했다.

***

묵지련의 종남산 지부장 마호벌은 결계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특수한 강철로 만든 작은 나뭇잎이었다. 나뭇잎을 손바닥 위에 올리고 내력을 불어 넣었다. 우우웅. 나뭇잎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련주님. 마호벌입니다.”

-어떻게 됐어?

다소 신경질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나뭇잎을 통해 울렸다.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마호벌은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그는 련주가 분노하리라 예상했다. 련주는 다혈질이었으니까.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벼락처럼 격노하곤 했다.

-흐음.

그러나 련주는 분노하지 않았다.

-잘 풀렸잖아. 네가 심각하게 말하기에 잘 안된 줄 알았는데.

“그자를 만나실 생각이십니까?”

-만나야지. 만나는 것만으로 날카로운 칼을 손에 넣을 수 있잖아. 이건 수지맞은 장사야. 뭐, 지금 당장 만나는 건 힘들지만. 그에게 전해, 일이 바빠 만날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영약 몇 개 선물로 가져가고. 그가 원하는 게 있으면 최대한 들어줘.

련주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담겨 있었다.

마호벌은 오늘 낮에 보았던 그에 관한 정보들을 떠올렸다.

“그를 진정 믿으십니까?”

-왜?

“그놈은 쓰레기입니다. 힘을 얻은 사파의 떨거지가 그놈입니다. 하루 대부분을 기루에서 시간을 보내고, 일부러 무인들에게 시비를 겁니다. 하루는 기루에서 점소이를 협박하며 놀고, 지나가는 무인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비무를 신청해 죽이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또 놈을 비방했던 지주 중 한 명이 도시와 떨어진 곳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하하하. 그게 왜?

“놈을 믿을 수 없습니다. 놈은 우리를 배신할 겁니다.”

-정보가 몇 개 빠졌네. 그는 여자는 건들지 않아. 특히 미녀의 그림자는 함부로 밟지도 않더군.

“호색한이라 그런 것일 뿐입니다.”

-하나 더. 알아서 굽히는 자들은 웬만해선 건들지 않지. 난 그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감이 잡히는데. 무엇보다…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웃기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죽이는 건 안 되고, 무고한 인간을 잡아먹는 행위는 괜찮다는 거야?

마호벌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참 침묵한 뒤에 말했다.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놈은 칼로 다루기에는 부적절합니다.”

-난 이미 결정을 내렸어.

“이해하기 힘듭니다. 놈이 꼭 필요합니까?”

-염구석. 그 빌어먹을 자식이 주목하고, 약간이나마 신뢰하는 남자야. 너도 알잖아, 그 자식이 사람 보는 안목 하나만큼은 최고 수준으로 뛰어나다는걸. 염구석은 놈의 심장을 꿰뚫을 최고의 칼이 될 거야.

마호벌은 눈을 감았다. 지금 련주에게 뭐라고 말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