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0화 > 1520. 광명승천도
파지지직.
손을 타고 전류가 번뜩인다. 전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흐르고 뻗치면서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나는 의지로서 전류를 제어했다. 전류는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문에 손바닥을 댔다. 전류가 흐른다. 여전히 전류는 내 제어하에 있었다. 전류는 문안으로 뻗어나가며 그 구조를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사용하는 건 처음인데…. 마치 전류가 내 감각이 된 것 같군.’
덕분에 기관진식의 구조를 들여다본 것처럼 알 수 있었다.
‘안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였다.
그래도 나는 현대인으로서 기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있었다. 부품을 보면 대충 어디에 쓰일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함정이 있는 건 확실하다. 화살 같은 게 있는 걸 보니 문을 억지로 열거나, 박살 내면 흉기가 날아오는 구조겠지.’
억지로 열지 않으면 된다. 문의 구조를 보니 손잡이에 있는 구멍에 열쇠를 넣어 돌리는 방식이다.
이런 경우는 쉽다. 전류를 자력으로 바꾼다. 자력으로 키 핀(key pin)의 높낮이를 맞춘다.
딸칵.
잠금이 풀리고 문이 열렸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기운이 바뀌었다. 몸이 찌르르 떨릴 정도의 영기가 느껴진다.
‘선반 위에 영약과 영단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군.’
나는 그것들을 확인하지 않고 일단 공간함에 모조리 쓸어 담았다. 서고도 털어야 하는데 영약들을 하나, 하나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정리와 구분은 나중에 여유 있을 때 하면 된다.
싹 쓸어 담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양 자체는 많지 않았다.
‘아무리 종남파라도 희귀한 영단과 영약을 수백 개씩 쌓아 둘 수는 없겠지.’
영약을 모두 챙긴 나는 조심스럽게 연단실 밖으로 나갔다.
콰아아아아앙! 쿠르르쾅쾅쾅!
폭발음이 들렸다. 아까보다 더 심했다. 거기에 하늘에선 낙뢰가 쉬지 않고 떨어진다.
‘개판이군.’
덕분에 종남파의 무인들도 정신없어서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서고로 향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미령이 준 부적으로 결계를 통과했다.
‘…뭐지. 문이 열려있군. 아까 미령이랑 봤을 때는 분명 닫혀 있었는데?’
답은 하나뿐이다. 안에 누군가가 있다.
나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으며 기감을 퍼뜨렸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 기감을 속일 정도로 은신 실력이 뛰어나거나, 안에 아무도 없거나.
‘없나? 안에 들어있으면 문을 제대로 닫았겠지. 지나가던 종남파 무인이 서고를 확인하고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건가?’
그래도 방심하지 않는다. 나는 칼을 앞으로 내밀며 문을 향해 뛰어갔다. 단숨에 문을 열어젖힌다.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뒤로 물러나며 칼을 휘두른다.
상대방도 뒤로 물러나며 칼을 피했다. 나는 서고 내부를 노려보다가 눈을 치떴다. 금발 여자가 있었다.
치파오를 입은 금발의 여인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치파오가 아니다. 가슴 부분이 벌어져 있어 풍만한 가슴이 윗부분이 보이고, 치마 부분의 옆트임이 커서 엉덩이 옆 부위가 보인다. 풍만한 가슴만큼이나 엉덩이도 컸다. 놀라운 것은 검은색 팬티 끈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끈팬티라니… 아주 좋군.’
치파오와 끈팬티. 별로 이상하지는 않았다. 이 세계는 여러 가지 창작물이 짬뽕된 만큼 갑자기 슈퍼카가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치파오 자체는 흔하지 않지만 입고 다니는 자들도 꽤 있다. 이 세계에선 치파오가 유행이 지난 옷으로 취급된다.
“조선제일검 유진?”
양손에 검을 쥔 금발녀가 나를 보더니 말했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걸고 있다. 오른쪽 붉은 눈이 요사스럽게 빛난다. 왼쪽 눈은 볼 수 없었다. 금발 앞머리가 왼쪽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긴장했다. 금발치파오끈팬티녀의 한계를 가늠할 수 없다. 최소 나와 비슷한 경지를 가진 여자라는 뜻이다.
“……나를 알고 있나?”
“모를 수가 없지. 나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한 건 너잖아? 일단 안으로 들어와.”
그녀가 검을 쥔 손을 까딱였다. 나는 그녀를 경계하면서도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고 내부는 엉망이었다. 무언가를 급히 찾은 흔적으로 보였다.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어. 이 일이 끝나면 만나려고 했거든. 무슨 목적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네. 종남파의 무공을 몰래 훔치러 왔지?”
“기회가 있어서 훔치러 왔다. 그쪽은 혹시 묵지련주인가?”
금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찰녀야. 만나서 반가워 조선제일검 유진. 아니, 섬전도 염구석. 혹시나 해서 묻는데 종남파의 무공을 훔치는 건 천마신교의 뜻은 아니지?”
나찰녀(羅刹女). 그 이름을 되뇐다. 이름이 나찰녀일 리는 없고 별호일 것이다.
‘나무 흔한 별호다.’
이 세계에선 성질이 드세거나 악독한 여자에게 나찰녀라고 한다. 그 이름 그대로 별호가 되는 경우도 흔했다.
‘나찰녀가 여자. 그것도 이런 미녀 일 줄은 몰랐군.’
나찰녀는 허리춤에 걸어 놓은 검집에 쌍검을 집어넣으며 내게 손짓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해.”
나는 널브러진 책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무공, 술법서, 잡서. 전부 가리지 않고 챙긴다. 나찰녀는 적당한 선반에 엉덩이를 기대어 앉아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할 말 있나?”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날 직접 만나보기로 했잖아. 그 조건을 만족했으니 넌 이제 우리와 함께하기로 한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묵지련주를 보면 이것저것 따지며 조건을 걸 생각이었는데… 이런 미녀가 묵지련주면 어느 정도 손해를 봐도 괜찮았다.
“묵지련의 지원이 만족스러운 이상 내 칼이 묵지련에 향할 일은 없을 거다.”
“시원해서 좋네. 그래. 남자는 너처럼 시원스러워야지.”
“묵지련이 진짜 원하는 건 뭐지?”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아? 천유운. 그 씹어먹을 새끼를 죽이는 거야. 네가 그 새끼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어줘.”
“터무니없는 걸 요구하는군. 천유운은 소천마다. 머리도 좋고 조심성도 많다. 그런 놈을 어떻게 죽이라는 거지? 그리고 죽인 뒤에도 문제다.”
나찰녀가 쿡쿡 웃는다. 공간함에 책을 담고 있던 나는 미간을 좁혔다.
“뭐가 웃기지?”
“예상은 했지만 천유운에 대한 충성심이 없구나?”
“문제 있나?”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야. 판은 내가, 묵지련이 깔 거야. 넌 깔린 판에서 천유운을 죽이면 돼.”
“천유운에 대해서 모르는군. 놈은 기습 따위에 쉽게 당하지 않는다.”
“아니. 내가 너보다 천유운을 더 잘 알아. 천유운은 경계심이 많지만, 유독 특정한 인물에게는 경계심이 옅어. 이해할 수 없지만, 근거 없이 신뢰하는 거야. 특정한 인물 중 하나가 너야, 염구석.”
특정한 인물들이 누군지 알 것 같다.
천유운은 나를 신뢰하는 게 아니다. 원작에 나온 등장인물. 즉, 염구석을 신뢰하는 거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제갈모순이나 연예하도 신뢰할 거다.
내심 감탄했다. 나찰녀는 천유운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었다.
“왜 천유운을 죽이려는 거지?”
“천유운이 먼저 계약을 위반했어. 설마 이중 계약을 하고 있었을 줄은…. 천유운은 나를 죽이려 해. 계약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고 묵지련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죽기 전에 죽인다?”
“내가 당하고만 사는 성격이 아니야. 그놈 때문에 몇 년 동안 준비하고 있던 계획이 박살 났어. 그러니 똑같이 천유운, 그놈 계획도 박살 내줘야지.”
“내가 천유운의 계획과 상관있나?”
“천유운은 널 칼로 쓸 계획이야. 적을 죽이는 칼로. 그 칼을 내가 먼저 쓴다면? 천유운의 계획은 박살 나는 거지. 동시에 놈의 멱도 따버릴 수 있고.”
나찰녀가 낄낄 웃었다. 이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금발과 풍만한 젖가슴이 흔들린다.
“위험한 일을 꾸미고 있군.”
“겁먹었어? 하기 싫다는 말은 아니지?”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비해 대가가 적다.”
“흐음. 뭘 원하는데?”
“널 원한다.”
“킥. 보고서 대로네. 아주 호색해. 근데 어쩌나? 난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어. 남편과 자식을 배신할 생각은 추호도 없고 말이야.”
하룻밤이면 충분하다. 라고 말하려다가 관뒀다. 나찰녀의 붉은 눈이 흉악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말을 꺼냈다간 선을 넘는 게 된다. 나찰녀는 그 이름처럼 성질머리가 사나운 것 같으니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건 관두기로 한다.
“천마신공(天魔神功)을 원한다.”
“호오? 그거 교주랑 소교주만 익힐 수 있는 신공이잖아. 그걸 익히고 싶다고?”
“그래. 천마신교의 주인이 되려면 천마신공을 익혀야 하니까.”
“천마신공을 익힌다? 목적이 아주 거창하네. 너 같은 놈은 싫지 않아.”
“천마신공을 줄 수 있나?”
“나한테 천마신공은 없어. 다만, 아예 손에 넣지 못하는 건 아니야. 천마신공은 마교 어딘가,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겨져 있어. 거기를 찾아가서 익히면 돼. 실제로 천마신공을 찾은 익힌 놈들이 있다고 하고…. 문제는 천마신공이 익힐 수 있다고 해서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라는 거지.”
“안다. 핏줄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더군.”
“말로는 그렇지. 인간의 핏줄이야 다 거기서 거기니까. 실제로는 다른 비밀이 숨어 있을 거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천마신공이 숨겨져 있는 장소. 그 장소를 알려줘라.”
“정확한 장소는 나도 몰라. 그래도 짐작 가는 장소는 몇 고 있으니 걱정마. 내가 널 천마로 만들어 줄게. 물론 공짜는 아니야.”
“하.”
헛웃음이 나왔다.
나를 천마로 만들어 준다고?
“나는 이미 천마다.”
“아, 그러셔? 그럼 천마 씨. 챙길 건 다 챙긴 것 같은데 나 좀 도와줘.”
나찰녀가 내게 무언가를 던졌다. 일단 받고 확인했다. 복면이었다.
“뭘 도와달라는 거지?”
“여기 종남파에 흥미로운 게 있거든.”
나찰녀가 등 뒤로 손을 넣었다가 뺐다. 그녀의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 책은 뭐지?”
표지가 보였다. 처음 보는 언어였다. 한자도 뭣도 아니었다.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되는 것.”
화르륵.
책이 불타오른다.
평범한 불꽃이 아닌 삼매진화(三昧眞火)다. 책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재가 되었다. 저게 무슨 책일까. 짐작은 간다. 아마 미령이 말하는 마술이 적힌 책이 아닐까.
“그리고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되는 걸 가져갈 생각이야. 도와줘. 나 혼자 해도 상관없긴 한데, 네가 도와주면 더 쉬워지겠지.”
“덤으로 내 실력도 확인해보고 싶은 모양이군.”
“겸사겸사?”
“…….”
나는 복면을 썼다. 챙길 건 다 챙겼으니 그녀를 도와줘도 상관없었다.
“넌 복면을 안 쓰나?”
“필요 없어.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앞으로도 양지에서 활동할 생각은 없으니까.”
나찰녀가 문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따라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