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1화 > 1521. 광명승천도
나찰녀가 향하는 곳은 미령이 가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한 곳이었다. 미령이 위험한 걸 봉인해둔 느낌이라 말한 곳.
나찰녀가 거침없이 나아가는 걸 보니 목적은 그곳인 게 틀림없었다.
“이 습격. 천유운은 알고 있나?”
앞서가는 나찰녀에게 물었다.
“아니. 이건 내 독단이야. 그놈 성격상 이런 일을 허락할 리 없어.”
“이런 일을 벌여도 되는 건가? 묵지련에는 천유운의 영항력이 남아 있을 텐데?”
“성공하기만 하면 돼. 성공하면 그놈도 내게 뭐라 하지 못할걸?”
너무 대놓고 움직였을까. 지나가던 종남파 무인이 우리를 보며 달려들었다. 금발의 미녀와 복면을 쓴 남자. 누가 봐도 수상쩍다.
“너희는 누구냐?! 당장 거기서 멈춰….”
나찰녀가 쌍검을 휘둘렀다. 두 개의 검기가 종남파 무인을 향해 빛살처럼 뻗어나갔다. 하나는 무인의 목을 베고, 다른 하나는 무인의 가슴팍을 베었다.
종남파 무인의 얼굴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일그러졌다.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대단하군. 무슨 검술이지?”
“딱히 대단한 검술은 아니야.”
그녀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보통 무인들과 달랐다.
보통 무인들에게 검술을 물어보면 엄청난 자부심과 함께 자신의 검술에 관해 설명한다. 무인들은 그 어느 것보다 자신의 무공이 칭찬받는 걸 좋아했다.
위험한 장소에 도착했다.
나찰녀가 쌍검을 나란히 앞으로 뻗었다.
우우우웅.
두 개의 쌍검이 공명한다. 내력이 움직인 느낌이 아니다.
‘법기군. 묵지련주 쯤 되면 평범한 무기를 가졌을 리 없지. 근데 뭐 하는 거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키이이이잉.
공명하던 두 검에서 은빛의 바람이 일어났다. 작은 바람이었으나 평범하지 않았다. 바람이 은빛인 것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은빛의 바람이 천천히 움직인다.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화롭고 신비해 보이는 은빛의 바람이 지나간 공간은 구겨진 휴지처럼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은빛 바람이 결계를 박살 낸다. 참으로 무식하면서도 우아한 광경이었다.
“그건 뭐지?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결계를 부술 수도 있나?”
“별거 아니야. 결계를 박살 내기 위한 잔재주일 뿐이야. 공격용으로 써먹기엔 너무 느리니까.”
확실히 은빛 바람은 너무 느리긴 했다. 찰나를 쓰지 않고도 쉽게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그 위력은 위험했다. 그 결과물이 내 눈앞에 있었다. 결계는 완전히 박살 나서 걸레짝이 되어 사라졌다. 결계가 숨기고 있던 건물도 드러났다.
건물 자체는 평범했다.
“…저 건물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평범하지 않군. 굉장히 이질적인 기운이다.”
“기분 좋게 느껴지지는 않고?”
“굳이 좋냐, 나쁘냐로 따지자면… 기분 나쁜 기운이다. 웬만하면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다.”
“흐음. 그래? 너도 마교인은 맞구나.”
나찰녀가 건물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쌍검을 휘두른다.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검풍이 일어나며 건물을 베어 가른다. 건물이 무너지고 내부에 있던 게 드러났다.
하얀 거인이 있었다. 상반신만 남아 있는데 5m에 달했다. 하얀 거인은 사슬에 묶여 움직이지 못했다. 살펴보면 살점 여기저기 베인 흔적이 있었다.
“이건 뭐지? 요괴라고 하기엔 요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군.”
“천병(天兵)이야.”
“천병?”
“선계의 인공 병사야. 생물이지만 자아는 존재하지 않아. 살아있는 인형이자 병기지.”
“그걸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선계의 하사품이야. 말 잘 듣는 똥개에게 간식거리를 던져 준 거야.”
“간식거리?”
“잘 봐. 여기저기 베인 살점이 보이지? 천병의 살점 자체가 영약이나 다를 바 없어. 인간이 조금씩 뜯어 먹으면 육체가 강해지고 내력도 모이지. 수명도 조금씩 늘어날걸? 조금씩 재생까지 되니까 얼마나 좋은 영약이겠어?”
사실 천병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원작 광명승천도의 후반부에 나오는 생물 병기다. 물론 자주 나오지는 않는다.
“네가 먹어도 큰 효과는 없을 거야.”
“딱히 먹을 생각도 없다. 넌 이걸 훔치러 왔나?”
“맞아. 종남파가 가지기엔 아까운 물건이니까. 일단 살아 있으니 공간함에는 들어가지 않을 거야. 네가 이걸 챙겨. 네 실력을 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네. 난….”
거대한 기운이 느껴진다. 나와 나찰녀의 고개가 옆으로 획 돌아갔다. 저 하늘에서 한 노인이 도포를 휘날리며 날아와 지상에 착지했다. 펄럭이는 소매 사이로 꼿꼿이 선 검이 반짝 빛난다.
“이 늙은이를 상대할 테니까.”
나찰녀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너희는 누구길래 이 소란을 벌이는가?”
노인은 차분하게 말했다. 허나 그 두 눈은 형형하다 못해 흉흉하다.
“혜일진인(慧日眞人). 종남파의 전대 장문인이 나설 줄이야.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야?”
나찰녀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도둑년아,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너희는 종남의 보물을 강탈하려 하였노라.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니라.”
혜일진인이 검을 휘두른다. 우에서 좌로.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봤다면 가벼운 횡베기처럼 보일 것이다. 허나, 나는 혜일진인의 검에서 태산같이 거대한 힘을 느꼈다.
‘이건 피해야 한다.’
내 다리가 움직이기 전에 나찰녀가 먼저 반응했다. 쌍검을 교차하고 혜일진인의 태산 같은 검격을 막아낸다.
“저거 가지고 여기서 벗어나!”
“알겠다!”
천병의 팔을 잡고 뛰어서 장소에서 벗어났다. 천병의 상체가 질질 끌렸다.
“놓칠 것 같으냐!”
혜일진인이 버럭 소리치며 보법을 밟는다. 동시에 나찰녀도 보법을 밟으며 혜일진인에게 따라붙었다. 혜일진인은 나찰녀의 매서운 쌍검술을 무시하지 못했다.
채앵! 챙!
그들의 검이 교차한다. 그 여파로 주변의 공기가 흔들리며 사방에 퍼진다.
‘아직은 서로 간만 보는 수준이군.’
이들은 삼정(三頂)의 경지에 이른 절대고수들이었다. 이들이 진심으로 주변 일대가 쑥대밭이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휘말리기 전에 벗어나는게 최선이다.
‘나찰녀는 자신 있어 보이니 괜찮겠지. 숨기고 있는 실력도 있는 듯하고.’
경공을 발휘하기 전에 잠깐 고민했다.
뇌천류는 너무 눈에 띈다. 나는 조선제일검으로 활동하며 뇌천류를 주로 사용했다.
‘뇌천류를 쓰면 종남파가 내 정체를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니 다른 무공을 써야 했다. 복면을 썼으니 딱 좋은 무공이 있었다. 나찰녀와는 한배를 타기로 했으니 큰 문제도 없을 것이다.
“…….”
조용히 호흡을 들이켰다.
쿠웅.
심장 소리가 머리를 때린다. 동시에 잠들어 있던 마기들이 꾸물거리며 활성화를 시작했다. 마기가 기혈을 내달린다. 육체의 힘이 더 강성해지는 걸 느꼈다.
나는 끓어오르는 마기는 오른발에 담아 지면을 밟았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공간을 지배하고, 공간을 접는다.
신체가 고무줄처럼 늘어나다가 줄어드는 감각이 들었다가 사라졌다.
공간을 뛰어넘는 워프. 달리 축지법이라 부를 수 있는 보법이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지금 내 수준으로는 기껏해야 10m 정도 이동하는 게 전부군.’
막대한 집중력과 마기를 소모한다. 급할 때가 아니면 차라리 그냥 뛰는 게 더 낫다.
“네 이놈!!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 천마신공이구나! 천마신교가 감히 종남파를 공격하였는가!!”
뒤에서 혜일진인이 버럭 소리친다.
‘천마신공을 바로 알아본다고?’
잠깐 의아했다가 천마신공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천마신공을 제대로 알고 있으면 바로 구분할 텐데.’
종남파의 혜일진인이다. 마교인도 아니니 잘 모르는 게 당연했다. 어쩌다 보니 혜일진인에게 어마어마한 착각을 심어둔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오해를 푼답시고 대화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도망가는 것에 집중했다.
“종남파의 무인들이여! 놈을 죽여라! 천병은 절대로 빼앗겨선 안 된다! 천년 종남의 기초가 될 것이다!”
혜일진인의 목소리가 종남파 전체에 쩔어쩌렁 울렸다. 그리고 곳곳에서 종남파 무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태상문주시여! 제게 맡겨주십시오! 이 벽오가 침입자를 척결하겠나이다!”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우연히 내 가까이 있는 무인이었다. 놈은 보란 듯이 소리치며 검을 휘두른다.
“받아라, 악적이여! 이것이 종남의 하절이검(下切利劍)이다!”
“놀고 있네.”
천마신공(天魔神功) 용권(竜拳).
찔러 들어오는 검을 향해 주먹을 내지른다. 검과 주먹이 마주치는 순간, 주먹에 압축된 천마기가 직선으로 분출된다. 검은 버티지 못하고 박살 났다. 용권은 멈추지 않았다. 무인의 심장을 꿰뚫고 계속해서 뒤로 뻗어나갔다.
쓰러지는 무인의 시체를 확인하지도 않고 앞으로 질주했다.
나를 죽이기 위해 종남파의 무인들이 몰려왔다. 일대제자니, 이대제자니 달려온다. 나름 합격진을 펼치며 공격해오는데 내 눈에는 같잖을 뿐이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검(天魔劍).
달려드는 무인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그래도 적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합격진에 집중하며 한꺼번에 달려든다. 그들의 합격진에 공기의 흐름이 바뀐다. 나는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것을 느꼈다.
‘고수를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군. 여유 공간이 모두 제압당했다.’
마치 그물처럼 서서히 조여온다. 이 그물에 완전히 걸리면 붙잡힌 물고기 꼴이 되겠지.
‘그 전에 그물을 찢어야지.’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파형(波形).
진각을 밟는다. 천마군림보의 기운이 파동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파동에 닿은 적들의 균형이 무너진다. 적들은 피를 토하거나 코피를 쏟아냈다. 기공에 의한 내상이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검(天魔劍) 회천(回天).
마기를 회전시켜 칼에 담았다. 나는 빙글빙글 돌면서 칼을 휘둘렀다. 회 오리 바람이 일어나고 적들을 휩쓸었다. 적들은 믹서기에 갈린 것마냥 한 줌의 핏물이 되어 사라졌다.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또 다른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검을 쥔 장년인이었다. 반백의 머리카락을 깔끔히 정리한 그는 얼굴에 주름 하나 없는 남성이었다.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과는 대조적이었다.
“반백의 머리와 긴 수염. 그리고 젊은 얼굴. 종남파의 장문인인 오영검(五永劍) 송직인가?”
“그러는 너는 누구지?”
“천마(天魔)다.”
“웃기는 소리. 당대의 천마는 신교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들었다. 네놈이 정녕 천마라면 복면을 벗고 얼굴을 드러내라.”
“네가 뭐라고 하든 내가 천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흑염마룡(黑炎魔龍).
화르륵!
검은 불꽃이 칼날에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