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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6화 > 1526. 광명승천도 (1,306/2,000)

< 1526화 > 1526. 광명승천도

나는 적멸대주에게 말했던 것을 고스란히 천유운에게 말했다.

물론 일부는 바꿨다.

“도시를 습격한 요괴들. 그것들은 묵지련의 수작이었다.”

“역시 그렇군. 종남파의 태상문주를 죽인 금발 머리의 여자를 봤나?”

“아니. 나는 종남시에 있었기에 종남파에 일어난 일은 모른다. 그 여자가 태상문주를 죽이다니 놀랍군. 넌 그 여자가 누군지 아나?”

천유운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묵지련의 주인이다. 나찰녀. 내가 묵지련을 얻으려면 반드시 죽여야 할 여자다.”

“…묵지련을 얻는다고?”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하지. 내가 부탁했던 일은 어떻게 됐나?”

“묵지련의 종남산 지부라면 종남산을 떠나기 전에 확인했다. 대담하게도 종남시 아래에 땅굴을 팠더군. 거기에 결계도 없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뭐가 있었지?”

“시체밖에 없었다.”

“…시체?”

“사람 같은 요괴 시체. 벌레 같은 요괴 시체. 요괴 같은 사람 시체. 모두 검에 베여 죽은 시체들이었다.”

천유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찰녀가 지부를 정리한 거군. 이 일에 대해 누가 알고 있지? 적멸대주에게 말했나?”

“천유운. 내게도 눈치가 있다. 묵지련에 관해선 함구했다.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모른다.”

“잘했다.”

“…혹시 나를 죽여 입막음이라도 할 생각인가?”

“재미없는 농담이군.”

천유운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안다. 이놈은 수틀리면 동료도 버릴 수 있는 놈이다.

“염구석. 종남에서 조선제일검이라 칭했다고 들었다. 무슨 뜻으로 그 별호를 쓴 거지?”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당황했다. 깜빡하고 있었는데 천유운은 빙의자였다. 그것도 한국인 빙의자.

“별 뜻은 없다. 조선파라는 문파 출신의 검사라는 뜻이다. 대충 지어낸 별호지.”

“조선파? 그런 문파도 있었나?”

“일인문파라더군. 지나가다가 들었다.”

“그런가.”

납득한 느낌이 아니었다. 아마도 따로 조사해볼 것 같았다.

‘나찰녀에게 말해서 조선파라는 문파를 만들고 정보를 조작해 놔야겠군. 완전히 속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전쟁이 코앞이니 천유운도 깊게 파고들지는 못하겠지.’

나는 대화 주제를 돌릴 겸 그에게 말했다.

“천유운. 묵지련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묵지련의 존재를 위에 보고할 건가?”

천유운이 묵지련에 대해 천마신교에 보고하는 순간, 묵지련이란 조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나찰녀도 천마신교가 파견한 무력 부대에 척살 당할 테지.

“하지 않는다. 그건 최악의 선택이다.”

천유운이 단호하게 말했다.

묵지련의 시작은 천유운이었다. 나찰녀와 어쩌다 만났는지 몰라도 그 사실은 확실했다. 묵지련은 음지에서 무럭무럭 컸고, 지금은 음지에서도 손에 꼽히는 조직이 되었다. 묵지련에는 지금도 천유운의 영향력이 크게 남아 있다. 묵지련이 망하면 연관된 천유운도 곤란해진다.

“함정을 파야겠지. 나찰녀를 죽이고 묵지련을 온전히 손에 넣는다. 전쟁 도중이 좋겠군. 그래야 나찰녀도 방심할 테니….”

천유운이 중얼거렸다. 내 앞에서 이러는 건 그가 나를 믿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알고 있는 원작의 염구석을 믿고 있는 거다. 원작의 염구석은 신의와 충성을 끝까지 지킨 조연이니까.

“내가 뭘 해야 하지?”

천유운은 잠깐 생각에 잠긴 뒤에 말했다.

“너를 내 추천으로 묵지련에 넣을 생각이다.”

“묵지련에? 나는 적멸대다. 전쟁이 코앞까지 와 있다. 묵지련에 들어갈 여유는 없다.”

“여유는 있다. 내부 정리가 단숨에 끝나는 건 아니니까. 너는 묵지련에 들어가 능력을 보이고 최대한 빨리 신임을 얻어라. 내가 밀어줄 테니 어렵지는 않겠지.”

“나찰녀가 날 경계할 거다.”

“그 여자는 능력 있는 자를 보면 이용하려고 한다. 역으로 널 포섭하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그때 모르는 척 넘어가라. 나에 대한 정보를 나찰녀에게 넘긴다면 약간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나중에. 때가 되면 나는 나찰녀를 부를 것이다. 그때 네 도움이 필요하다.”

“알겠다.”

음모가 소용돌이친다.

그리고 나는 음모의 중심에 있었다.

***

염마대의 감사가 끝났다.

감사에 어렵지 않게 통과된 나는 바로 임무를 받아 천마신교를 떠났다.

원래 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개인 임무가 떨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천유운이 손을 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천마신교에서 50일 거리에 있는 도시 소용시(疏溶市).

강을 끼고 있는 소용시는 화려한 도시였다. 강을 끼고 있던 덕분에 다른 도시와의 무역으로 빠르게 부를 축적한 도시다.

도시에 들어섰다. 누구도 나를 잡지 않았다. 소용시는 여행객을 환영하는 도시였다. 천마신교의 영역에 있으면서도, 천마신교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개방적이다.

‘너무 개방적인 게 문제지. 첩자가 스며들기 좋다.’

내 임무는 3가지였다.

첫째는 이곳에 있는 천마신교의 지부를 숙청하는 것. 이곳 지부는 부정부패가 너무 심했다. 적멸대원인 내가 직접 이 도시에 올 정도로.

둘째는 도시에 숨어 있는 첩자를 찾아내 제거하는 것. 내 공간함에는 염마대가 준 명단이 있었다. 명단에 있는 놈들을 찾아내 죽이면 된다.

셋째는 도시 봉쇄다. 새로운 도시 관리자가 올 때까지 내가 도시를 관리한다.

나는 우선 도시의 거리를 걷다가 멈칫했다. 화려한 도시에 걸맞지 않은 존재들이 있었다.

거지였다.

거적때기나 다를 바 없는 옷, 산발한 머리카락, 시커먼 때가 묻은 피부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악취. 어떤 도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거지였다. 거지는 벽에 기대어 의욕 없이 앉아 있었다.

거지는 젊었다. 기껏해야 20대 후반 정도로 보인다. 사지도 멀쩡하다. 그런데도 거지로서 생활하고 있다.

내가 지긋이 보고 있자, 그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빌었다.

“한 푼만… 한 푼만 주십시오, 대인…. 너무 배가 고픕니다….”

다 죽어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시선을 좀 더 내리면 구걸용 그릇이 보인다. 찌그러지고 녹슨 그릇 안에는 동전 3개가 들어가 있었다.

나는 그릇을 발로 찼다.

그릇이 땅바닥을 굴러 저 멀리 날아갔다. 동전 3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

“…….”

망연자실한 표정의 거지가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거지를 내려다봤다.

“대, 대인 제가 무언가 잘못했습니까…?”

“…….”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를! 이렇게 빌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릴 테니 용서해 주십시오!”

거지가 머리를 땅에 박는다. 정수리가 보인다. 작고 하얀 벌레가 검은 머리 사이를 돌아다녔다. 거지의 절은 짜증을 유발했다.

거지는 몇 번이나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내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눈치를 보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 3개와 낡아빠진 그릇을 챙긴다. 나는 거지의 뒤를 따라갔다.

거리의 한복판에 온 거지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내게 손가락질한다.

“수상한 놈이오! 수상한 놈이 나를 계속 따라오고 있소! 나를 구해주시오! 제발!”

제법 머리를 썼다.

대낮, 그것도 수백 명이 지나가는 대로에서 소란을 벌인다. 보통 사람이라면 시선이 무서워서라도 도망칠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허파에 헛바람이 가득 찬 협객들이 나서서 구해주려고 하겠지. 시선이 모인다는 건 명성이 얻을 기회라는 말이기도 하니까.

나는 소리치는 거지에게 쪼인트를 날렸다.

빠각!

경쾌한 소리와 함께 거지의 오른쪽 종아리가 무서진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거지가 바닥에 쓰러져 비명을 지른다.

나는 거지의 왼쪽 무릎을 발로 밟았다. 힘을 주자 손쉽게 부서졌다. 다음은 오른쪽 팔과 왼쪽 팔.

“살려줘! 흐윽! 살려주십시오! 누가, 누가 제발…! 팔과 다리가 안 움직입니다! 살려, 살려주십시오!”

“…….”

그러나 도와주는 이는 없다.

지켜보는 이들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번들번들한 눈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물론 사람 중에는 제정신이 박힌 자들이 몇 있었다.

“저, 저 사람 도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자네. 아직 인생을 덜 살았군. 저 흑색장포를 입은 남자의 허리춤에 걸린 칼이 안 보이나? 저건 무림의 일이야. 무림의 일은 무림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그래도 천마신교의 병사들에게 알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자네가 알리던가. 물론 그 뒷감당도 자네가 하고.”

“…….”

청년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거지를 지켜봤다. 꿈틀꿈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최대한 내게서 벗어나려고 한다. 놈의 얼굴은 콧물과 눈물투성이였다.

“거지가 아니라 벌레 같군.”

거지의 등위에 발을 올린다. 거지가 기겁한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게 왜 이러십니까, 대인!”

“네가 개방 거지라는 걸 알고 있다. 분타주급 거지가 있겠지. 그놈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라. 그럼 편하게 죽여주마.”

“저, 저는 개방 소속이 아닙니다! 개방의 거지들이 가진다는 매듭도 없습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개방 소속의 거지를 무결개(無結丐)라고 하더군.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았나?”

개방의 거지들은 허리에 매듭을 건다. 무공을 막 익힌 거지는 매듭 하나의 일결개(一結丐), 분타주급은 매듭 다섯, 장로급은 매듭 일곱, 방주는 매듭 아홉으로 유명하다.

“정말 아닙니다! 저는 개방과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쉽게 죽기 싫다는 건가. 개방의 거지들은 대단하군. 분근착골이 뭔지 겪게 해주마.”

“아니야!! 아니라고!!”

나는 손가락 끝에 적당한 내력을 담아 튕겼다. 내력이 점혈을 콕콕 누른다.

퍽!

거지의 어깨가 폭발했다. 피와 살, 뼛조각이 튀었다.

“…쯧.”

힘 조절에 실패했다. 탄지공으로 점혈한 경험이 적어서 일어난 실수였다. 거지는 쇼크로 죽었다.

공간함에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주목.”

내력을 담아 나직하게 말했다. 긴장한 시선이 내게 모였다.

나는 젊은 청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까 거지를 도와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던 청년이었다. 지목당한 청년 주위의 사람들은 다급히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청년은 게 다리 댄스를 추는 것처럼 다리를 떨었다.

“천마신교 지부에 가서 전해라. 적멸대 6조 섬전도 염구석이 왔으니, 지금 당장 도시를 봉쇄하라고.”

“아, 그….”

“당장 뛰어가라.”

“네, 넵!”

청년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주위 사람들을 지켜봤다. 그들은 멀어지는 청년의 등을 부러운 듯 쳐다봤다.

공간함에서 돈 자루를 꺼냈다. 돈 자루를 열자 은자가 쏟아졌다.

“이 도시에 숨어 있는 거지새끼들을 잡아 와라. 한 마리당 은 50냥을 주마.”

참고로 일반인의 한 달 수입이 은 5냥이다. 은 50냥이다. 10개월의 돈을 거지를 잡아 오는 것으로 벌 수 있다.

사람들의 눈에 탐욕이 이글거린다. 조삼모사라는 사자성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놈들은 눈앞에 쌓인 돈에 정신이 팔렸다.

“여기! 여기 거지를 잡았소! 근처에 서성이고 있더이다!”

술 냄새를 물씬 풍기는 털보가 거지의 뒷덜미를 잡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털보는 쓰레기 수준이지만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지의 다리를 밟으며 말했다.

“잘했다. 네가 처음으로 거지를 잡아 왔으니 추가로 50냥을 더 주마. 100냥을 가져가라!”

“정말이오?!”

“알아서 가져가라.”

“정확하게 100냥만 가져가겠소! 고맙소 대인!”

털보는 후다닥 돈을 챙겼다. 털보의 입에는 미소가 걸린다.

“이 돈이면 빚을 갚고도 남겠어…. 그, 근데 대인. 또 거지를 잡아 와도 돈을 주는 거요?”

“준다. 한 마리당 50냥이다. 열 마리를 잡아 오면 500냥이다.”

“하하하! 재신이! 재신이 내게 강림했구나! 잠시만 기다리시오! 거지를 잡아다 드리겠소!”

털보가 껄껄 웃으며 어딘가로 달려갔다. 상황을 지켜보던 몇몇 사람들이 눈치를 보더니 뛰어간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거지의 팔을 짓밟으며 심문을 이어갔다.

“개방의 정보를 뱉어라. 이 도시에 있는 개방 거지들은 총 몇 마리지? 분타주는 어디에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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