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8화 > 1528. 광명승천도
소용시(疏溶市) 봉쇄 일주일째.
나는 마지막 놈들을 앞에 두었다. 천마신교 소용시 지부장과 그 부하들이다. 그들은 내 앞에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살려주십시오, 대협! 저희는 신교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지부장이 간절함을 담아 소리쳤다. 나는 칼을 매만지며 그를 내려다봤다. 그가 어떻게 목숨을 구걸할지 궁금했다.
“신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봐라, 여기 명단에 너희 이름이 적혀 있다.”
나는 그에게 직접 명단을 보여줬다. 명단 마지막에 있는 12개의 이름. 지부장과 그 부하들의 이름이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신교에 정식으로 감사를 요청하겠습니다! 감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걸 내려놓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자비를…!”
“감사는 이미 끝났다. 신교는 너희가 뇌물을 받아먹은 정황을 포착했다. 돈을 받고 무역선 검사를 대충 하거나, 일부 들여와선 안 되는 물건들을 들여보내 주었더군.”
“그건… 전통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있었던 전통이자 의례입니다!”
“나를 병신으로 보나?”
살기를 뿌리자 지부장이 고개를 획 숙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부장에게 다가갔다. 칼날에 검기가 서린다.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맞습니다! 지부장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저희는 죄가 없습니다!!”
지부장의 부하들이 두려움에 질려 소리쳤다.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였다. 뭔가 재밌는 변명이라도 할 줄 알고 잠깐 기대했던 내가 병신이었다. 나는 지부장의 부하들을 한 명, 한 명목을 베어 죽였다.
서걱. 서걱. 서걱.
칼을 휘두를 때마다 목이 떨어진다. 그 어떤 망나니도 이렇게 쉽게 사람의 목을 치지는 못하리라.
지부장의 목을 치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지부장이 고개를 들더니 두 눈을 희번득거렸다.
“나를 지금 여기서 죽이면 후회할 겁니다!”
“후회?”
약간의 흥미가 생겼다.
“제 뒤에 누가 계신 줄 아십니까? 삼장로! 검마 어르신이 계십니다! 저를 죽이면 검마 어르신이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나는 주춤거리며 칼을 납도 했다.
“검마님과 무슨 관계냐?”
“저는 검마님의 부하입니다. 분기마다 돈과 정보를 바치고 있습니다.”
“정보?”
“소용시는 워낙 사람이 많이 지나가는 곳이다 보니 모이니 정보가 많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정리하여 검마님께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바로 검마님의 정보원 중 한 명입니다!”
지부장이 당당하게 말했다. 연기 실력이 제법 뛰어났다. 현대에서 배우일을 했다면 어느 정도 이름 있는 조연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지랄한다.”
칼이 휘둘렀다. 놈의 양쪽 귀가 떨어진다.
“검마가 네 뒷배였다면, 네 이름은 명단에 처음부터 없었겠지.”
그리고 이 지경까지 오기 전에 처음부터 뒷배를 믿고 나댔을 것이다.
“개소리를 지껄인 벌로 넌 천천히 삶아 죽여주마.”
“아아… 으아아아아악!”
지부장이 튀어 오른다. 그의 손에서 마기가 흘러나온다. 무리하게 내력을 운용하면서 한순간 마기가 폭발하며 강력한 힘으로 변했다. 물론 그래봤자다. 지부장은 출지 5단. 오기 10단인 나를 죽었다 깨어나도 이기지 못한다.
가볍게 주먹으로 응대했다. 놈의 손이 부서지고 축 늘어졌다. 나는 점혈로 지부장을 제압했다.
‘이 새끼를 죽이면 해야 할 일은 끝났다. 나머지는 다음 관리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될 일.’
앞으로 나흘.
놀고먹으면서 기다리면 된다.
나는 지부장을 처형한 뒤에 단골 기루로 향했다. 그러다 강을 지나는 대형 배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배가 움직인다고? 지금 봉쇄 상태일 텐데?’
분명 시민들에게 경고했었다. 도시를 나가려고 한다면 전부 죽여버리겠다고. 도시 내의 거지를 죄다 잡아 죽인 이후로 시민들은 협조적으로 행동했다.
‘반동분자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저 배는 상선이다. 상단 중 하나가 내 말을 무시하고 움직였다. 도망치려고? 왜?’
머리가 돌아간다. 배의 위에 있는 깃발에 적힌 상단의 이름은 오근 상단. 처음 들어본다. 유명한 상단이 아니다.
‘난 거지랑 첩자 외에는 건들지 않았다. 상단이 굳이 내 통제에 벗어날 이유는 없다. 며칠만 있으면 난 떠나니까. 그럼 왜….’
불현듯 깨달았다. 놈들은 명단에 없는 첩자들이다. 내가 첩자들을 찾아내 처형하고 있으니 자신들도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아 씨.’
짜증이 났다.
여기서 내가 놈들을 놓치면 천마신교는 날 무능한 놈으로 평가할 것이다. 위로 올라 가야 하는 나는 좋은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저 배를 놓쳐선 안 된다.
[가속을 사용합니다. 10분 동안 유지됩니다. 남은 스택: 6]
배를 향해 뛰었다.
무작정 뛰었다. 뇌천류의 뇌음보나 천마신공의 천마군림보는 쓰지 않았다. 보는 눈이 많았다. 여긴 천마신교의 영역인 만큼 철저하게 섬전도 염구석인 척 행세할 필요가 있었다.
강물을 밟는다. 발은 빠지지 않았다. 땅 위를 뛰듯이 강물 위를 뛰었다.
등평도수.
물 위를 걷는다는 경공술의 경지 중 하나. 오기의 경지에 오르면 등평도수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다만, 내력 소모가 크기에 고수들은 굳이 등평도수를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등평도수를 사용하는 게 아니었다. 경공술이 없어도 [물의 축복] 스킬 덕분에 물 위를 뛰어다닐 수 있다.
‘거의 따라잡았다!’
갑판 위에 누군가가 섰다. 그는 활을 꺼내 쥐더니 화살을 내게 쏘기 시작했다. 내력이 담긴 화살은 총알 이상의 속도로 쇄도한다.
나는 발도하며 화살을 쳐냈다. 상선과 거리가 가까워진다. 갑판 위의 궁수는 연신 화살을 쏘아냈다. 동시에 두 발을 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연사력이다.
‘하지만 보인다.’
보이니 쳐낼 수 있었다.
칼을 한 번 휘두르니 3개의 화살이 튕겨 나갔다. 놈이 쏘아내는 화살은 내 몸에 닿을 수 없었다. 놈이 전투 방식을 바꿨다. 연사를 포기하고 화살 한 발에 힘을 집중한다.
활에 걸린 화살촉이 파랗게 빛난다. 기운이 응축되어 강기를 이루었다.
‘강기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다. 불안정하군. 화살 한 발에 모든 걸 쏟아부은 느낌이야.’
두 호흡을 집중한 화살이 쏘아졌다.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칼끝과 화살이 부딪치는 순간, 손목을 비틀었다. 화살이 회전하며 위로 튕겨 나갔다. 궁수가 한 발의 화살을 쏘았다. 내가 아니라 튕겨 나간 화살에.
튕겨 나간 화살이 방향이 바뀌어 내 등을 노린다.
‘오기의 경지에도 못 오른 놈이 이런 기예를 펼치다니. 재능있는 놈이군.’
찰나가 없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르겠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10초 동안 천재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등을 뒤로 돌렸다. 발이 강의 표면과 마찰하며 거대한 물보라가 위로 튕겼다. 나는 칼을 세워 앞으로 내밀었다. 화살과 부딪친다. 그 충격파가 몸을 완전히 휩쓸고 지나가기 전에 내력을 움직인다.
‘약간의 내력 조작이면 충분하다.’
충격파를 역으로 이용해 추진력으로 삼는다. 내 몸은 로켓처럼 뒤로 날아가 상선을 지나치려고 한다. 허리를 비틀어 제비 돌기를 하며 추진력을 털어내고 갑판에 떨어졌다. 화살을 쏘았던 남자가 경악에 찬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보아하니 무리한 공격으로 인해 내상을 입은 모양이다.
“섬전도다!!”
“놈은 등평도수의 경공으로 배 위로 올라왔다! 내력이 떨어졌을 거다! 죽여!”
“섬전도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무인들이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나는 숨을 한 번 뱉어내고 칼을 휘둘렀다.
빠르게.
더 빠르게.
파지직.
전류가 튀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서 들린 소리가 아니다. 내 안에서, 뇌천결이 조용히 반응하고 있었다.
칼을 휘두른다. 피가 튀었다. 칼을 휘두른다. 적의 머리가 날아갔다. 나는 또다시 칼을 휘둘렀다.
‘음?’
적을 죽이면서 이변을 느꼈다.
칼이 답답하다. 빠른 것은 맞다. 적들이 내 칼에 대응조차 하지 못하는 게 그 증거다.
‘근데 왜 답답한 거지? 마치 칼에 무언가 걸려 있는 것 같다.’
정작 칼을 보면 걸린 게 없었다. 피가 튀긴 하지만, 핏방울 따위에 걸릴 정도로 내 칼은 약하지 않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더 빨라져야 할 칼은 도리어 느려졌다. 의도한 건 아니다. 칼에 걸리는 무언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러다 보니 칼이 느려진 것이다. 그런데 적들은 느려진 칼마저 피하지 못한다.
‘더 느려져도 되겠군.’
칼에 걸리는 것부터 해결하고 싶어졌다. 칼에 힘을 더 주었다. 팔의 힘만으로 부족하다. 전신을 사용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다. 내력을 터트리듯이 사용했다.
파지지직.
뇌전이 칼날을 타고 흐른다. 강기를 형성하지 않았다. 순수한 기운으로서 칼에 힘을 실어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칼은 빨라지지 않았다. 느려졌다. 느려지고 느려진 끝에 완전히 멈추었다. 당황한 내가 눈을 치뜨는 순간이었다.
[천재의 시간을 종료합니다.]
피분수가 뿜어졌다.
주위에 있던 모든 적들이 토막 나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당황했다. 칼을 휘두른 기억이 없는 적들까지 토막 나 죽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눈앞에 궁수가 있었다. 활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날 향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심즉검(心卽劍)이라니…. 맹주님… 여기 괴물이 있습니다….”
활을 버린 궁수가 화살을 양손에 쥐고 나를 향해 뛰어온다. 선천지기를 폭발시키며 최후의 동귀어진을 시도하는 것이다.
“대충 알겠다.”
심즉검(心卽劍).
심검과는 다르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의 내가 심검(心劍)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즉검이란 그저 심검의 편린에 불과하다.
‘내 팔이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검을 휘두르는 거군.’
마음이란 곧 의지이기도 하다.
칼을 손에 쥐었다.
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궁수는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나는 칼끝을 바라봤다. 피 한 방울이 맺혔다가 뚝 떨어졌다.
쾌검의 극의.
사용하는 나조차 그 움직임을 볼 수 없는 쾌검.
‘꼭 마법 같군.’
비슷한 수준의 고수에게 이게 통할까? 시험해본 건 아니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절대적인 힘이란 없으므로 방심해선 안 된다.
‘다른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앞으로 뇌천류 심즉검이다.’
퓨퓨퓻.
양팔의 혈관이 터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심즉검의 부작용이었다. 내 팔이 심즉검의 속도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현실이나 다른 세계의 내가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