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1화 > 1531. 광명승천도
“도둑놈 새끼처럼 비급과 영단을 훔쳐 달아날 생각이었나? 화산파에는 협과 의가 살아 있다더니… 전부 개소리였군.”
기성오가 발끈했다. 하나밖에 없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 기세는 화산파 장문인이라는 위치에 그냥 올라간 게 아니라는 듯 사뭇 사납다.
“마교놈 답게 아무것도 모르는군. 화산파가 멸문하더라도, 작은 씨앗이 남아 있다면 화산파는 다시 싹을 틔우며 번성할 것이다.”
“네가 그 씨앗이라고? 그런데 어쩌냐. 그 씨앗이 지금 짓밟히게 생겼군.”
칼을 뽑았다. 기성오도 검을 내게 겨눈다. 그의 몸에서 자줏빛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그 유명한 화산파의 자하신공(紫霞神功)이다.
매화향이 났다. 코를 찌르는 매화향은 너무 진해서 오히려 기분 나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물러가라. 너 따위를 상대할 시간은 없다.”
“있어 보이는 척 말해도 네놈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란 건 알고 있다. 앞서 전투를 치르며 체력과 내력을 소모했겠지. 화산파 장문인을 죽이기 좋은 딱 좋은 순간이라 생각하지 않나?”
“어리석은 놈. 기회를 줘도 기어코 걷어차는구나! 지금 내가 지쳐있다고 하더라도 어린 마귀를 처리하지 못할까!”
“어린 마귀?”
“섬전도 염구석! 네놈에 대해선 알고 있다. 적멸대에 들어간 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 나름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으나… 그래봤자 적멸대의 말석. 손속이 잔혹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것은 없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군.”
조소를 머금었다. 기성오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좋다. 기어이 내 검에 바스러지고 싶다면… 지금 죽여주마!”
기성오가 일보를 내디디며 검을 휘두른다. 최속의 경로를 지나며 다가오는 검. 그 한 수만 봐도 기성오가 어중이떠중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는 칼을 세워 기성오의 검을 받았다. 철과 철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기본은 되어 있는 놈이로군.”
카카카칵!
기성오의 검이 내 칼을 훑으며 움직였다. 마찰에 의해 불똥이 튀었다.
불똥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사방으로 퍼져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뭉치기 시작했다.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그것은 투명한 꽃봉오리였다. 내력으로 이루어진 꽃봉오리는 개화하는 동시에 자줏빛으로 물든다.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백환] 세계의 카일을 떠올렸다. 카일도 자하신공을 수련한 매화검수였다. 카일에 대해 연구도 했으니 매화검법과 자하신공에 대해선 좀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카일의 매화검법과 자하신공과는 딴판이군.’
압박감부터가 다르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압도당할 것이다. 거기다 허공에 피어난 매화는 강기 수준의 강도를 자랑하고 있다. 섣불리 닿았다간 뼈도 못 추린다.
‘매화가 움직인다.’
화려하게 움직인다. 저게 죽음의 꽃인 걸 알면서도 현혹될 정도로 화려하다.
기성오가 검을 휘두른다. 매화 꽃잎이 흩날리는 듯한 검술이었다. 그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자줏빛 기운이 뭉쳐지며 매화가 피어난다. 좋지 않다. 공간이 장악당하고 있다.
참귀도법(斬鬼刀法) 악귀십살(惡鬼十殺).
십자 모양의 검기가 날아간다. 기성오를 직접 노리지 않았다. 노린 것은 허공에 피어난 자주색 매화.
찢어진 매화는 검기가 되어 내게 쇄도한다. 나는 서둘러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호신강기와 부딪힌 매화가 먼지처럼 사라진다.
그 와중에도 기성오는 검을 휘두르며 매화를 그리고 있다. 매화가 피어날수록 그의 기세가 한층 강해진다.
“12개의 매화가 그려졌다. 너와 나는 매화 속에 있다. 아름답지 않느냐?”
안 좋았다. 공간이 장악당했다. 딱히 뭔가를 실수한 것도 아닌데 매화는 계속 늘어나 20개를 넘고 있었다. 그 비밀은 조금 늦게 눈치챘다. 그의 왼손 소매가 흔들리고 있다.
‘소매 속에서 손가락으로 매화를 그리고 있었나. 잔재주지만 효과적이다. 연륜은 못 속이겠군.’
나와 기성오 수준의 고수에겐 손가락 자체가 일종의 검이었다. 손가락은 5개다. 즉, 한 손에 5개의 검을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다.
‘총 24개의 매화가 피어나기 직전이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은 강호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하지. 매화 24개가 피어나면 아무도 못 막는다지?’
뇌천류와 천마신공을 사용해 정면으로 깨부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하지만 이곳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 적멸대원들이 있다. 천마신공을 썼다간 일이 좆된다. 뇌천류를 써도 경계를 받을 테지. 섬전도 염구석이 익힌 검법은 참귀도법뿐이니까.
참귀도법(斬鬼刀法) 악귀십살(惡鬼十殺).
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무너지는 벽 밖으로 뛰쳐나갔다. 기성오의 매화가 공간을 장악한다면, 다른 공간으로 가면 그만이다.
기성오도 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아까처럼 적대적인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도망치는 거냐? 좋다. 나도 바쁘니 다음을 기약하지. 운이 좋구나, 섬전도.”
“지랄하지 마라, 기성오. 네가 이곳에서 도망친다면 나는 근처에 있는 적멸대원들을 부를 것이다. 적멸대의 추적 없이 도망치고 싶다면 나를 죽이고 가야 할 거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군. 곧 적멸대가 이곳으로 들이닥칠 테니. 어쩔 거냐?”
“어린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구나!”
기성오가 다급히 달려들었다. 내 말에 똥줄이 타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가 검을 휘두른다. 극성에 다다른 환검의 잔상은 그 하나, 하나가 실제와 같았다.
‘눈을 현혹해도 결국 휘두르는 검은 하나다.’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궤도는 정해져 있었다. 놈의 주위에 매화가 그려진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매화 근처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카앙! 캉! 캉!
기성오의 검을 받아내며 계속해서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화산파를 벗어나 있었다. 나는 주위에 널브러진 적멸대원들의 사체를 확인했다.
“네 동료들이다. 너처럼 주제도 모르고 내게 달려들었지.”
“사인이 이상하군. 네가 죽인 게 아니군. 여기에 함정이 있었나?”
“저 동굴이 보이느냐? 50년마다 공청석유 한 방울이 나오는 동굴이다. 우리 화산파의 보물 중 하나지. 이놈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함정에 당한 것이다. 정작 공청석유는 내 품에 있는데도 말이다. 하하하!”
‘공청석유를 얻으려고 임무를 내팽개치고 따로 움직인 놈들인가? 나 같은 놈들이 꽤 있었군.’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적멸대는 기본적으로 자존심이 강하다. 거기에 마인이다. 상사의 명령을 더럽게 안 들을 것 같은 또라이들이라는 뜻이다.
‘외부와 차단됐다. 화산파에 설치된 결계는 무력화되었을 터인데…. 다른 종류의 결계인가?’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함정이 없었다. 함정은 앞서 온 적멸대원들에게 소모된 것이다.
‘외부와 차단 됐다라. 좋은데?’
완벽히 차단 된 건 아니다. 천마신공같은 걸 썼다간 결계도 버티지 못하겠지. 가뜩이나 적멸대는 마기에도 민감하니.
‘뇌천류는 괜찮겠지.’
기성오의 매화검법을 보는 순간 해보고 싶은게 있었다.
매화검법. 내게는 익숙했다. 카일의 매화검법을 유리아와 함께 연구했으니 익숙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매화검법의 묘리는 안다. 이 세계의 매화검법과는 다르지만 유사하다. 방금 휘두른 놈의 검을 보며 확인한 사실이다.
‘다른 세계의 나라면 시도조차 안 해봤겠지만, 이 세계의 내겐 재능이 있다.’
그냥 재능도 아니다. 천강성 시스템이 보조하는 재능이다. 이 세계의 내가 남들보다 훨씬 빨리 오기의 경지에 오른 것은 천강성 시스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이 세계의 나는 천재다.
[10초 동안 천재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파지직.
단전에서부터 내력이 기혈을 타고 온몸으로 흐른다.
나는 정면을 주시했다. 기성오의 주위로 매화가 한 송이씩 피어나고 있었다. 저것은 환검의 묘리를 섞은 기공이었다.
그동안 유리아와 함께 연구해온 매화검법들이 떠오른다. …사실 연구 대부분은 유리아가 한 거고, 나는 숟가락 얹은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지금까지 매화검법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천재의 시간을 발동하고 있는 지금, 천강성 시스템으로 인해 재능을 보조 받은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검을 휘두른다.
허공에 꽃이 그려졌다. 아직 피지 못한 꽃봉오리는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꽃잎에 시퍼런 전류가 흐른다.
“이 미친놈이! 감히 화산파의 매화검법을 따라 하는가!!!”
기성오가 격렬한 분노가 토했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보는 눈이다. 마인인 내가 고상한 매화검법을 사용하는 게 몹시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24개의 매화가 피어난다. 기성오의 하나밖에 없는 눈에서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흐르고, 콧구멍에서도 피가 주르륵 흐른다. 그가 무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반면에 내가 그린 꽃은 7개였다.
뇌천류(雷天流) 만뢰개화(卍雷開花).
번개로 이루어진 꽃봉오리가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피어나기 시작했다. 피어난 뇌전의 꽃은 사방에 전류를 흩뿌리며 공간을 장악했다. 기성오의 매화가 발악하듯 흩날린다. 허나 방어에 집중하는 7개의 뇌전의 꽃을 뚫진 못했다.
뇌천류(雷天流) 심즉검(心卽劍).
기성오의 품에 파고들어 칼을 휘둘렀다. 마음으로 휘두르는 칼. 기성오는 놀랍게도 반응했다. 검을 옆으로 세워 심즉검을 막은 것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막지 못했다. 그의 어깨에서 검상이 새겨지고 피가 터진다.
“이놈…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주춤거리는 기성오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다. 심장을 꿰뚫는 감촉이 느껴졌다. 칼을 뺀다. 그의 가슴팍에서 피 분수가 터졌다. 기성오의 무릎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화산파는… 또다시… 피어날 것이다…!”
“재미없는 유언이군. 차라리 살려달라고 빌어라.”
“……살려다오.”
“싫다.”
서걱.
기성오의 목을 베었다. 나는 쓰러진 놈의 품을 뒤져 공간함을 찾았다. 공간함을 열어 내부에 있는 것들을 확인했다. 자하신공과 공청석유를 비롯한 알짜배기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만족스러운 파밍이었다.
‘이제 들키지만 않으면 되겠군.’
나는 그곳에서 벗어나 원래 자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