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5화 > 1535. 광명승천도
[타락천마]의 주인공은 환생천마다.
천마가 죽어 염마대왕과 만나 저주받아 환생하게 된다. 악행을 저지를 수 없고 오로지 선행만을 쌓아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저주다. 그렇다고 선행을 쌓지 않고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다.
게으름을 피우는 순간 끔찍한 두통이 그를 덮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환생 천마는 긴고아를 찬 손오공과 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환생천마는 원작에 따르면 섬서에서 작은 객잔을 운영하는 범부에게서 태어나 점소이로 일하고 있다.
나는 예전에 환생천마를 찾은 적 있었다. 하지만 찾지 못했었다.
‘그때는 원작이 틀어졌다고 생각했었지. 환생천마 백무한. 그놈의 세계와는 배경부터가 다르니까.’
하지만 지금은 원작이 틀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무당파 일대제자 광검 명월은 원작 초반에 등장한다. 즉, 내가 에전에 찾아봤을 때는 백무한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라는 거지.’
지금 [타락천마]의 시작 지점이라면 백무한은 강하지 않다. 단숨에 죽여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무한을 죽이는 건 내키지 않았다.
‘백무한을 죽인다고 해도 내가 얻는 건 없어. 백무한의 천마신공은 자기 머릿속에 가지고 있으니까. 백무한은 원작에서 구르는 계열의 주인공이니…. 당장은 살려두는 게 더 이득일 것 같기도 하군.’
이것저것 따져봤을 때 백무한은 살려두는 편이 내겐 이득이라는 판단이 났다.
‘명월. 그놈은 제외다.’
백무한의 친구가 되는 조연이긴 하나, 딱히 없어도 될 것 같은 조연이다.
‘이번 임무는 실패할 수 없다. 명월은 반드시 죽인다.’
천마신교의 시선이 적멸대에 한껏 몰려 있는 상태였다. 화산파 멸문에 큰 공적을 세우지 못한 지금 이 임무를 실패하면 무능하다는 낙인이 찍힐지도 모른다. 그럼 위로 올라갈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다.
나는 신분을 감추고 명월과 환생천마가 있는 섬서로 향하는 마차에 탔다. 혼자만 마차에 탄 게 아니었다. 붓짐을 가진 떠돌이 상인과 여행자로 보이는 자들과 함께 마차에 탔다. 나는 구석에서 삿갓을 꾹 눌러썼고, 그들은 저들끼리 인사하더니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화산파가 천마신교의 적멸대에게 멸문당했다!”
“자네. 뒷북 좀 작작치게. 그거야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화산파가 멸문당했는데 왜 그렇게 평온하시오?!”
“멸문당한 건 화산파지, 우리가 멸문당한 게 아니니까. 이 전쟁에서 무림맹이 이기든, 천마신교가 이기든 우리 세금을 가져가시는 분은 오직 황제 폐하시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일반인들의 동요는 적었다. 황실의 권력이 견고한 이상 천마신교든 무리맹이든 누가 이겨도 변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관리자가 변하는 것일 뿐인 사소한 일이다.
‘일반인은 평온하고 긴장하는 건 무림에 속한 자들이지.’
특히 무림맹은 분노해 눈이 돌아가 날뛰고 있었다.
“무림맹의 최정예 전투 부대인 천검대, 악절복마대, 질풍섬멸단, 주왕대, 묵영단이 도망치는 적멸대를 추적하고 있다더군.”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무림맹의 정예들이군. 피바람이 불겠어.”
“피바람은 이미 불었다. 그리고 이제 시체의 산과 피의 바다가 만들어지겠지.”
“자네들은 이 전쟁에서 누가 이길 것 같나?”
“아무래도 천마신교가 이기겠지. 구파일방 중 화산파와 종남파가 멸문했지 않나.”
“에이. 종남파는 그래도 저력이 남아 있지. 화산파에도 무림맹에 매화검수들이 남아 있다고 하더만.”
“화산파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자하신공이 천마신교에 빼앗겼다고 들었네. 종남파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지만, 자하신공이 없는 화산파는 그러지 못하는 게 아닌가?”
“화산파와 종남파가 없어도 무림맹은 건재하다. 과거에도 그랬왓듯이 무림맹은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이다!”
“거참, 무림맹 찬양이 심하시구려. 혹시 무림맹에서 일하시오?”
히히히히히히히히힝!
갑자기 마차를 끌던 말이 울부짖으며 달리던 것을 멈췄다. 마차가 멈춘다. 빠르게 달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던지라 마차가 뒤집어지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심하게 덜컹거렸을 뿐.
“아아악!”
“마부 이 새끼야! 돈 받아먹었으면 제대로 몰아!”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마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차에 탄 자들이 서로의 눈치를 볼 때였다.
“밖으로 나와 이 새끼들아!”
“열을 세겠다. 열을 세기 전에 나오지 않으면… 전부 죽는다!”
“크크. 뒤지기 싫으면 나와!”
남성들의 거친 목소리가 울렸다. 마차에 탄 사람들의 낯빛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산적 혹은 도적과 마주친 것이다.
“이, 일단 나가서 상황을 보는 게 좋겠소.”
마차에 탄 자들이 쭈뼛거리며 마차 밖으로 나갔다.
삿갓을 쓰고 구석에 앉아 있던 나는 마지막으로 마차 밖으로 나갔다. 특별한 이벤트 발생에 가슴이 설렜다. 강호 고수의 실력을 보여줄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도적들이었다.
20명에 달하는 도적들이 마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무기가 가득하다. 그들에겐 잡스럽긴 하나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었다.
마부는 검을 뽑아 들고 도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도적들은 가소롭다는 듯이 마부와 우리를 쳐다봤다. 특히 나를 향한 경계심이 강했다. 삿갓, 흑색 장포, 칼을 차고 있기 때문이리라.
마부는 도적들의 두목으로 보이는 자에게 말했다.
“이 마차는 설백 표국이 정기적으로 운영하는 마차다. 그걸 알고 습격한 거냐?!”
“깃발이 떡하니 박혀 있는데 모를까 봐. 댁들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가 저 깃발 때문이야. 그러니 좋게 좋게 가자고. 우린 굳이 살생을 저지르고 싶지 않아. 무기를 내리고 가진 것들을 우리에게 넘겨라. 그럼 말과 마차는 보내 줄 테니까.”
“미친 것들! 설백 표국은 적을 끝까지 추적한다! 너희가 설백 표국의 추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마부 주제에 말이 왜 이렇게 길어?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니들은 선택이나 해라! 싸그리 죽던가! 아니면 짐을 넘기던가!”
“크윽….”
마부는 검을 내렸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모두 짐을 내리십시오. 일단 살고봐야하지 않겠습니까? 보상을 설백 표국에서 해줄 테니 지금은 저놈들의 말에 따르지요.”
“서, 설백 표국에서 보상해주낟면야….”
“살고 봐야지…. 맞아. 살고 보는 게 맞지….”
전원이 바닥에 짐을 내리고 쭈그려졌다. 그렇게 쌓인 짐은 상당히 많았다. 도적들이 희희낙락하게 웃는다.
“네놈. 네놈은 왜 가만히 있냐?”
도적 두목이 내게 턱짓한다.
“내가 왜 나보다 약한 놈들의 말을 들어야지?”
“어쭈. 강호 고수 행세를 하시겠다? 예전에 너 같은 놈이 있었지. 겉멋만 잔뜩 들어서는 자기가 황보세가 출신의 고수라고 지껄이던 사기꾼이.”
“호오.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도 낚였지. 그 새끼가 입을 존나 잘 털었거든. 근데 시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좀 이상한 거야. 고수라면 우리를 보자마자 단숨에 죽여버릴 텐데 그 새끼는 입만 털었거든.”
“사기꾼을 어떻게 했지?”
“어떻게 하긴? 토막 내서 개먹이로 던져줬지. 그 새끼가 죽기 전에 목숨 구걸을 신박하게 하던데… 네놈은 어떻게 구걸할지 궁금하네?”
“나는 조선제일검 무적유진이다. 네가 만난 사기꾼이랑은 차원이 다른 고수지.”
“조선제일검? 들어본 적도 없어, 이 새끼야! 담담한 척 말하고 있는데 속으로는 개쫄리는 거 다 알고 있거든. 그냥 얌전히 무기를 버리고 엎어졌으면 목숨이라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을. 넌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주마!”
“내가 사기꾼이라 확신하는군. 이유가 뭐지?”
“네가 진짜 고수였다면 우릴 보자마자 죽였겠지! 무엇보다 강호 고수가 이딴 싸구려 마차를 타겠냐?! 잡담은 여기까지다! 저 새끼 죽여!”
도적들이 달려오는 것 보다 먼저 내 오른손이 움직였다. 허리춤에 단 칼자루를 부드럽게 쥐며 말했다.
“나의 또 다른 별명은 조선발도재다.”
“뭐?”
철컥.
칼을 납도했다.
직후, 참격이 도적 두목의 오른쪽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그의 오른쪽 어깨가 미끄러지듯 아래로 떨어진다. 두목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잘린 자신의 어깨를 보다가 뒤를 바라봤다.
두목의 몸보다 최소 10배는 큰 거대한 나무가 반으로 쪼개져 갈라졌다.
“…….”
“…….”
숨 막히는 침묵의 분위기 속에서 도적들은 깨달았다. 내가 사기꾼이 아닌 진짜 고수란 것을. 도적들이 눈동자를 굴린다. 두목에게 필사적으로 신호를 보내며 판단을 요구한다.
그때,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도적이 몸을 획 돌리더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리석군. 네놈들, 잘 봐라. 이게 조선발도재의 무공인 용비어천류다.
철컥.
발도와 납도가 한순간에 이루어지며 도망치는 도적을 향해 참격이 날아간다. 참격은 도적의 하반신과 상반신을 나누었다.
철컥.
그 상반신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새로운 검기가 도적의 상반신을 반으로 갈랐다.
철컥철컥철컥철컥철컥.
이어지는 발도의 향연.
참격이 도적의 상반신을 베고 지나간다. 참격이 끝났을 때, 도적의 상반신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토막 나 있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도적의 시체보다 그 뒤편을 봤다.
참격에 의해 엉망이 된 숲. 쓰러진 나무, 뒤집어진 흙과 흩날리는 나뭇잎. 강력한 토네이도가 지나간 뒤의 모습과 흡사했다.
나는 오줌을 지리는 도적들에게 말했다.
”딱 한 명.“
적막함 속에서 내 목소리만이 또렷이 울렸다.
”딱 한 명만 살려주마. 이제 서로 죽여라.“
당연한 말이지만 동료를 죽이라고 해서 바로 죽이지 않는다. 함께 동고동락한 동료를 쉽게 배신할 수 있을리 가 없었다. 그러나 배신하게 될 것이다. 도적의 의리가 어떤지는 불 보듯 뻔했다.
철컥철컥철컥철컥철컥철컥.
가까운 도적을 향해 참격이 날아간다.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몸통을 잘라 토막 낸다.
”내 자비가 필요 없다면 됐다. 그냥 죽어라.“
내 시선이 향한 곳은 두목이었다. 두목이 움찔거리더니 소리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과도 같은 기합이었다. 두목은 하나밖에 없는 왼팔로 검을 휘둘렀다. 옆에 있던 부하의 목이 떨어진다.
”두목?! 이 씨발 새끼!“
”씨발! 씨발! 씨발!“
”살 거야! 난 살 거라고!“
전투가 시작됐다. 도적들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나는 팔짱을 낀 상태로 좆밥들의 전투를 지켜봤다.
승자는 놀랍게도 팔 하나 없는 두목이었다.
”내, 내가 살아남았습니다! 마, 말씀 하신 대로 살려주십시오!“
”살려주마. 근데 하늘은 널 살려두기 싫은가 보군.“
”네?“
마른하늘에서 시퍼런 벼락이 도적 두목에게 떨어졌다.
나는 몸을 돌려 마차에 탑승하며 말했다.
”쓰레기들 때문에 내 시간이 소모됐군. 빨리 출발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