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6화 > 1536. 광명승천도
섬서에 도착했다. 물론 섬서의 중심은 아니었다. 섬서의 외곽에 있는 어느 마을이다.
마을이긴 해도 인구수 수천 명이 살아가는 마을이었다. 역시 인구수 하나만큼은 기똥차게 많은 세계다웠다.
나는 마을 입구에 놓인 커다란 바위를 쳐다봤다. 바위에 강노촌(康老村)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원작대로군. 분명 강노촌의 뜻이… 강 씨 노인이 정착해 시작된 마을이란 뜻이었나?’
바위를 집중해서 바라봤다.
‘망치와 정으로 조각한 게 아니다. 검을 휘둘러 새겼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이 바위에 글자를 새긴 자가 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검법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중검(重劍)의 고수란 건 알겠다.
‘강호에서 은퇴한 고수겠지.’
직접 만날 수는 없을 거다. 이미 뒤졌을 테니까.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제외하고도 외지인들이 제법 있었다. 그리고 외곽에 있는 마을이라 그런지 노인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노인이라….’
잠깐 고민하던 마을 밖으로 나가 공간 이동 주문서를 찢었다.
***
백무한은 환생자다.
그는 전생을 똑똑히 기억한다.
전생의 그는 천마였다.
하늘 천. 마귀 마. 天魔.
만마의 주인이었고, 만인의 군림자였다.
사파제일인이었으며, 천하제일이었고, 고금제일인이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무림을 지배했다. 그 황제조차도 그의 발치에 조아려야 했다. 전생의 그는 모든 것을 가졌다.
영원할 것 같은 그의 군림은 어이없이 끝을 맞이했다.
배신이었다.
믿었던 아내와 자식, 친구, 부하에게 배신당했다. 아내는 음식에 독을 탔으며, 자식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친구는 등에 칼을 꽂고 부하들은 도망칠 수 없도록 퇴로를 막았다.
10년이 넘게 진행된 치밀한 계획은 절대자였던 천마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 성공했다.
죽은 그는 염라대왕과 만났다.
염라대왕인 그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힘인지 몰라도 절대자인 그는 염라대왕을 상대로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네 안에 살업이 가득하구나. 저 강이 보이느냐? 네가 죽인 자들의 원혼이 담긴 강이다. 본래라면 너는 저 강에 빠져 영원히 고통받아야 하리라.
염라대왕이 말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옥은 각오했다. 각오했다고 생각했었다. 막상 지옥을 보니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소멸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그는 염라대왕과 싸우려고 했으나 저승사자들에 의해 제압당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본래라면? 그럼 지금은 바뀌었나?
-천마여, 저 강을, 너의 지옥을 정화할 기회를 주마. 선업을 쌓거라. 그리고 흔들리는 세상을 구하거라. 내 너를 지켜보고 끊임없이 시험할지니, 너는 끊임없이 선을 행하거라.
지옥에 떨어지기 싫은 천마는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염마대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환생했다.
백무한이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10살이 되던 해였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전조도 없이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백무객잔’을 운영하는 범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공의 무자도 몰랐고 5살 때 마을에 일어난 홍수에 휩쓸려 돌아가셨다.
현재 백무한은 할머니와 함께 백무객잔을 운영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휴식 시간에 잠깐 천마신공을 수련한 백무한은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이 세계는 전생의 그가 살던 세계와 달랐다. 세계 자체가 엄청나게 컸다. 무림맹, 천마신교, 구파일방, 무림세가 등등 무림의 구성이 비슷했다. 그러나 무림의 판도와 무공의 수준 등을 비교하면 이 세계가 더 대단했다.
‘이 세계에 천마신교가 있는 건 좋다. 하지만 그 천마가 지존이 아니라니? 요괴도 존재하고, 신선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이 세계에선 무공의 경지도 다르게 불렀다. 인간의 경지라고도 불린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수명도 늘어났다.
‘내가 3년이나 수련했는데도 아직 무공의 경지가 출지 2단에 불과하다니!’
남들이 볼 때는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성장이었다. 뒷산에서 우연히 발견한 오백년산삼 효과가 있었다곤 하나, 영약의 도움을 받고도 출지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백무한은 무공에 있어 천재 중의 천재였다.
‘내겐 천마신공이 있다. 그런데도 고작 출지 2단의 경지라니!’
백무한 본인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못 해도 지금 출지 5단의 경지에 올라야 정상이니까.
“씨발. 흡성대법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면…!”
삐이이이익!
그의 머릿속에서 괴음이 울렸다.
『바른 말 고운 말을 생활화하십시오!』
“아아악!”
백무한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분근착골도 견디는 그지만, 어째서인지 시스템이 주는 고통만큼은 버티기 힘들었다.
끔찍한 시간이 지나갔다. 백무한 숨을 내쉬었다. 속으로 온갖 욕을 내뱉었다.
‘씨발놈의 염라대왕! 이딴 저주를 내게 남기다니…!’
이 저주는 스스로가 개과천선 시스템이라 말했다. 물론 백무한은 시스템이란 단어의 정확한 뜻을 몰랐다. 그냥 이름이려니 생각했다.
개과천선 시스템은 백무한에게 올바른 행위와 선을 강요했다. 잠깐의 욕설만 내뱉어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악행을 저지르면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통이 밀려온다. 선행을 하지 않아도 고통을 준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오늘 해야 할 선행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진짜 미치겠네. 천마인 내가 매일 3가지 이상의 선행을 해야 한다니…!’
천마가 선행이라니! 그게 말인가 방귀인가! 천마인 백무한에게 있어 선행이란 곧 타락이었다.
『아직 한 가지의 선행이 남았습니다. 해가 저물기 전까지 선을 행하십시오.』
‘한다! 한다고!’
백무한은 옆집으로 갔다. 앞마당에 쪼그려 앉아 잡초를 열심히 뽑았다.
선행이란 어렵지 않았다. 남에게 도움이 되면 그게 선행이었다. 백무한은 땡볕 아래에서 반 시진 동안 잡초를 뽑으며 선행을 완료했다.
탁탁탁.
손바닥을 털고 있을 때였다. 백무 객잔으로 들어가는 2명의 남자 손님이 보였다.
백무한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보통 남자들이 아니다.’
이 세계는 전생보다 더 흔하게 무인을 볼 수 있다. 전생보다 비교적 쉽게 무공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무인들은 대부분 어중이떠중이였다. 백무한이 인정하는 진짜 무인들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뭐 하러 이 작은 마을에 온 거지?’
그는 긴장하며 백무객잔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무당파 일대제자인 명월과 딱 마주쳤다.
“허허. 옆집의 잡초를 뽑는 모습을 봤네. 보기 좋더군. 자네는 항상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구먼.”
“또 무슨 지….”
지랄이냐고 하려다가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자네는 무공을 익혔지. 그게 비록 마공이긴 해도 아직 늦지 않았네. 무당파로 가세. 마공을 버리고 무당파의 무공으로 채우는 걸세. 자네에겐 마공보다 태극신공이 더 잘 어울리네.”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무림맹은 천마신교와 전쟁 중 아닙니까? 무당파에 돌아가지 않으셔도 됩니까?”
“무당파는 약하지 않네. 무림맹도 약하지 않지. 비록 화산파가 당했으나, 무림맹이 진건 아니네. 자네는 계속 백무 객잔에 남아 있을 텐가?”
“강호에는 흥미 없습니다.”
백무한이 딱 잘라 말했다. 명월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강호에 흥미도 없으면서 매일 무공 수련을 하고 강호의 정보를 듣는다? 모순되는 행동이었다.
“비켜주십시오. 객잔에 들어가야 합니다. 아까 손님이 들어가는 걸 봤습니다.”
“그 남자들. 보통 무인이 아니더군. 나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들이네. 조심하게.”
“그 정도 되는 고수들이 이 작은 객잔에 행패를 부리러 왔겠습니까? 볼일을 보면 바로 떠날 테지요.”
백무한은 명월과 함께 객잔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백무한의 조모인 비월령이 웬 남자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진하게.
참고로 비월령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다. 무공으로 젊음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월령은 60세고, 그에 맞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 할머니!”
백무한은 경악했다. 너무 예상 밖의 상황에 경악했다.
비월령이 화들짝 놀라며 남자에게서 떨어졌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손주에게 말했다.
“아니다, 얘야! 이, 이건 사고다! 사고야!”
양손을 필사적으로 흔들며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
오랜만에 성지곤을 만났다. 서로 바쁘다 보니 자주 만나지 못했다. 오늘만 해도 거의 6개월 만에 만나는 거다.
그래도 나와 성지곤 사이에 어색함은 없었다.
우리는 애미를 돌려먹은 형제가 아닌가! 시간도 우리 사이를 퇴색시키지 못한다.
“어떻게 지냈냐?”
내가 물었다.
“평소와 같지. 사천 군부에서 부사관으로 일하고 있어. 스승님도 같이 지내면서 구월영검법(九月靈劍法)도 배우고.”
성지곤은 만무탑에서 구월선자(九月仙子)의 제자가 되어 무공을 배우고 있다. 나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구월선자를 따먹었냐?”
성지곤이 씨익 웃는다.
“어떻게?”
“생각보다 쉽더라. 네가 말했던 대로 여자는 분위기에 약했어. 술 좀 먹이고 밤에 앉아서 보름달을 구경하다가 실수인 척 입을 맞췄지.”
“구월선자가 허락했다고?”
“마지못해 허락하던데?”
나는 상상력을 발휘하려다가 관뒀다. 내상만 입을 게 분명했다.
“머리는 왜 깎았냐? 머리도 확 깠고, 뭔가 군인 스타일 같군. 좀 촌스러워 보인다만.”
“이 스타일이 잘 먹혀. 깔끔한 걸 좋아하더라고.”
성지곤과 함께 백무 객잔에 들어갔다. 객잔에 들어가기 전에 옆집 앞마당에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내 직감이지만 환생천마인 백무한일 가능성이 컸다.
백무 객잔 안에는 노파가 앉아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어떻게 지나치리오.
할카스 성지곤은 자연스럽게 카운터를 보는 할망구에게 접근했다. 무언가 짧은 대화를 나눴다. 별 대단하지 않은 대화였다. 마을에 대한 질문과 할망구를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할망구의 반응은 상당히 좋았다. 별 웃기지도 않는 농담에 깔깔 웃는 것이다.
‘대단하군. 1분 만에 할망구의 마음을 열어버리다니. 외모 덕분만은 아니겠지.’
성지곤이 기술을 사용했다.
옆으로 걸어가는 척하면서 할망구에 넘어져 입을 맞춘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실수인지라 할망구가 화를 내기도 뭣한 상황이었다. 할망구는 화를 내기는커녕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반쯤 함락시켰군. 성지곤은 할망구를 한해서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경지에 올라섰다…! 어마어마한 자식이다!’
그리고 그 장면을 할망구의 손주인 백무한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