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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7화 > 1537. 광명승천도 (1,317/2,000)

< 1537화 > 1537. 광명승천도

일련의 해프닝이 끝나고 나와 성지곤은 객잔 식탁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전생에는 무림을 지배하는 천마였으나, 현생은 촌구석 작은 객잔의 점소이인 백무한이 음식을 내왔다.

객잔 단골 메뉴답게 국수였다. 투명할 정도로 맑은 국물과 하얀 소면이 담겨 있다. 겉으로 보기에 제법 밋밋해 보였고, 실제로도 밋밋했다.

나는 국수를 세 젓가락을 먹고 끝냈다. 내가 무려 세 젓가락이나 먹은 것이다. 그것만으로 맛집 수준은 된다는 뜻이다.

후루룩. 후루루룩!

내 맞은편에 앉은 성지곤은 국수를 들이켜고 있었다. 나와 그의 그릇을 확인한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의 그릇에 담긴 국수는 내 그릇에 담긴 것보다 훨씬 많았다.

힐끗. 주방 쪽을 쳐다보니 백무한의 조모가 성지곤을 지켜보고 있었다.

“크으~! 이렇게 맛있을 수가! 유진아! 이 국수 진짜 엄청나게 맛있지 않아? 난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국수는 처음 먹어 봐! 어머니가 해주신 것보다 더 맛있어!”

성지곤이 과장된 말투로 말했다. 다분히 할망구를 의식하고 뱉는 말이었다. 내가 알기로 성지곤은 이 정도로 국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기 요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 세계의 나와 그의 어머니는 요리할 줄 모른다. 부잣집 아가씨로 태어나 부잣집 부인이 되어 생활한 여인들이다. 전문 요리사가 있는데 직접 요리를 할 이유가 없다.

“유진아. 국수 안 먹는 거야?”

“나름 맛있긴 한데… 내 취향은 아니군.”

“내가 네 거까지 먹어도 될까? 국수가 진짜 맛있네.”

“그래라.”

나는 성지곤에게 국수 그릇을 밀었다. 성지곤은 곧바로 국수 흡입을 시작했다.

힐끗. 할망구를 보니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백무한은 복잡한 눈으로 성지곤을 지켜보고 있다. 나에 관해선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국수를 전부 먹은 성지곤은 씩 웃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할망구에게 포권했다.

“비월령 씨! 국수는 잘 먹었습니다! 엄청 맛있었습니다!”

“맛있게 먹었다면 됐네!”

할망구가 기분 좋다는 듯 깔깔깔 웃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성지곤이 할망구를 3일 내로 따먹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이틀도 안 걸릴지도 모르겠군.’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도사를 확인한다. 멀끔한 얼굴을 가진 도사는 안 그런 척하면서 나와 성지곤을 경계하고 있다.

‘무당파의 일대 제자 광검 명월. 어떻게 죽일까.’

백무한이 보는 앞에서 죽일 수는 없다. 백무한이 100% 끼어들 테니까. 백무한 모르게 죽이는 것이 최고다. 그러나 백무한의 기감을 속이고 명월을 죽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명월을 마을 밖으로 끌어내야 하나.’

할망구와 대화하는 성지곤을 보며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명월은 죽이고 백무한은 이용한다.’

참고로 백무한에게 정신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염마대왕이 그에게 부여한 개과천선 시스템 때문이다.

‘절대 최면 스티커는 사용해 백무한의 천마신공을 알아낼 수 없다는 거지.’

설령 개과천선 시스템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전생의 기억을 가진 백무한의 정신력은 절대고수의 것 이상일 테니 통하지 않을 것이다.

‘분근착골로 고문한다고 하더라도 입하나 뻥긋하지 않을 놈이야. 할망구를 인질로 잡아도 마찬가지겠지. 개과천선 시스템 때문에 억눌려 있을 뿐이지 본성은 대마두 그 자체니까.’

백무한은 미래에 깨달음을 얻고 개과천선하긴 한다. 그러나 원작 후반부의 내용이다. 이 세계에서 백무한이 정말로 개과천선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백무한을 당장 죽여봤자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없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용한다.

[백환] 세계의 카일처럼 백무환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는 온갖 신기한 보물들이 넘쳐나니 나중에 백무한의 천마신공을 얻게 해줄 보물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백무한과 적절한 친분을 유지하고 이용한다.

나는 백무한에게 다가갔다.

“점소이. 며칠 객잔에 머물러야 할 것 같다. 남는 방 있나?”

성지곤을 주시하던 백무한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남는 방은 있습니다만…, 며칠 머무신다고요?”

“나와 저 친구는 오랜 여행으로 피곤하거든. 휴식이 필요하다.”

“이 마을은 적적해서 심심할 것입니다만….”

“휴식을 취하기에 딱 좋군.”

“…알겠습니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와 성지곤은 방으로 올라갔다. 대충 방을 확인하고 객잔을 나와 마을을 돌아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이었다. 간간이 젊은 여자가 보이긴 했는데 미녀는 한 명도 없었다. 나는 마을 구조를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이 마을은 평화롭고 좋네. 특히 숙녀들이 많아서 좋아?”

“숙녀? 썩녀가 아니고?”

“썩녀?”

“썩은 여자 말이야.”

“썩다니. 그녀들은 열심히 인생을 살아오며 성숙해졌을 뿐이야. 너도 그녀들의 맛을 알면 빠져나오지 못할 거야.”

“지랄. 할망구는 너나 많이 먹어. 사천에서 생활한다고 했지? 일은 어때? 할만해?”

“군대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평소에는 행정이랑 훈련에 힘쓰고 일 터지면 무기 들고 출동하는 거야.”

“군대가 출정할 일이 있나? 이 대륙은 진제국이 지배하고 있잖아.”

“다른 국가는 없지만, 무림인이 있어. 무림인들이 얼마나 사고 치는지 너는 잘 모를 거야. 그리고 요괴들. 요괴들은 정말 지긋지긋해. 토벌해도 시간이 지나면 또 나타나서 인간을 습격한다니까.”

“바쁜 모양이네. 출셋길은 안 막혔지? 네가 하루라도 빨리 장군이 되면 좋을 텐데.”

“장군직에 오르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아. 스승님이 여러 가지로 힘써주고 계시거든. 시간이 문제지.”

성지곤의 스승인 구월선자(九月仙子)는 한때 황태자의 스승이었다. 그 황태자는 제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천수를 다해 죽었다. 황제는 늙지 않고 죽지 않기 때문이다. 황태자가 죽었다고 해도 구월선자가 황실에 끼치는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요즘에는 스승님의 이름 때문인지 혼담도 들어오고 있어.”

“혼담? 하긴 결혼할 때도 됐지. 나이를 생각하면 좀 늦은 거긴 해도….”

나와 성지곤의 외모는 20대 초중반의 것이다. 이른 나이에 오기(五氣)의 경지에 오르면서 노화가 더디게 진행되었고, 온갖 몸에 좋은 영약까지 처먹다 보니 아예 노화가 멈춘 상태에 가까웠다.

“혼담 상대는 누군데?”

“대부분이 고관의 딸이나 손녀들이야. 아, 이건 확실한 건 아닌데 공주도 있다더라.”

“공주라면 황족?! 결혼만 하면 출셋길이 열린 정도가 아니잖아.”

“난 영 아닌 것 같아. 그래도 결혼 안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테고…. 아, 결혼하게 되면 공주 처녀 보지 맛보게 해줄게. 궁금하지?”

“궁금하긴 한데… 진짜 공주의 처녀 보지를 맛보게 해준다고?”

“공주는 내 취향이 아니야.”

“이, 이 좋은 새끼!”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성지곤과 어깨동무를 하며 발을 굴렀다. 공주의 처녀 보지! 그 단어만으로도 군침이 싹 돌고 엔도르핀이 뿜어져 나온다.

“유진아, 잠깐만, 잠깐만 멈춰 봐.”

성지곤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들뜨는 가슴을 애써 억눌렀다.

“왜?”

“저기 저 여자 말이야.”

그는 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파가 밭에 쪼그려 앉아 일하고 있었다.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는 저 모습은 정말 아름답지 않니?”

내게 공주 보지를 바치기로 한 벗의 말이다. 나는 욕설을 내뱉는 대신 잠자코 밭에서 일하는 할망구를 쳐다봤다.

매력을.

매력을 느껴보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그냥 추레한 노파였다. 등은 굽었고, 머리카락은 회색이며, 손과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다. 솔직히 말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모르겠는데.”

“너도 언젠간 알게 될 거야.”

“평생 몰라도 될 것 같아.”

“도저히 못 참겠어. 잠깐 갔다 올게.”

성지곤의 눈이 정욕으로 반짝이더니 밭으로 걸어갔다. 이 새끼는 진짜였다.

나는 성지곤이 할망구를 범하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해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날씨는 더럽게 좋았다.

***

다음날.

백무 객잔에서 일어난 우리는 1층으로 내려가 아침 식사를 했다. 국수가 아닌 돼지고기 만두였다. 성지곤은 이번에도 맛있게 먹는다.

한참 아침 식사를 이어갈 때였다. 명월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안녕하시오. 소인은 무당파에서 온 명월이라 하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합석하지 않겠소? 식사비는 소인이 내겠소.”

거절할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앉으시오.”

“고맙소.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본인은 조선제일검 무적유진이오. 이쪽은 내 친구이자, 형제인 최강지곤이오.”

“최강지곤입니다.”

“이름이… 참 이상하시군요.”

“많이 듣는 말이오.”

본명이라고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실제로 본명이 아니었고.

명월은 구석에 있는 백무한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무한이! 여기 죽엽청 3병 내오게! 귀한 인연이 닿았는데 술이 빠질 수야 있나!”

“도사님은 술을 멀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너무 고지식하게 굴지 말게. 이 좋은 자리에 술이 빠질 수야 없지 않나.”

“…뭐, 알겠습니다.”

백무한이 죽엽청을 내왔다.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대들은 어쩌다 이 마을까지 오게 됐소?”

“딱히 이유는 없소. 강호를 떠돌다 보니 여기 강노촌에 도달했소. 도시처럼 번잡하지 않고 평화로운 마을이니 며칠 머물며 쉴 계획이오. 도사께선 이 마을에 무슨 일로 오셨소?”

“소인은 강호를 유람하며 협과 의를 행하고 있소. 구체적으로는 악적을 처단하는 일이오. 악적이 줄어들수록 백성들의 삶은 더 좋아질 것이니.”

“이 마을에도 악적이 있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소. 소인은 괴혈마(怪穴魔)의 흔적을 쫓아 강노촌에 왔으나, 아직 괴혈마를 발견하지 못했소.”

괴혈마(怪穴魔).

사파에 속한 유명한 마두였다.

명월이 괴혈마를 쫓아 마을에 도착한 것도 원작대로였다.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한 걸 보니 죽은 게 아니겠소? 아니면 이미 이 마을을 떠났거나.”

“놈은 상처를 입었소. 이 마을에 숨어 지내며 회복하고 있는 게 분명하오. 그래서 말인데… 할 일이 없다면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소? 그대들 같은 고수들이 도와준다면 굉장히 든든할 것 같소.”

“최강지곤. 어떻게 할까?”

“도와주자. 나도 이 마을을 좋아해. 도와주고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월에게 말했다.

“도와주겠소.”

“감사하오! 정말 감사하오! 천존께서 그대들의 앞날을 축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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