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0화 > 1540. 광명승천도
“명월 도사는 괴혈마에게 죽었다. 괴혈마는 내가 죽였으나, 갑자기 사라졌다.”
말을 내뱉고서도 약간 쫄렸다.
백무한은 주인공답게 감이 상당히 좋은 편이니까. 내가 조금만 실수해도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괴혈마의 시체가 사라졌다고요?”
“맞다. 잠깐 방심한 사이에 사라졌지. 난 요괴의 짓이라고 판단했다. 강시도 요괴이기도 하니 말이다.”
“제 생각과는 다르군요. 전 요괴가 아닌 사람의 짓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도사님이 쫓던 괴혈마는 사왕련이라는 사파 최대 세력에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파의 사이한 술법 중에는 강시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왕련의 강시술사가 이 일의 원흉이라 보는 건가?”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강시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대낮에 마을을 습격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강시들을 상대하며 인간의 악의를 느꼈습니다.”
“어쩌면 그 요괴가 강시술사일지도 모르지.”
“그 요괴가 사왕련 소속일 수도 있습니다. 요괴와 인간이 손을 잡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듣고 보니 그럴듯하군. 네가 원하는 건 뭐지?”
털썩!
백무한이 내 앞에 무릎 꿇었다. 그는 고개까지 숙이고 내게 말했다.
“대협! 도와주십시오! 강시술사는 저의 하나뿐인 가족을 죽이고, 저의 고향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도저히 놈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힘만으로는 놈에게 복수하기 어렵습니다! 대협께서 도와주십시오! 저 백무한!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백무한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백무한에게 은혜를 입힐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잘 됐군.’
이럴 땐 덥석 받아들이면 안 된다. 너무 쉽게 보이면 은의 가치가 떨어져 보인다. 그리고 생색을 내려면 확실하게 내야 한다.
“사왕련이 어떤 세력인지 알고 내게 부탁하는 거냐? 사왕련은 사파의 연합체다. 정파에 대표 세력이 무리맹이라면, 사파의 대표 세력은 사왕련이다. 지금 너는 내게 그런 사왕련을 적으로 돌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리한 부탁이란 건 압니다. 하지만… 강시술사를 죽이기 위해선 대협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원래라면 사왕련이랑 척지는 멍청한 짓 따윈 하지 않았을 테지만… 나도 이 마을에 정이 들어버린 것 같군.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는 그 말, 절대 잊지 마라.”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백무한. 계획은 있나?”
“우선 살아 있는 마을 사람들을 구해 한곳에 모아야 합니다. 강시술사는 이 마을을 지울 생각인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구해내면 필시 놈도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좀 이상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선 움직이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백무한은 바닥에 널브러진 강시 시체 3구 쪽으로 향했다.
나는 그가 강시의 시체에 화풀이라도 하려는 건 줄 알았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니, 백무한 그런 짓을 하지 못한다. 개과천선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백무한은 붉은 구더기가 들끓는 강시 시체의 목을 콱 틀어쥐었다. 그의 몸에서 마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강시의 기운이 백무한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흡성대법이군. 강시의 기운도 흡수할 수 있나?”
“제가 익힌 흡성대법은 조금 특이합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나, 강시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백무한은 강시 3구의 기운을 모조리 흡수한 뒤에 움직였다.
마을 중심으로 향한다.
비명 소리와 전투 소리가 이어졌다. 작은 마을이긴 하나 병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병사들이 강시와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다. 백무한은 소리 없이 움직였다. 달리고 있는데 소리가 전혀 없었다.
‘저게 백무한의 천마유령보인가. 탐나는군.’
백무한은 병사와 싸우고 있는 강시의 뒤를 덮쳤다. 검은색 검기가 맺힌 검으로 강시의 몸을 벤 것이다. 그리고 쓰러지는 강시의 목을 붙잡아 흡성대법을 이용한다. 그의 이마에 핏줄이 울긋불긋 튀어나왔다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흡성대법은 적의 기운을 무한정으로 흡수할 수 있는 사기 무공이 아니다. 흡성대법에도 엄연히 한계가 있지.’
지금 백무한에게 그 한계가 가까이 다가온 것이 틀림없었다.
“아아아아악!”
비명을 들은 나도 움직였다. 가만히 백무한의 활약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백무한에게 입히는 은혜가 더 커진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강시가 죽어 나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협!”
“뒤로 가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있어라.”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내게 강시는 손쉬운 상대였다. 강시는 육체가 단단하다는 걸 제외하면 지능도 짐승 이하인지라 그리 까다롭지 않은 적이었다.
마을 중심부로 갔을 때였다. 나는 성지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괴혈마와 싸우고 있었다. 놀랍게도 성지곤이 밀리고 있었다.
“괴혈마?! 분명 죽었을 텐데?!”
당황하는 내게 백무한이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잘 보십시오, 대협. 괴혈마의 몸이 이상합니다. 마치 사람의 몸을 토막내어 억지로 갖다 붙인 것 같지 않습니까? 저건 강시입니다. 그것도 보통 강시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 강시 뒤에 서 있는 하얀 옷의 인간…. 강시술사가 확실합니다.”
괴혈마는 강시가 되어있었고, 괴혈마의 뒤편에 방울을 든 인간이 있었다. 하얀 옷과 하얀 면포를 쓴 인간이었다. 그는 방울을 흔들며 강시를 조종하고 있었다.
“그래. 강시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보통이 아니군. 설마 강시 주제에 지곤을 압도하고 있을 줄이야. 가서 도와야겠다.”
“저는 저 강시술사를 맡겠습니다.”
성지곤에게 달려갔다. 상처투성이의 성지곤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등 뒤에 노피 4명이 쓰러져 있었다. 성지곤은 노파들을 지키면서 싸우고 있었떤 것이다.
“유진! 네가 와서 다행이야. 슬슬 버겁던 참이었거든.”
나를 본 성지곤이 안심했다는 듯 씩 웃는다.
“네가 고작 강시 상대로 버겁다고?”
“저놈은 평범한 강시가 아니었어. 그 외의 다른 강시들도 있었는데… 내가 처리했어. 마을 사람들을 지키며 싸우다 보니… 좀 많이 힘드네.”
성지곤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바닥을 보는 그의 눈동자는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탈진 증상까지 보인다. 내가 오기까지 죽도록 뛰어다닌 모양이다.
고작 이따위 마을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싸웠냐고 타박할 수는 없었다. 이 마을에는 성지곤의 여자들이 있었다. 비록 늙어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여자들이지만, 성지곤의 여자들이었다. 성지곤은 자기 여자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넌 좀 쉬고 있어라. 저 강시 새끼는 내가 처리할 테니.”
“유진이 너도 좀 지쳐 보이는데?”
“저 새끼 죽일 정도로 지치진 않았어.”
나는 괴혈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강시술사는 백무한이 죽일 것이다.
“조심해! 저 강시 무공을 쓰더라!”
“강시가 무공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지.”
원래 강시도 무공을 쓴다. 무협지에 나와 있었다. 나는 방심하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뇌천류(雷天流) 뇌섬(雷閃).
번개를 휘감은 검기가 강시에게 날아간다. 강시가 옆으로 뛰었다. 어이 없을 정도로 쉽게 내 공격을 피하더니 양손을 움직인다. 양손이 천천히 회전하며 원을 그린다.
“피해!”
성지곤이 소리쳤다. 나는 급히 칼을 앞으로 내밀어 날아오는 장풍을 막아냈다.
“유진! 호흡을 멈춰! 독이야!”
“독? 당소소의 독에 비하면 이 정도 독은 아무것도 아니야.”
파지직.
뇌기가 움직이며 내 몸에 침범하는 독기를 모조리 태웠다. 어지간한 독기는 뇌천류의 뇌기를 이기지 못한다.
뇌혈마에게 접근하려 할 때였다. 백무한이 강시술사의 목을 벴다. 강시술사의 머리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다 떨어진 것이다.
‘강시술사가 죽었으니 강시인 뇌혈마는 쓰러지겠군.’
쓰러지지 않았다.
몸을 꿈틀대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하하! 나는 다시 태어났다! 이 빌어먹을 사왕련! 내가 반드시 죽여주… 커억?!”
나는 괴혈마에게 달려들어 그 가슴팍에 칼을 꽂았다. 놀란 괴혈마가 양손을 현란하게 움직인다.
“이놈…! 감히 기습을 해?!”
놈의 양손에서 응축된 독기가 느껴진다. 괴혈마의 독문무공인 괴혈독수(怪穴毒手)다.
괴혈독수가 내 몸에 닿기 전에 찰나를 사용했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이놈이 갑자기 어떻게 살아난 건지 몰라도 가만히 둬선 안 된다! 놈이 그 입을 나불거렸다간 내 계획이 전부 망할 수 있다!’
괴혈독수를 피하며 칼을 휘두른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4]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3]
찰나를 연속으로 사용하며 참격을 이어간다. 괴혈마의 몸이 토막 나고 머리통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나는 괴혈마의 이마에 칼을 찔러 넣으며 공격을 마무리했다.
“끄으으… 망할! 기껏 다시 살아놨는데 웬 놈들이 방해를…!”
괴혈마는 죽지 않았다. 칼에 머리가 꿰뚫린 채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마무리 지으려고 할 때였다. 백무한이 뛰어왔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대협! 놈에게 물어볼 게 있습니다!”
뇌세포가 활발하게 움직이며 두 개의 선택지를 내놓았다. 하나는 백무한의 말을 무시하고 괴혈마를 죽이는 것. 이 선택을 하면 백무한이 나를 의심할 가능성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백무한의 말을 듣고 일단 괴혈마에게 마무리 짓지 않는 것. 괴혈마는 그때 죽어 있었으니 내가 명월을 죽인 사실을 모를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두 번째를 선택했다.
“괴혈마! 우리 마을에 일어난 일에 관해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해라! 그리고… 강시술사는 한 명이 전부냐?!”
“눈치 빠른 꼬맹이로군. 그래. 강시술사는 하나가 아니다. 귀를 기울여봐라. 들릴 거다. 지긋지긋한…. 망자를 이끄는 방울 소리가.”
딸랑.
사방에서 방울 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다. 최소 10개 이상의 바울이 동시에 울리며 하나의 소리를 내고 있다.
괴혈마의 얼굴이 뒤틀어졌다. 괴혈마가 내게 필사적으로 말했다.
“망할! 네놈! 어서 빨리 나를 죽여라! 네놈 때문에 내 몸은 토막 났다! 이대로 놈들에게 다시 강시로 부려질 바에는 이대로 죽는 게 낫다! 어서 빨리 날 죽여라! 내 머리를 갈라라!”
나는 궁금한 걸 못 참고 그에게 물었다.
“괴혈마! 대체 어떻게 살아난 거냐?!”
“가문의 비술이다. 명계가 흔들리고 있기에 통했지. 우연에 가깝다. 두 번 다시 없을 우연…. 자, 빨리 나를 죽여라!”
나는 괴혈마의 머리통을 갈랐다.
백무한은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대협! 할머니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강시술사들을 전부 죽여야 합니다! ”
“걱정마라. 여기까지 와서 도망치지 않을 테니. 준비나 해라. 수많은 기척이 느껴진다. 백이 넘는 강시가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다.”
“잠깐.”
성지곤이었다.
그가 다리를 절면서 걸어왔다. 그 시선은 백무한에게 향해 있었다.
“네 조모가…. 월령 씨가 죽었다고? 그 말이… 사실이냐?”
“…할머니는 강시놈들에게 죽었습니다. 저는 할머니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마, 말도 안 돼…. 월령 씨가 죽다니…! 아, 아아아아아아악!”
성지곤이 분노했다. 그의 몸에서 기운이 넘쳐흐른다.
‘이럴 수가! 성지곤이 분노의 힘으로 각성했다! 설마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분노의 힘으로 일깨운 것인가?!’
나와 백무한은 깜짝 놀라 성지곤으로부터 멀어졌다. 살의가 담긴 성지곤의 기운에 몸이 찌릿찌릿했다.
“월령 씨…!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저 하늘에서 보고 있으십시오! 내가 월령 씨의 복수를 하겠습니다!!!”
각성한 성지곤이 맹세하듯 검을 치켜들었다. 황혼을 담은 황금빛 기운이 그의 검을 타고 치솟았다.
사랑하는 할망구를 잃은 성지곤은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우리에게 말했다.
“그녀의 복수를 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