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5화 > 1555. 성유니콘
한차례 분근착골의 폭풍이 지나갔다. 놈은 더 공손해졌다.
“이름.”
그는 삶의 의지를 박탈당한 듯한 표정으로 내 질문에 답했다.
“…김항석입니다.”
나는 손목에 찬 워치를 바라봤다. O라는 문자가 올라와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란 뜻이다.
‘분근착골로 어루만져주느라 시간을 허비했어. 거짓말 탐지기를 이용할 수 있는 건 앞으로 5분밖에 없다.’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빠르게 질문해야 했다.
“네 소속을 말해.”
“소속이라고 할 것 까진 없습니다. 저희는 그들에게 고용된 사냥개일 뿐입니다.”
워치의 대답은 O. 거짓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놈은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청부업자라는 거냐?”
“비슷합니다. 전용 청부업자라는 말이 맞겠지만요. 놈들은 저희를 이용하고, 저희는 놈들의 돈을 받죠.”
“아까는 실행부라며?”
“시키는 대로 하니 실행부지요.”
김항석이 눈동자를 굴린다. 굉장히 불안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내뱉는 말들은 모두 진실이었다.
“노지수는 너희의 주인이 아니라고 했지? 노지수보다 더 위에 서 있는 놈이 있나?”
“노지수의 파이브 새드는 황하문과 손잡은 길드 중 하나일 뿐입니다. 트라이앵글의 한축일 뿐입니다.”
“트라이앵글?”
“황하문과 계약한 세 개의 길드를 말합니다. 파이브 새드, 노 카운트, 함초롬입니다.”
노 카운트와 함초롬. 들어보지 못한 길드였다. 파이브 새드도 오준혁이 아니었으면 알지 못했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셋 다 블랙 길드겠군. 모두 마약을 파는 거냐?”
“네. 노 카운트는 주로 마약의 유통을 맡습니다. 파이브 새드는 클럽에서 신규 중독자들을 늘리고, 함초롬은 고객 중에서도 중요한 놈들만 집중적으로 상대합니다.”
“꽤 본격적이군. 황하문은?”
“황하문이 마약을 제공하고 트라이앵글을 관리합니다. 우리를 고용한 건 황하문입니다.”
이것 또한 진실이었다.
어떤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파이브 새드의 길드 마스터인 노지수는 나에 대한 걸 황하문에 보고했고, 황하문은 망설임 없이 날 처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네가 노리는 건 나뿐이냐?”
“우리 임무는 널 죽이는 것뿐입니다. 표적의 가족을 건드리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건 시선을 너무 많이 끄니까요. 네 가족이 뭔가를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습니다만….”
“입을 막기 위한 살인멸구인가.”
오준혁은 대상이 아니었다. 노지수가 오준혁에 대한 황하문에 말하지 않았거나,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노지수는 어디까지 연관된 거지?”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정보를 알려준 게 노지수입니다. 빌어먹을 년…. 이렇게 강할 거라고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김항석이 이를 으득 갈았다.
노지수는 나를 유망주이긴 하나 B급 헌터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내가 파이브 새드를 찾아가 지랄한 건 어제다. 나에 대해 조사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 외에 연관된 놈들이 누군지 알고 있냐?”
“대한민국의 고위 공무원 몇 명이 연관된 건 알고 있습니다. 협회의 간부 중 한 명도 협력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 뭐가 아쉬워서? 황하문이 약점이라도 잡았나?”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는 법입니다.”
“돈이란 거군. 그놈들의 이름을 말해.”
“제가 알고 있는 건 일부일 뿐입니다.”
“알았으니 말해.”
“…다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깔끔하게 죽여주십시오.”
그가 연관된 고위 공무원의 이름을 줄줄이 말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트라이앵글의 세력이 더 컸다.
‘나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야.’
일단 김항석을 죽이고 생각에 잠겼다.
‘내 인맥을 전부 써도 부족해. 한국 헌터 협회의 간부인 백지은이 같은 간부를 견제해줄 수 있겠지만… 나머지는?’
하승희에게 부탁해 세진 그룹의 힘을 빌린다? 세진 그룹은 기업이었다. 고위 공무원들이 대상이면 힘을 쓰지 못한다. 재력과 권력은 다르니까. 재력으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지만, 세진 그룹이 날 위해 굳이 돈을 쓸 이유가 없었다. 돈을 쓰더라도 권력을 완벽히 다룰 수 있을 리 없다.
‘이 일을 뒷감당하기 위해선 권력이 필요하다. 권력이….’
숨죽이고 지낸다는 선택지는 없다. 놈들이 날 죽이려고 했다. 이미 우리 관계는 씹창 났으니 당하기 전에 놈들을 죽인다.
‘당하고는 못 참지.’
나는 대한민국의 권력자들을 떠올렸다. 그중에서 최고 권력자라 할 수 있는 인물.
‘대통령에게 절대최면 스티커를 붙일까?’
지금 내게 2,000포인트가 있다. 1,000 포인트만 더 벌면 절대 최면 스티커를 구매할 수 있었다.
‘지금 대통령은 임기가 얼마 안 남았잖아. 그런 대통령에게 3,000포인트를 쓰는 건 좀….’
대통령을 제외한다.
장관들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젠장. 현실이라 권력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전부 겉보기뿐이잖아.’
창작물들을 떠올린다. 창작물 속에서 권력 구조는 항상 직함에 따라가지 않았다. 높은 직함이라도 꼭두각시인 경우가 많았다. 뒤에서 권력을 조종하는 세력도 있다. 현실이라고 해서 다르지 말란 법은 없었다.
‘뒤에서 조종하는 세력은 없더라도 진짜 권력을 가진 놈들은 따로 있을 거야. 그것부터 알아야겠군.’
그 권력자를 절대 최면 스티커로 조종한다면 꿀을 빨 수 있을 것이다.
‘던전 밖으로 나가서 백지은에게 물어보자. 한국 헌터 협회의 간부이니 대한민국의 권력 흐름을 잘 알고 있겠지.’
***
-황하문? 파이브 새드? 플래시가루? 트라이앵글?
스마트폰에서 기가 찬다는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협회 간부인 백지은이었다.
-너,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협회 간부 한 명도 엮여 있다더라.”
-협회 간부까지 껴있어? 골 때리네.
“그런 것 치곤 목소리가 밝은데.”
-협회 간부 하나가 줄면 내 영향력이 더 줄지 않겠어? 그 간부가 누구야? 다른 건 몰라도 그 간부를 나락으로 보내는 건 협력해줄게. 협회에 속했으면 그딴 개짓거리를 한 것도 용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내 출셋길이 중요하니까.
“이름이 최마웅 이라던가?”
-아, 그 새끼? 뒤가 구리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일에 엮여 있을 줄이야. 좋네.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드는 자식이기도 했어.
“어떻게 하려고? 설마 무식하게 들이받으려는 건 아니지?”
-이 누나가 너처럼 행동하겠니? 증거를 가지고 협회장에게 꼰지를 거야. 지금 협회장이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건 진짜 싫어하거든. 나는 이후에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받아먹으면 되는 거지.
“협회장은 자기 가족을 내치는 것에 망설임도 없나 보네. 의외네.”
-이 바닥에 식구 같은 게 어딨어. 다른 곳은 몰라도 협회는 그렇게 따뜻한 곳이 아니야. 방심하면 모가지 날아가는 건 기본이야. 하여튼 정보는 고마워. 증거는 내가 알아서 찾아볼게. 엮인 놈들이 많아서 전부 소탕하는 건 힘들 것 같긴 한데… 최마웅. 그 인간만큼은 확실하게 없애줄게.
“누나한테 전부 해달라고 안 해. 대한민국의 권력 흐름이 어떻게 되는지나 알려줘. 대외적으로 알려진 거 말고 말이야.”
-흐음. 너도 이런 거에 관심이 생겼나 보구나? 흔해 빠진 정보를 원하는 건 아닐 테고…. 좋아. 특급 정보를 줄게. 한국의 오대가문을 알아?
“알아. 학교에서 배웠어. 헌터 가문이기도 하잖아.”
흔히 말하는 헌터 명문가. 그게 한국의 오대 가문이다.
동청 신가(東靑 申家), 남적 옥가(南赤 玉家), 서흑 현가(西黑 玄家), 북백 손가(北白 孫家), 천주 황가(天柱 黃家).
이중 제일은 천주 황가라고 한다. 그러나 황가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알려진 게 워낙 없어서.
-오대 가문은 역사가 긴 무가야. 그 시작점은 고구려를 넘어 조선시대지. 그 당시에도 몬스터는 있었고, 지금까지 몬스터를 사냥해온 게 오대 가문이야. 한국 헌터 협회도 오대 가문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정치라고 다를까? 대통령도 오대 가문을 함부로 대하지 못해. 현 대한민국의 권력자 중 3할 이상이 오대 가문 출신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야.
“그 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네. 지금까지 지들끼리 다 해 먹고 있었다는 거잖아. 근데 대한민국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딱히 나쁠 건 없으니까? 오대 가문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살아왔으니까. 왕이나 충성을 바치는 게 아니야.
“그놈들이 이 일에 엮여 있으면 힘들어지겠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왜 그렇게 확신해?”
-오대 가문은 몬스터만 사냥해온 게 아니야. 외적이 침입했을 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이 땅을 위해 싸웠어. 그런 오대 가문이 가장 싫어하는 국가가 어딜까?
“…일본?”
-정답이야. 그다음은?
“…중국?”
-잘 아네. 황하문은 중국의 블랙 길드라고 했지? 오대 가문이 중국의 블랙 길드와 손을 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오대 가문은 가진 자부심이 대단하니까.
“그럼 오대 가문에 이 정보만 적당히 흘리며 알아서 나서서 정리하겠네?”
-글쎄. 그렇게 쉽지 않을걸. 오대 가문이 직접 나서는 경우는 근 10년 동안 없었어. 정말 최악의 경우가 아니라면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을 거야.
“오대 가문을 움직이려면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거군. 고마워. 덕분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혔어. 누나, 북백 손가와 연결해줄 수 있어?”
-미안. 북백 손가 쪽이랑은 인사도 해본 적 없어. 대신 서흑 현가라면 소개해 줄 수 있어.
“아니, 됐어.”
서흑 현가라면 나도 대충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의료계를 손에 쥐고 있다. 지배하고 있다 말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북백 손가를 만나려는 건 거래할 수 있는 물건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오대 가문과 만나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그보다. 내 친구가 헌터 협회에 취직하고 싶어 하거든. 자리 하나 만들어 줄 수 있어?”
-흐음. 어중이떠중이는 좀 그런데.
“걘 D급이야. 실력은 없지만 착한 놈이야. 이번에 대학교도 졸업해.”
-D급이면 내 아래에 두기엔 좀 그렇네. 그래도 뭐, 작은 자리 정도는 만들어줄 수 있어.
“고마워, 누나. 나중에 내가 한턱 쏠게.”
-비싼 거 먹을 거야.
“그러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