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3화 > 1563. 성유니콘
“…파이론.”
-인간이군. 어떻게 여기에 온건 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중국 정부와 협상하여 공식적으로 얻은 나의 영역이다.
느닷없는 파이론의 등장에 애새끼에게 찔린 옆구리가 아려왔다. 통증은 내 머리를 냉철하게 만들었다.
파이론.
중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던전 브레이커 사태에서 갑자기 나타난 존재다. 협회는 파이론의 존재를 몬스터인지, 종족인지 정확히 규정하지 못했다. 몬스터라고 하기엔 지능이 너무 높았으며 강력한 힘을 가졌다. 종족이라 하기엔 그 개체수가 적었다.
따라서 헌터 협회가 선택한 태도는 보류였다. 파이론을 상대하기 위해선 만만치 않은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는 점도 그 선택에 한몫했다.
“여긴 어디지? 한국인가?”
파이론에게 물었다. 파이론은 지금 한국어를 하고 있었다.
-말했을 텐데. 중국 정부와 협상하여 공식적으로 얻은 나의 영역이라고. 그럼 당연히 중국이 아니겠나? 넌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인간이군.
“…….”
짜증이 났으나 꾹 참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파이론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다. 게다가 난 지켜야 할 사람도 있었다.
일단 눈앞의 파이론은 날 향한 적의를 내비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나와 싸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화로 협상할 수 있다는 거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한 건가. 던전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던전이 아니니 공간 이동 주문서를 이용하면 언제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다고 이놈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간 이동 주문서를 쓸 생각은 없다.
“내가 한국인인 걸 어떻게 알고 한국어를 쓰는 거지?”
-발음이다. 그 발음으로 ‘파이론’이라 말하는 인간은 한국인밖에 없다.
고작 한 단어의 발음 하나로 내 국적을 알아낸 건가. 대단한 놈이긴 했다.
“네 영역에 함부로 침입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건 어쩔 수 없는 사고 때문이었다.”
-알고 있다. 차원의 틈이 벌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너희들이 나타났지. 정상적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고 하기엔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군. 특히, 네가 들고 있는 여자는 더욱더.
나는 안고 있는 손가연을 바라봤다. 잠든 듯이 기절해 있다. 입과 코에서 흐르던 피는 멎었다. 내상도 심하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상태가 안 좋긴 해도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는.
“뭘 알고 있는 거지?”
-너희는 차원을 넘었다. 공간을 이동하려고 차원을 넘는 터무니 없는 짓을 저질렀지. 뛰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날아버렸다. 날개가 없으니 안정적으로 날지 못하고 추락했지. 다행히 추락지는 목표했던 곳 근처였던 모양이다만.
“요점만 말해라.”
-차원의 틈을 아무 대가 없이 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작은 차원의 틈인지라 어떻게든 육체는 보호한 모양이지만, 문제는 정신이다. 너희 인간의 정신은 나약하다. 차원의 틈에서 붕괴하여도 이상하지 않지. 붕괴되지 않을 만큼 강한 정신력을 가졌더라도 그 여파는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이 멀쩡한 네가 신기하게 느껴지는군.
“누나는 위험한 상태인가?”
-적어도 지금 당장 조치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길 건 확실하다.
나는 손가연을 바라봤다. 정신을 잃은 지금도 그녀의 몸에선 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정신에 문제가 생기는 건 원치 않았다. 나는 파이론을 쳐다봤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 보니 해결법이 있는 모양이군.”
-정신을 치료하는 방법이 있다. 우리에 대해 대충이나마 알고 있겠지. 네가 보고 있는 이 육신은 가짜다. 정신을 이용해 조종하고 있지. 정신에 관해서는 우리가 일가견이 있다.
“공짜로 호의를 베풀 리는 없을 테고… 우리에게 뭔가 원하는 게 있나 보군.”
-내 영역에 차원의 틈이 몇 개 생겨났다. 그걸 너희가 처리해 줬으면 한다.
“차원의 틈? 난 그게 뭔지 몰라.”
-너희는 차원의 틈을 던전이라 부르더군.
“던전 공략을 부탁한다고? 굳이 우리에게? 네 힘이라면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 텐데.”
-해결하지 못한다. 화신체는 던전에 들어가는 순간 연결이 끊긴다. 차원의 틈은 이 세계와 괴리된 별도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와 협상하지 않았나? 우리가 아니어도 중국의 도움을 받으면 될 텐데.”
-그것들은 자기 주제도 모르고 바라는게 너무 많다. 이 일로 몇 번 도움을 받긴 했으나, 그때마다 내 영역에 수작을 부리더군.
“수작?”
-마법이나 기계를 설치하는 등의 같잖은 수작이다.
중국이라면 그럴만 했다. 중국이니까.
“꼭 던전을 공략해야 하나? 던전 브레이커가 일어나도 네겐 위험하지 않을 텐데.”
파이론의 힘이라면 던전 브레이커가 일어나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도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겐 던전이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벌레 소굴이다. 그 벌레들이 대량으로 튀어나와 집을 엉망으로 만든다고 상상해 봐라. 기분 나쁘지 않나?
상상해 봤다. 어마어마하게 기분 나빴다. 그리고 파이론을 도와 세스코 노릇을 해야 하는 것도 기분 나빴다.
힐끗.
품에 안겨 있는 손가연을 보며 참는다.
“좋아.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대신 누나의 정신이 완벽히 회복시켜라.”
-완치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몇 시간.”
-최소 열흘은 걸릴 거다. 정신은 섬세하다. 약해진 정신은 살짝만 잘못 건드려도 부서지지. 정신은 천천히 회복해야 한다.
“치료 방법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본체에서 안정된 정신 파동을 흘레 테니, 그 여자는 내 영역에 있으면 된다. 그럼 알아서 정신을 회복할 것이다.
“후우. 좋아. 던전으로 안내해. 미리 말해두지만… 내 힘으로 안 되는 던전은 어쩔 수 없어.”
-무리한 걸 시키지 않을 테니 우려 말라.
좀 꼽다.
이 새끼는 왜 자기가 더 높은 자리에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거지?
마음 같아선 이 숲에 불을 질러버리고 싶으나, 놈이 나보다 더 강하니 참기로 했다.
***
5시간 만에 D급 던전 2개와 C급 던전 1개를 공략했다.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전부 포기하고 공략하는데 집중한 결과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던전 밖으로 나온 나는 어느 동굴을 찾았다. 동굴 안에 손가연이 누워 있었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봤다. 무방비 그 자체였다. 지금 그녀를 덮친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지.
그녀를 향해 손이 움직였다.
-뭐 하고 있는 거지?
뒤에서 파이론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크라브’라고 했다. 나는 그를 힐끗 보고는 하던 일에 집중했다.
부우욱. 찌이익.
손가연의 옷을 찢기 시작한 것이다.
-교미를 하려는 건가?
“누나가 잠들어 있는데 덮칠 수는 없지. 덮치더라도 깨어나 있을 때 덮쳐야지.”
잠든 여자를 덮치는 것도 가끔 하면 나쁘지 않다. 어디까지나 가끔 할 때의 경우다. 통상적으로는 일어나 있을 때 덮치는 게 맞다. 내 자지가 박혔을 때의 반응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럼 왜 여자의 옷을 찢는 거냐? 그리고 찢을 거면 확 찢으면 되지. 왜 일부만 찢는 거냐?
“다 깊은 뜻이 있는 거다.”
나는 그녀의 옷을 전부 찢지 않았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티셔츠 일부와 청바지 일부를 찢는다. 일단 청바지의 경우 허벅지와 엉덩이가 보일 정도로 찢었다. 검은색 스포츠 팬티를 입고 있었다. 땀 때문인지 약간 축축했다.
티셔츠는 청바지보다 더 많이 찢었다. 하얀 복근의 중심인 배꼽이 보이고 풍만한 가슴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 스포츠 브라가 엿보인다. 겨드랑이 부위도 시원하게 찢었다. 찢고 난 뒤에는 이게 옷인지 걸레짝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너무 찢어버렸나?’
스포츠 브라도 조금 건들었다. 끈 부분이 일부 끊어지도록 했다. 겉옷이 이렇게 찢어졌는데 속옷만 찢어지면 이상할 테니까.
이후에 나는 그녀 옆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었다. 전파 방해 때문에 인터넷이나 통화는 되지 않았다. 전파 방해는 파이론의 영향이었다. 나는 불만스러운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전파 방해. 이거 어떻게 할 수 없나?”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다. 전파 방해는 내 본체에서 나오는 파장 때문이다. 본체의 파장은 너희가 숨을 쉬며 호흡하는 것과 같다. 내 영역 밖으로 나가면 통화할 수 있을 거다. 급한 일인가?
“…급한 건 아니야. 나중에 해도 되겠지.”
나중에 한하린에게 한 소리 듣겠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더 급한 건 내가 아니라 손가연 쪽이다. 북백 손가의 가주 대리인 그녀가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한국에선 이미 난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파이론. 그녀가 깨어나면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라.”
-쓸데없는 말? 네가 이 여자의 옷을 찢은 거 말인가?
“그래.”
-그러지. 너희 사이의 일은 별로 관심 없다. 내가 여기에 온 건 새로운 던전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서다. 지도를 그려왔으니 참고하도록.
그는 내게 동물 가죽을 건넸다. 동물 가죽을 본다. 지도였다. 나는 지도를 빤히 쳐다봤다. 지도 중심에는 검은색 나무가 그려져 있다. 파이론의 본체인 것 같다. 나무 주위에 붉은색의 표식이 있었다. 던전으로 보인다.
-지도 거꾸로 들었다. 방위는 표시해뒀을 텐데.
“N이 남쪽을 뜻하는 게 아니었나.”
-멍청한 놈.
N이 남쪽을 뜻하는 게 아니라면 북쪽을 뜻하는 것일 거다. 북쪽이 영어로 노스니까.
지도를 다시 거꾸로 바꿨다. 나는 지도를 빤히 쳐다봤다.
“북쪽이 어디지?”
-지도에 있지 않냐.
“아니, 지도의 북쪽 말고.”
파이론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쌍둥이 바위가 있는 방향이 북쪽인 모양이다.
-지도에 표시된 던전은 열흘 내로 처리해라.
파이론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지도에 표시된 던전의 수는 15개. 하루에 2개 이상 던전을 공략해야 했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까지 던전 등급을 알 수 있으니 까다롭군. A급 이상 던전이 없었으면 좋겠다.’
A급 이상의 던전은 흔하지 않게 발생한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가만히 앉아 계획을 짜고 있을 때였다. 내 옆에 누워 있던 손가연의 몸이 움찔 떨리는 걸 확인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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