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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2화 > 1572. 성유니콘 (1,352/2,000)

< 1572화 > 1572. 성유니콘

콰아아아앙!

폭음이 터졌다.

손가연이 휘두른 항마의 검의 열기가 파이론의 본체인 검은 나무로 옮겨붙는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파이론의 화신체가 비명을 내지른다. 효과가 있었다. 매우 뛰어났다.

검은 나무가 타오른다. 새하얀 불꽃이 검은 나무를 태운다. 그러나 검은 나무는 버티고 있었다. 잔가지는 재가 되어 떨어지지만, 굵은 가지와 나무 기둥은 멀쩡했다.

이 정도로 파이론을 처치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누나!”

“알고 있어!”

손가연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아까보다 더 큰 폭음이 울리고, 나무를 태우는 하얀 불길은 더욱 강력해졌다. 검은 나무의 가지와 나뭇잎이 재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나무의 크기가 크기다 보니 흩날리는 재의 양이 만만치 않다. 뿌연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파이론의 비명은 계속 울린다.

나는 이상함을 눈치챘다. 파이론은 저번에 내게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봐라. 지금 파이론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 내게 했던 말과 전혀 달랐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니… 거짓말을 한 건가?’

그런 것치고는 파이론의 화신체는 지나칠 정도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불에 타는 것이 가장 끔찍한 고통이라고 해도 파이론 정도의 강자가 고통을 쉽게 이겨내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건 이상했다.

‘설마 고통에 대한 내성이 없는 건가? 지금까지 고통을 느껴보지 못했거나?’

파이론을 주시하며 뒤를 힐끗 본다. 하얀 불꽃이 검은 나무를 활활 태우고 있었다. 하얀 불꽃. 딱 봐도 특수한 불꽃이다.

‘북백 손가의 하얀 불꽃이라…. 북백 손가는 퇴마 일족이라고도 불린다더니. 그것과 관련 있는 건가?’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불타는 고통에 익숙해진 파이론이 본체를 공격하는 손가연을 향해 떨어졌기 때문이다.

‘고통 탓인가? 움직임이 뻔하군. 게다가 속도도 생각보다 느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앞으로 뛰어가 파이론의 앞을 막아선다.

-비켜라!!!

“넌 내가 상대해주지, 몬스터. 누나는 지금 바쁘니 내버려 둬.”

파지지직.

붉은 전류가 화련비도를 칼날을 타고 흐른다.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방심하지 마라. 상대는 파이론이다. 죽을 뻔했던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라. 그때 유리아를 현실에 소환하지 않았다면, 분명 나는 파이론에게 죽었을 것이다. 물론 눈앞의 파이론과 과거의 파이론은 다른 개체다. 허나 무시하지 못할 힘을 가진 건 똑같다.

‘파이론의 등급은 기본이 A급이다. A급까지 아주 빠르게 성장하지. 그리고 인간과 버금가는 지능을 가져서 그런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

아무리 파이론이라고 해도 쉽게 S급의 벽을 넘을 수 없다.

‘A급 상위. 고통에 몸부림치며 이성을 잃은 지금은 그보다 못하다.’

내가 질 가능성은 없다.

뇌천류(雷天流) 질풍신뢰(疾風迅雷).

질풍신뢰를 사용한다. 붉은 전류가 내 몸을 타고 흐른다. 나는 내 감각이 순간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파이론의 움직임이 약간이지만 느리게 보였다. 내 사고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뇌천류(雷天流) 뇌광(雷光).

최속의 검격으로 놈의 오른팔을 자른다. 하얀 살덩어리가 파란색 피와 함께 사방으로 튀었다. 파이론이 한순간 멈칫했다. 코와 눈, 입이 없는 얼굴이지만, 찢어질 듯 커진 눈동자가 경악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부족하다.’

나는 놈의 오른팔이 아닌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심장. 즉, 마석을 노렸으나, 파이론이 반응하고 피했다.

‘놈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어. 무리를 해서라도 죽인다.’

허공에 새겨진 궤적이 눈에 들어온다. 붉은색의 뇌광. 칼이 휘둘려진 궤적에 붉은 전류가 남아 꺼져가고 있었다.

저것은 내 힘이다.

내게서 시작되어, 내가 사용한 힘이다. 그 힘은 빠르게 꺼져가고 있으나, 보란 듯이 남아 있었다.

‘움직여라.’

내 의지가 허공에 잔류한 뇌전에 닿는다. 붉은 뇌전이 꿈틀거리며 반응한다.

‘반응한다. 하지만 그뿐이잖아. 이 정도로는 부족해.’

좀 더 확실하게 해야 한다. 파이론이 냉정을 되찾기 전에 확실한 일격을 먹여야 한다. 그러나 허공에 잔류 중인 뇌전은 내 의지에 반응만 할 뿐이다. 그 이상은 움직인다.

‘나의 한계군.’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이 한계를 넘을 방법이 있었으니까.

[10초 동안 천재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천재를 범재로 만들어버리는 세계관 최고의 재능을 잠시 빌린다.

영감이 느껴졌다.

자세히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리고, 느끼지 않는 것이 들린다. 몇 단계를 진화한 인간이 된 듯한 느낌이다.

허공에 잔류한 적뢰가 일제히 움직인다. 중심으로 모여들어 역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익숙한 형태다. 저것은 만뢰(卍雷)다.

칼을 손에 쥐지 않은 왼손을 만뢰를 향해 뻗는다. 화련비도의 힘을 억제하고 만뢰를 사용한다. 손바닥을 중심으로 시퍼런 뇌전이 모여 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왜 화련비도의 힘을 억제했는가.

‘사이다와 사이다를 섞어봤자 그건 사이다에 불과하지. 하지만 사이다와 콜라를 섞으면? 새로운 탄산음료가 탄생한다!’

뇌천류(雷天流) 이중공명(二重共鳴) 만뢰나선(卍雷螺旋).

두 개의 만뢰가 합쳐지고, 섞이며, 레이저처럼 앞으로 뻗어나간다. 만뢰나선은 파이론의 심장을 꿰뚫고도 계속해서 뻗어나갔다.

가속되었던 사고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나는 약간의 탈력감을 느끼며 정면을 쳐다봤다. 최소 30m 이상의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땅이 패여 있고, 나무는 박살 나 있다.

[천재의 시간을 종료합니다.]

‘좋은데.’

나는 씨익 웃으며 아래로 시선을 떨궜다. 심장이 뚫린 파이론은 시체처럼 널브러졌다. 죽은 건 아니다. 파이론을 죽이려면 검은 나무를 없애야 한다.

“누나. 난 이 새끼 이겼어. 누나는 어때?”

“…….”

대답이 없었다. 시체를 보며 승리감을 만끽하던 나는 고개를 획 돌려 손가연의 상태를 확인했다. 손가연은 검은 나무에 항마의 검을 박은 채로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땀이 폭포수마냥 흐른다.

섹스를 할 때도 땀을 이렇게 많이 흘리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통풍이 되지 않는 라이더 슈트를 입고 있었다. 슈트 안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니 자지에 반응이 갔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손가연이 이상하다. 성욕을 앞세울 때가 아니다.

“누나!”

“…유진아! 땅속이야! 땅속에 뭔가 있어! 땅을 파헤쳐!”

손가연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땅을 파헤치라고 해도 삽을 꺼내서 여유롭게 땅을 팔 시간은 없었다.

푹!

지면에 화련비도를 꽂아 넣었다. 질풍신뢰를 해제하고 모든 마나를 칼날에 집중한다.

뇌천류(雷天流) 극기(極技) 폭진뢰(爆震雷).

콰콰콰콰콰콰쾅!

지면이 폭발했다. 땅속의 흙들이 위로 솟구친다. 흙 속에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사람의 시체?’

치솟은 흙더미 속에 사람의 시체가 섞여 있었다. 시체에 나오는 핏물이 신선하다. 방금 죽었다. 폭진뢰의 폭발에 휘말려 죽은 것이다.

‘땅속에 사람이 숨어 있었다고?’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땅속에서 내 기감을 속였다? 엄청난 실력의 암살자다. 나는 살짝 당황하며 폭진뢰로 만들어진 구덩이 속을 쳐다봤다.

“이건….”

인간들이 보였다.

웅크린 인간들이다. 나무의 잔뿌리 같은 얇은 덩굴이 웅크린 인간의 머리에 박혀 있었다.

‘암살자 같은 게 아니라….’

영화나 만화 같은 걸 자주 보면 어지간한 것은 무엇일지 보기만 해도 예측이 간다.

‘저번에 뭘 먹고 사냐고 질문했을 때… 파이론은 의외로 날카로운 질문이라고 반박했지. 이것 때문이었나?’

파이론은 인간을 먹고 있었다.

이상한 건 아니었다. 인간은 먹는 몬스터는 많으니까. 다만, 파이론은 인간의 살이나 피를 빨아먹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지하에 파묻혀 있는 인간들의 몸은 야위었으나 멀쩡해 보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살아있다.

‘살과 피를 먹는 게 아니라면… 마나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저 사람들에게서 마나가 안 느껴져.’

정신.

파이론은 자신의 본체를 정신을 담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사람들 헌터가 아니야. 근처에 민간인도 없을 텐데 어디서 납치한 거지? …납치한 게 아니라면?’

“유진아! 그들을 죽여! 그들의 영혼은 이미 파이론에게 잡아 먹힌거나 다름없어! 파이론은 그들의 영혼을 소모해서 버티고 있는 거야!”

손가연이 소리쳤다. 그녀는 다급했다.

-내가 고작 이 정도로 죽을 것 같나?!

쩌억!

불타는 검은 나무의 몸통이 갈라진다. 갈라진 틈에서 새하얀 화신체가 걸어 나온다. 그 몸에는 투명한 점액질이 묻어 있었다. 막태어난 화신체다. 화신체가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바닥에 착지한 화신체는 움직이지 않고 이쪽을 노려본다.

‘약하다. 막 태어나서 그런가?’

나는 히죽 웃었다. 아까 그 화신체라면 몰라도. 이 화신체를 상대로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화련비도를 휘둘러 구덩이 속의 사람을 죽이고 화신체를 겨눴다.

“크크크. 그 약해빠진 몸으로 우릴 상대하겠다고?”

-네놈들이 지쳐있는 걸 모를 줄 아나? 이 정도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놈의 말대로 나와 손가연은 지쳐있었다.

[완전 회복을 사용합니다.]

지금은 아니다.

뇌천류(雷天流) 뇌음보(雷音步).

파이론에게 달려갔다. 파이론은 내 기운이 회복된 걸 느꼈는지 주춤거렸다.

-힘을 숨기고 있었나?!

“아니, 힘을 사용한 거다! 철산고!”

파이론에게 어깨빵을 날린다. 놈은 내 마나가 듬뿍 담긴 어깨빵을 버티지 못하고 온몸이 터졌다.

쩌억쩌억쩌억!

검은 나무의 몸통이 계속 갈라지며 화신체가 나타난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내 화신체는 아직 남아 있다!

“허세 부리기는.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화신체는 하나뿐이란 걸 모를 줄 알아?”

“야, 성유진! 땅속에 있는 일부터 처리해! 붙잡힌 사람들이 파이론이 버티는 힘의 근원이라고!”

“아, 잠깐만 누나. 3분만. 저 새끼 처음봤을 때부터 띠꺼웠다고. 바로 끝내면 시시하잖아. 3분만 줘.”

“1분. 분내로 끝내!”

“그러지 뭐.”

뇌천류(雷天流) 질풍신뢰(疾風迅雷).

[가속을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4]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3]

전력을 다해 뛰었다. 총알처럼 화신체 앞에 도달했다. 칼을 휘둘러 반으로 갈라 죽였다. 옆에 있는 다른 화신체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고개를 돌리는 것 정도가 전부다. 반응이 너무 느려서 즐거웠다.

“좆밥 새끼. 크크크.”

손날을 휘두른다. 놈의 뚝배기가 뭉개지고 파란 피가 터진다. 피가 파란색이라 그럴까? 생물을 죽이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뭐, 피가 빨갛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다 죽여주마!”

계속 날뛰었다.

파이론의 화신체를 모조리 죽였다.

그 뒤에는 뿌리를 통해 정신을 쪽쪽 빨리고 있던 50명 정도의 인간을 죽였다.

그리고 검은 나무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

숲속에 검게 탄 작은 나뭇가지 하나가 떨어졌다.

나뭇가지는 조용한 숲속에서 들썩거렸다. 그리고 나뭇가지의 끝부분에서 새싹이 자랐다. 싱그러운 녹색이 아니라 칙칙한 검은색이었다.

새싹은 땅에 내려앉았다. 뿌리가 땅속의 양분을 빨아들이며 새싹의 몸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새싹은. 아니, 파이론의 정신체가 생각했다.

‘내가 인간들을 너무 얕봤다. 다음에는 실수 ㄸㆍ위 하지 않는다.’

그때, 파이론은 인기척을 느꼈다.

“이것 봐, 누나. 내 말 맞지? 이 새끼 살아 있다니까.”

“…진짜였네. 유진이 너, 감이 좋구나.”

“감이라니. 지능이야. 지능.”

파이론은 경악했다.

-어떻게! 어떻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지?!

“넌 정신체와 본체를 따로 보더라. 그 검은 나무를 그릇이라고 했지? 보통 인간은 영혼과 육체를 따로 안 봐. 왜냐? 분리하고 싶어도 못 하거든. 그리고 만화 같은 걸 보면 말이야, 육체를 그릇이라고 말하는 놈들의 특징이 밥 먹듯이 육체를 바꾼다 말이지.”

성유진이 검은 새싹을 향해 걸어갔다.

“무엇보다 넌 뒤질 때까지 살려달라고 구걸하지도 않았잖아. 그래서 무슨 수가 남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

성유진이 발을 들었다.

-사, 살려다오.

“싫어, 병신아.”

콱콱!

성유진이 검은 새싹을 짓밟았다.

“나보고 멍청하다고 했지? 넌 나보다 더 멍청해.”

-끄아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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