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5화 > 1575. 성유니콘
“크크. 좀 버티는군? 팔이 잘리고, 눈알이 터져도 버틸 수 있나 볼까? 뇌가 물리적으로 휘저어지는 기분을 느끼고 싶나?”
“할 수 있으면 해 봐.”
고숙은 당당한 내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있는 대로 썼다. 붉은 보석을 먹고 하얀 피부로 변하면서 능력이 진화하고 재생력을 얻은 모양인데 얼굴에 새겨진 그의 크고 긴 흉터는 재생되지 않았다.
“내가 못 할 것 같나? 나는 심장이 찔려도 죽지 않는다!”
“그것보다 그 빨간 보석은 어디서 났냐? 좋은 건 공유해서 쓰자고. 능력이 진화하는 건 영구적이냐? 아니면 일시적이냐?”
나는 고숙이 먹은 붉은 보석에 굉장히 관심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능력이 진화한다는 게 진짜라면, 유희 생활 어플이 진화하면 어떻게 될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자식이! 허세 부리고 있군. 적당히 가지고 놀다 죽여주려고 했건만… 패왕도문도 곧 들이닥칠 테니 이제 그만 죽어라!"
그는 연검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가슴팍에 칼을 찔러넣으려고 한다. 그보다 내가 먼저 움직였다. 화련비도로 내 허벅지를 찔러 넣어 자해한 것이다.
허벅지에서 강렬한 통증과 함께 피가 터져 나온다. 동시에 고숙의 허벅지에도 나와 같은 상처를 입었다.
"끄아아악! 이 자식이…!"
확실히 고숙의 상처는 내 것보다 얕았다. 그렇다고 위험하지 않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작은 상처라고 할지라도 계속되면 위험해진다. 그러니 놈의 상처가 회복되기 전에 몰아붙일 필요가 있었다.
푹!
반대쪽 허벅지에 화련비도를 찔러 넣었다.
“아아아아악!”
자해를 한 건 나인데,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건 고숙이었다. 실제로는 내가 더 고통을 느낄 것이다. 같은 상처라도 내가 더 크고 깊게 입으니까.
익숙함의 차이라고 본다. 나는 죽으면서 고통에 익숙해졌다. 아마 절대정신의 영향도 있을 것이지. 그러나 상대는?
'절대정신이 없고, 이런 싸움을 밥 먹듯이 해온 적도 없을 테지.’
고숙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이를 빡빡 갈았다.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전투를 끝내기 위해 자살을 행한다. 물론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화련비도로 스스로의 왼팔을 잘랐다.
서걱.
팔이 잘리는 기분은 좆같았다. 그러나 상대는 더 좇같을 것이다.
“이 미친놈이이이이!!"
나는 고숙의 왼팔을 살폈다. 깔끔하게 베인 내 왼팔과 달리 놈의 팔은 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달랑달랑. 놈이 분노에 찬 소리를 내지를 때마다 겨우 붙어 있는 팔이 흔들린다. 저럴 바엔 차라리 깔끔하게 팔이 떨어지는 편이 훨씬 나았다.
“네가 먹은 붉은 보석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말해라. 그럼 깔끔하게 죽여주마."
“닥쳐라! 이건 내 능력이다!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것도 나다!”
고숙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찌를 준비를 한다.
망설임이 있었다.
심장을 찌르기 직전에 발생한 아주 찰나의 망설임. 아마도 지금 상처가 너무 많으니 자기도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겠지.
“뭐하냐.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화련비도를 내 복부에 찔러 넣었다. 화련비도를 천천히 움직인다. 화련비도의 날카로운 칼날이 내장을 베어 가르며 뒤섞는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고숙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건 나도 힘들다. 나는 이를 악물며 비명이 삼켰다. 놈처럼 바닥에 쓰러져 버러지처럼 꿈틀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알았다! 내가 졌다! 내가졌으니 멈춰라! 멈추라고!!”
복부에서 화련비도를 뽑았다. 피와 함께 잘린 내장 조각이 딸려 나온다.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죽음이 코앞에 있었다. 앞으로 버틸 수 있는 건 1~2분이 한계다.
나는 비틀거리며 쓰러진 고숙에게 다가갔다. 고숙은 이해 불가의 괴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날 올려봤다.
"말해."
“신단은 당간부로부터 선물 받았다.”
“그걸 신단이라 부르는 건가. 신단은 던전에서 얻은 거냐? 아니면 누군가가 만든 거냐?”
“나도 모른다! 뇌물을 바친 대가로 몇 개 받은 것뿐이다! 내가 신단에 관해 아는 건 복용하면 일시적으로 능력과 신체를 진화시켜주는 것뿐이다!"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 뻔히 보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놈의 상처는 회복되고 있었다.
“그 당간부는 누구지?”
“모른다.”
“모른다고? 지금 나랑 장난하냐? 넌 모르는 놈에게 뇌물을 바치냐?”
“그 당간부의 브로커 쪽이 내게 먼저 접선했다! 터무니없이 강한 놈이었기에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실제로 브로커와 만난 후부터 작업이 수월해졌다.”
“그 브로커가 누구인지는 조사도 안 했냐?"
“왜 해야 하지? 일이 잘되고 있으니 굳이 브로커와 날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아, 그거 아나? 한국으로 진출하자고 제안한것도 그 브로커였다! 나쁘지 않은 의견이라 난 받아들였지.”
나는 미간을 좁혔다.
원하는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대화를 이어 나갈수록 짜증만 날 뿐이다.
‘이놈은 결국 이용당하는 사냥개에 불과했다는 거군. 이놈에게 신단을 넘긴 건… 선물일 리 없지. 일종의 실험인가?'
고숙은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자각도 없어 보였다. 나는 심장이 느릿해지다 못해 멈춘 것을 느끼면서 그에게 물었다.
“신단을 내놔.”
“목소리가 아까와 다르군. 크크. 네놈, 죽어가고 있군.”
“신단을 내놓으라고 했다.”
고숙이 낄낄 웃었다. 갑자기 미쳐버리기도 한 것일까? 아니다. 놈은 내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신단은 없다! 방금 먹은 게 내가 가진 마지막 신단이었다! 왜, 꼽나? 꼬우면 죽여보던가! 죽일 수 있으면 말이야!"
바닥에 쓰러져 있던 고숙이 몸을 일으킨다. 그의 상처는 일부 회복되어 있었다.
“네놈이 한계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다. 빨리 죽어라!”
고숙이 연검을 들고 자신의 복부를 찔렀다. 내 복부에 상처가 났다.
[죽음 저항이 발동했습니다. 앞으로 15초간 죽지 않습니다.]
나는 쓰러지기 직전에 다리에 힘을 줘서 몸을 꼿꼿이 세웠다. 죽음 저항이 발동하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15초가 지나기 전까지 죽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날 보는 고숙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이 커졌다.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다.
“왜, 왜 쓰러지지 않는 거냐? 네놈은 한계 일 텐데?!”
“한계가 아니니까 그렇지.”
하나밖에 없는 손에 화련비도를 쥐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자해를 시작한다. 우선 가슴팍에 화련비도를 찔러 넣었다.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을 꿰뚫는다.
"어어어억!"
고숙의 가슴팍에서 피가 쏟아져 나온다. 놈의 표정에 절망이 깃든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직감한 것이다.
칼을 계속해서 휘둘렀다.
“네, 네놈은 대체….”
스스로의 목을 뚫고 눈알을 터트리고, 마지막에는 머리에 화련비도를 박았다.
그리고 죽음 저항이 끝나기 전에 완전 회복을 사용했다.
[완전 회복을 사용합니다.]
내가 회복되면 놈도 회복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시체가 된 놈은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나는 놈의 시체를 힐끗 보고 몸을 돌렸다. 손가연과 류자영은 아직 싸우고 있기에 도와야 한다.
내가 합세하자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렀다. 안 그래도 우세하던 전투의 흐름이 우리 쪽으로 확 기운 것이다.
“유진아. 너 괜찮은 거야?"
“특수한 아티팩트라도 가지고 있는 거냐?”
전투가 끝난 뒤에 손가연과 류자영이 내게 물었다. 그녀들도 내 전투를 보고 기이함을 느낀 것이다. 나는 대충 둘러댔다.
“비장의 한 수 같은 거야. 자세히는 묻지 마. 이겼으니 됐잖아.”
이것으로 복수는 끝났다.
비록 파이브 새드의 노지수를 놓치긴 했으나, 이 일은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
‘놈이 말한 브로커가 좀 신경 쓰이긴 한데.'
브로커는 엄밀히 말하면 복수 대상이 아니었다. 나를 죽이려고 한 건 황하문의 고숙이었다.
‘그 브로커를 상대하려고 하면… 황하문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가시게 될 거란 느낌이 와.'
여긴 한국이다.
‘신단’이라는 물건이 신경 쓰이긴 해도, 그 브로커를 찾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손가연은 고숙의 시체를 살피고 있었다. 신단을 먹어 하얗게 변했던 고숙의 피부는 원래 색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고숙의 재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는 그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나, 그건.”
“한국에서 그 꼬마가 사용했던 돌이야. 우리가 파이론의 영역으로 가게된 돌. 그는 아마도 재산을 챙긴 뒤에 이걸 사용해 이곳에서 벗어나려고 했을 거야."
“젠장. 저것도 어디에서 났냐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혀를 차는 나와 달리 손가연은 차분했다.
"이걸 손에 넣었으니 괜찮아. 조사해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우리는 위로 올라갔다.
패왕도문과 황하문의 전투는 일방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당연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마약 조직에 불과한 황하문을 중국 최고의 길드인 패왕도문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우리는 패왕도문을 도왔다.
황하문은 멸망했다.
그러나 황하문에 대해 외부로 알려지진 않았다.
언론은 통제되었다.
중국은 여전히 공산주의 국가였고, 공산당이 마음만 먹으면 중국 내에서 못할 것은 없었다.
패왕도문은 언론 통제를 거부하지 않았다. 황하문으로 향하는 시선이 적어야, 황하문이 가진 재산을 꿀꺽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나도 언론 통제를 반겼다. 만에 하나 내가 엮여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바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아직 볼일이 남았다. 반면에 손가연은 급하게 한국행 비행기를 알아봤다.
“미안, 가문이 빨리 오라고 계속 재촉해서… 지금 당장 귀국해야겠어. 유진이 너는?"
“난 패왕도문에 볼일이 있어.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에 귀국할 거야."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손가연은 떠났다. 나는 공항에서 그녀를 배웅해준 뒤에 패왕도문으로 갔다.
오랜만에 류청설과 류자영을 만났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헤어질 수는 없었다.
패왕도문에 도착한 나는 거인과 마주했다. 2.2m가 넘는 거대한 키의 남자. 패왕도문의 문주이자, 중국의 S급 헌터인 류기천이다. 그는 나를 보며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몇 년 전에 본 그놈이 맞느냐? 무인의 관상이 아니었거늘, 지금 보니 고수가 되어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