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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581화 (1,361/2,000)

< 1581화 > 1581.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청은발의 메이드가 내 앞을 걸으며 안내한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에 일정한 보폭. 꼿꼿이 세운 등허리와 차분히 살랑이는 은색 머리카락. 유리아는 메이드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품이 넘쳤다.

“메이드 일을 할 필요는 없어. 넌 이제 메이드가 아니니까.”

유리아는 이제 메이드가 아니었다. 나의 약혼녀다. 가신들도 모두 동의했으며, 모든 일이 정리된 뒤에는 나와 결혼식을 올려 정식으로 프루커스 가문의 안주일이 될 것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저는 영원히 주인님의 메이드입니다. 메이드로서, 그리고 아내로서 주인님께 영원히 봉사하고 싶습니다.”

듣기 좋은 말이었다. 나는 걸음 속도를 높여 유리아의 옆에 섰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손을 움직여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메이드복이 잘 어울리긴 해."

“감사합니다."

“근데 가신들이 보면 뭐라 할 것 같은데.”

“그들의 목줄은 제가 쥐고 있습니다. 그들은 감히 왈가왈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처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됐어.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 태반이지만, 지금 없애버리면 영지 운영에 차질이 생기겠지."

프루커스 백작가는 대영지다. 지금 가신들을 처리했다간 행정 업무에 공백이 생긴다. 그리고 보나 마나 그 부담을 유리아가 맡게 되겠지.

‘당장 내게 반기를 드는 놈들은 없는 것 같으니… 당분간은 내버려 둬도 상관없어.'

때가 되면 내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놈들로 가신 자리를 채울 생각이다.

"레오시오랑 마왕의 수색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레오시오는 프리실라 님과 샤르넬 님이 여전이 추적 중입니다. 아쉽게도 단서는 발견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마왕의 경우엔 정보가 아예 없습니다. 미둥 도시 라비트를 계속 조사하고는 있으나… 성과가 없습니다.”

"미궁 깊숙한 곳에 숨어 있을 수도 있겠군."

“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하는 쪽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랜드 오러 마스터, 그랜드 아크 메이지.

대륙 최강의 무력을 보유한 그녀가 직접 나선다면 미궁 따윈 단숨에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미궁으로 보낸다면 일주일 내로 성과를 가져오겠지.

그러나.

‘…그놈이 했던 말이 신경 쓰이네. 유리아가 마왕에게 살해당했다고 했지.'

관속에 있던 유리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가짜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계속 떠오르니 찝찝하면서도 불쾌했다.

‘네크로맨서가 되는 대로 지껄인 거짓말일 수도 있어.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겠지. 그림자 사슬 글레이프가 그 미궁에 정말로 있다면 유리아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나는 유리아를 혼자 보내지 않을 것이다.

“유리아. 전쟁이 완전히 수습되고 공작위를 받을 때까지 몇 개월이 걸릴까?”

“우선 비어있는 왕좌의 주인부터 가리겠지요. 아일린 공주가 순응한다는 전제하에 최소 1개월의 시간을 걸릴 것입니다.”

“그 후에 너랑 결혼식을 올리겠네. 기대되는군."

“…네.”

유리아가 뺨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줍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나까지 기분 좋아진다.

“가장 큰 변수인 마왕부터 끝장내야겠어. 유리아, 미궁 도시 라비트로 떠날 준비해. 오래 걸릴까?”

마왕을 제외한 다른 일, 아일린 공주나 레오시오 문제는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

아일린 공주는 정치적으로 패배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기껏해야 나와 굴욕적인 협상을 하는 것일 테지.

그걸 위해 지금 아일린 공주가 접견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거고.

레오시오? 당장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놈이었다. 그리고 에이션트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유리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싸운다면 100% 이긴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AM부대와 골든 로즈 기사단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AM부대는 전투 메이드로 이루어진 특수 작전 부대다.

골든 로즈 기사단은 내게 충성하는 여기사로 이루어진 기사단이다. 순수 무력으로만 따지면 골든 로즈 기사단이 훨씬 뛰어나다.

“AM부대로 하지. 전쟁에서 수고한 골든 로즈 기사단에겐 휴식을 줘야지."

“알겠습니다.”

접견실 앞에 도착했다. 문고리를 향해 뻗어지는 유리아의 손을 잡아 저지했다. 유리아가 의아함 섞인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잡고 입술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그녀의 눈이 잠깐 커졌다. 그러나 이내 눈을 감고 키스에 집중한다. 부드러운 입술과 달콤한 타액을 5분 넘게 맛봤다.

“하아.”

그녀가 한숨을 내뱉는다. 열기가 가득 담긴, 찐득한 한숨이다. 그녀는 무언가를 원하는 눈으로 날 지그시 바라봤다.

“제 몸을 또 이렇게 달아오르게 만드시고… 곤란해요, 주인님."

코앞에 있는 접견실에 아일린 공주가 기다리고 있으니 곤란하긴 하겠지. 그러나 아일린 공주의 입장상 나를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다. 갑을 관계는 명확하니까.

“진짜 곤란해?”

“그럴리가요.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전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눈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말한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접견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일린 공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짝이는 금발과 사피어어같은 눈동자. 원작의 히로인은 그녀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기품 넘치는 공주의 아우라도 가지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프루커스 백작.”

“오랜만입니다, 공주마마.”

아일린 공주의 곁에는 검은 머리의 시녀가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이름이 아리드나라고 했던가. 신비한 회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오러 익스퍼트 상급의 암살자다.

'…못본 사이에 더 강해졌군. 마스터는 아니고… 최상급의 경지에 올랐나.’

대단했다.

실력 면에서가 아니라 충성심 면에서. 오러 익스퍼트 최상급이면 귀족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실력이다.

'충성심으로 따지면 유리아가 더 뛰어나지만.'

나는 아일린 공주 맞은편 소파에 유리아와 함께 앉았다. 유리아를 품 안에 끌어당긴다. 유리아는 저항하지 않고 내 품에 안겨들었다.

무례였다. 공주 앞에서 보일 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일린 공주는 따지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일어선 채로 유리아에게 말했다.

“헬브리트 공녀… 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공주마마, 헬브리트 가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녀 또한 아닙니다. 유리아라고 불러주십시오."

"알겠다."

아일린 공주는 유리아에게서 시선을 뗐다. 헬브리트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 이상, 정치적으로 유리아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녀에겐 다행인 일이다. 헬브리트 공작가는 몰락했으나, 그 영향력은 아직 왕국에 남아 있었으니까.

“프루커스 백작. 앉아도 되겠습니까?"

“아, 내가 예의가 없었군요. 예. 앉으십시오."

아일린 공주가 소파에 앉았다.

무의식적으로 손이 움직였다. 품에 안은 유리아의 가슴을 손에 쥔 것이다. 피부 사이에 옷이 있었으나, 그 너머로 숨길 수 없는 최상의 촉감이 느껴졌다.

‘저택의 메이드들은 내 희롱에 익숙하지만… 아일린 공주에겐 다르지.’

도발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무례. 나는 아일린 공주를 바라보며 유리아의 가슴을 계속 주물렀다. 유리아의 숨소리가 조금씩 가빠진다.

아일린 공주는 어떠한 반응도 없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왕국의 미래를 논하기 위해 프루커스 백작을 찾아왔습니다.”

나는 유리아의 가슴에서 손을 뗐다. 유리아는 아쉬움이 느껴지는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는 정말로 유리아를 덮쳐버릴지도 모른다.

“공주마마. 라펠리 왕국은 대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대륙 최강국이 되었지요. 대륙의 역사는 라펠리 왕국을 중심으로 하여 흐를 것입니다.”

“저의 오라버니, 에이든 왕자에겐 그 찬란한 미래를 이끌 능력이 없습니다. 장담하죠. 그가 왕좌를 차지한다면, 왕국은 10년 내로 기울 것입니다."

“에이든 왕자 주위에는 유능한 신하들이 있습니다. 저도 있지요. 마마께서는 저를 비롯한 신하들을 믿지 못하십니까?”

“…그럴 리가요. 다만, 에이든 왕자는 왕의 그릇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세요. 그는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신하 또한 제 입맛대로 갈아 치울 것입니다.”

아일린 공주는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나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내 생각과는 다르다. 에이든 왕자는 완벽한 꼭두각시였다. 그는 내가 가진 힘을 알고 있고,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제 생각과는 다르시군요.”

“프루커스 백작․ 그대가 허례허식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아일린 공주가 자세를 다잡는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주시했다. 그녀에게서 여왕의 품격이 느껴졌다. 찌질한 에이든 왕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왕좌는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저를 지지해 주십시오."

여전히 내 품 안에 안겨 있는 유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에이든 왕자는 절 위해 뭐든지 하기로 했습니다. 제게 뭘 주실 수 있습니까?”

“공왕의 지위를 드리겠습니다. 독립을 원하신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프루커스 공국.

별로였다.

귀찮게 뭐 하러 국가를 세우는가. 내가 원하는 건 국왕의 자리가 아니다. 국가의 뒤에서 조종하는 자리지.

아일린 공주는 그 외에도 내게 줄 수 있는 혜택들을 말했다. 원하는 영지, 무제한 무역권 등등 평범한 영주들에겐 하나 같이 군침을 흘릴만한 것들이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영주에게는 말이다.

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듣고 있자, 아일린 공주는 말을 멈추었다.

“제 제안이 마음에 안 드시나 보군요.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에이든 왕자는 개처럼 짖었습니다.”

"……."

“마마께서도 그 정도는 해야 왕자와 같은 선상에 설 수 있을 겁니다.”

"왈왈."

망설임 없이 개소리를 흉내 낸다. 이 정도는 굴욕도 아닌 모양이다.

“개는 옷을 입지 않습니다.”

"……."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아일린 공주는 자존심을 전부 버리지 못했다. 모두 버리고 내게 굴복했더라면, 나는 에이든 왕자가 아닌 아일린 공주를 선택했을 것이다.

순간 살기가 느껴졌다. 아일린 공주가 아니다. 그 옆의 시녀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살기를 드러낸 것이다.

내 품에 기대고 있던 유리아가 자세를 바로잡는다.

"읏....”

살기가 사라지는 동시에 시녀가 비틀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아마도 유리아가 시녀에게 살기를 보냈을 것이다.

“그만. 프루커스 백작, 제 시녀의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용서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한 번쯤은 실수하길 마련이니까요.”

공주의 시녀는 메이드복이 잘 어울릴 것 같은 미녀였다. 용서하기 쉬웠다.

“공주마마. 제가 제안하겠습니다. 시녀를 제게 주십시오. 마마의 머리에 왕관을 얹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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