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2화 > 1582.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공주마마. 제가 제안하겠습니다. 시녀를 제게 주십시오. 마마의 머리에 왕관을 얹어드리겠습니다.”
아일린 공주는 동요하지 않았다. 지독할 정도로 철저한 포커페이스다.
“프루커스 백작. 저택을 둘러보았습니다. 여자들뿐이더군요. 그것도 미모가 뛰어난 여자들. 백작께서 여자를 좋아하신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설마 제 시녀까지 탐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는 아셔서 다행이군요.”
“……아리드나는 저의 가장 소중한 친우이자, 가장 충직한 신하입니다. 아리드나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아리드나를 바라봤다. 시녀도 표정 관리가 완벽했다.
“거창한 이유는 없습니다. 가지고 놀기 위해서죠.”
“…어떤 방식으로 가지고 노는 겁니까?”
“남자가 여자를 가지고 노는 방식이야 뻔하지요. 침대로 끌고 가 여기저기 만지겠지요. 그러다 지겨워지면… 부하들에게 대충 던지겠죠. 공주마마께서도 아시겠지만, 내 부하 병사 중에는 전쟁 약탈에 맛 들인 놈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놈들은 일단 여자이기만 하면 세 번째 다리를 세우고 달려드는 놈들입니다.”
전부 구라였다.
내가 미녀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일은 없었다. 겁을 주기 위한 구라였다. 싸늘해진 분위기를 보니 구라는 먹혀들어 간 것 같았다.
“공주마마. 어쩌시겠습니까? 이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히죽 웃으며 아일린 공주의 선택을 지켜봤다.
아일린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한층 싸늘해진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봤다.
“제가 프루커스 백작을 잘못 본 것 같군요. 오늘 당신이 했던 말들은 잊을 테니, 제가 했던 말들도 잊어주십시오.”
“그대로 나가시려는 겁니까? 아무 소득도 없이? 공주마마. 왕좌를 차지한 에이든 왕자가 그대를 내버려 두리라 생각하십니까?"
“백작, 왕좌의 주인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시녀와 함께 접견실 밖으로 나갔다.
쾅!
소란스럽게 닫히는 문을 보아 도발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놀랐다. 아직도 내게 분노할 힘이 남아 있을 줄이야.
'허세인가?'
아일린 공주는 이유 없이 허세를 부릴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무언가 내가 모르는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품에 안겨 있는 유리아에게 물었다.
"유리아, 어떻게 생각해?"
“발악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명령하신다면… 아일린 공주를 잡아 오겠습니다.”
“됐어. 그 발악이 끝났을 때 굴복할 아일린 공주가 더 재밌을 테니까.”
아일린 공주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내 정적들을 모아 연합하는 것이 전부일 거다. 나를 싫어하는 귀족들이 제법 있으니까.
‘그놈들을 하나씩 없애다 보면 자기가 얼마나 멍청한 선택을 했는지 깨닫겠지.'
고개를 내린다. 마침 유리아가 고개를 올렸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포갰다. 내 손은 그녀의 옷을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
프루커스 백작가를 나서는 아일린 공주의 발걸음은 가볍지 못했다. 아일린 공주와 아리드나 시녀가 마차에 올라탔다.
“공주님. 프루커스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너를 버리라고?"
“일개 시녀와 왕위. 어느 쪽이 더 무겁고 중요한지는 아시지 않습니까.”
“넌 일개 시녀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 그리고 프루커스 백작이 약속을 지키리란 확신이 없다. 종잡을 수 없는 남자다. 손바닥 뒤집듯이 자신의 말을 번복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남자가 대체 왜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후우.”
아일린 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답답했다. 유진 프루커스 백작은 원정에 성공해버리며 왕국의 실세가 되었다. 돈이면 돈, 무력이면 무력. 그 모든 게 압도적이다.
'에이든. 그놈이 왕위에 오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날 치우려고 할 거다. 타국으로 시집을 보내든, 사람을 시켜 암살하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일린 공주는 맞은 편에 앉은 아리드나를 바라봤다. 아일린 공주는 자신이 가진 무기를 활용할 줄 알았다. 그게 설령 더러운 짓이라 해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미 몇 번 저질렀고.
“아리드나. 프루커스 백작을 암살하는 건… 가능한가?”
“불가능합니다. 프루커스 백작은 오러 마스터입니다. 운이 좋아 암살의 기회가 있다 하더라도… 그의 곁에는 유리아 그레이스가 있습니다.”
암살이 불가능하다는 건 아일린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그저 답답해서 나온 말에 불과했다.
“유리아 그레이스. 헬브리트의 이름을 버린 그 공녀가 그렇게나 강한가?”
유리아를 떠올린 아리드나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감히 척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저 따위는 언제든지 그녀에게 죽을 수 있었다는 것뿐 입니다."
“괴물이란 뜻이군. 주의해야겠다.”
“…공주님.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공주님이니 분명 계획이 있으시겠죠. 프루커스 백작에게 반하는 귀족들을 모으실 겁니까?"
아일린 공주는 잠깐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프루커스 백작과 대립할 배짱을 지닌 귀족은 적을 테고, 설령 모두 모인다 하더라도 프루커스 백작에게 대항할 힘이 부족하다.”
“귀족이 아닌 다른 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외세의 힘을 경우에 두고 계신가요?”
“그건 미래를 팔아먹는 악수다.”
“그렇다면….”
“마탑. 프루커스 백작이 코리아 상단을 운영하며 대륙의 돈을 긁어모으면서 마탑의 이권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들이제대로 정신이 박혀 있다면…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걸 알 것이다. 그들에게 이권을 약속하고 포섭할 생각이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이 부족하군.”
아일린 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탑과 마법사. 얼핏 보면 신비하면서도 고고해 보이는 단어들이지만, 실제로는 힘을 가진 장사치에 불과했다. 마탑과 손을 잡으려면 상당한 이권을 내줘야 할 것이다. 일이 잘 풀려 왕위에 올라도 썩 기분 좋지는 않겠지.
“그냥 다 포기해버리고 도망칠까.”
“…저는 공주님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못 들은 거로 해라. 답답해서 나온 헛소리다."
아일린 공주는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미궁 도시 라피트는 라펠리 왕국 동북쪽에 있는 특별한 도시다.
이 미궁 도시는 주인이 없었다. 영주가 없다는 말이었다. 귀족들은 미궁 도시를 멀리했다. 도시 중심에 위치한 미궁? 귀족들의 입장에선 상상만으로도 꺼림칙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라펠리 왕실도 미궁 도시의 소유권을 포기했다. 실질적으로 미궁 도시를 운영하는 건 모험가 길드다. 대신 라펠리 왕실은 미궁에서 얻는 부산물에 우선권을 가진다.
나는 AM부대 메이드들과 함께 이 미궁 도시 라피트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 도시 중심에 있는 미궁이었다. 커다란 해골 바위산 동굴. 딱 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줄줄 흘린다.
‘미궁 도시라.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지만 미궁 도시에 갔지.'
거기서 꽤 고생을 했었다.
그리고 아마 이번에도 고생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라비트의 미궁은 지하 72층까지 밝혀졌고, 그 아래는 알려지지 않았지. 원작에서도 미궁 도시 에피소드는 나오는데….’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궁에 대해 자세히 다루는 에피소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원작의 카일도 미궁을 완전히 클리어하지 못했다는 거다.
‘모험가들이 많군.’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이 무장을 한 모험가들이다. 그들은 나와 AM부대를 보며 웅성거렸다.
'뭐, 당연한가. 귀족을 볼일이 거의 없을 테니.’
거기다 AM부대는 이름 그대로 메이드들이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녀 메이드들이 나를 둘러싸며 호위하고 있으니 시선을 끄는 것도 당연했다.
귀를 기울이면 그들이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귀족이야?"
“귀족이 왜 미궁 도시에 온 거지?"
“호위가 메이드인가. 이상한 취미의 귀족이군."
“메이드라고 무시하지 마라. 어중이떠중이보다 훨씬 강하다.”
"어느 가문인지 아는 사람?"
혀를 찼다.
예상은 했지만 내 얼굴을 보고서도 내 정체를 모른다.
‘무식한 모험가 놈들. 감히 이 나라의 영웅인 날 몰라봐?’
마음 같아서는 싹 다 쓸어버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무지몽매한 모험가들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 도시를 관리하는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모험가 길드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단정한 옷들로 보아 모험가 길드 직원으로 보였따.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프루커스 백작 각하! 저희 모험가 길드 일동은 프루커스 백작 각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그들 중심에는 거구의 여성이 있었다. 구릿빛 피부에 우락부락한 근육과 매서운 눈빛의 여성이다. 몸 곳곳에 흉터가 보였고, 허리춤에는 도끼를 장비했다. 내 취향의 미녀는 아니었다.
“너는 누구지?”
“미궁 도시 라비트의 모험가 길드 마스터인 타타리라고 합니다.”
“언질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인데 대응이 빠르군. 마음에 들어.”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우락부락한 몸과 달리 그 태도는 무척 공손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모험가 길드 내부로 들어갔다.
타타리의 집무실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 타타리가 음료를 내왔다. 홍차였다. 꽤 값비싼 홍차를 내왔지만, 향기를 맡으니 눈썹이 저절로 구겨졌다.
“…홍차를 싫어하십니까?"
“홍 차향이 쓰레기 같아서 그렇다. 좋은 찻잎인 듯한데… 이렇게 못 끓일 수가 있나.”
“하, 하하하…. 죄,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평소에 홍차를 즐기지 않다 보니 잘 모릅니다….”
“유리아. 홍차를 어떻게 끓이는지 보여줘라.”
"네. 주인님."
유리아가 찻주전자를 잡았다. 그녀는 마법을 이용해 차를 탔다. 그윽한 홍차 향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유리아가 만든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지."
”…대단하군요. 홍차가 이렇게 맛있는 음료인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타타리가 감탄한다.
나는 찻잔을 테이블 위로 강하게 내려두었다. 타타리가 굳은 표정으로 내게 집중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미궁에 대한 정보, 도시민들에 대한 정보. 모든 정보를 내게 넘겨라.“
”…프루커스 백작 각하, 여긴 미궁 도시 라피트입니다. 자유 도시입니다! 백작 각하의 부탁을 들어줄 의무는 없습니다!“
"타타리. 이곳이 미둥 도시라 해서 내 권위가 사라지나?“
"각하의 권위는 존중합니다. 허나, 이곳은 미궁 도시입니다. 미궁에 관한 정보는 내드리겠습니다만, 시민들의 정보까지 내줄 수 없습니다."
"돌았군."
살기를 흩뿌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타타리는 깜짝 놀랐으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뒤를 잡은 유리아가 단검으로 그 목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지기 싫으면 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