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7화 > 1597.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미궁 50층이 붕괴하고 요정의 몸이 된 지 보름이 지났다.
요정이 되어 강력한 힘을 얻었으나, 몸이 작아지면서 여러 가지 불편함도 겪었다. 가장 큰 불편함은 여자를 품에 안기 힘들다는 거다.
'여자를 품에 안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작은 몸으로는 도리어 여자들의 품에 안기게 될 뿐이지.'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내 취향은 아니었다.
지난 보름 동안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덕분에 12층을 내려가며 흩어진 전투 메이드들을 모두 찾았다. 그러나 모두 합류한 건 아니었다. 멜리사를 비롯한 메이드들은 합류하지 못했다. 층과 층이 상당히 떨어져 있는 모양이다.
“백작 각하. 죄송합니다.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클로디아가 내게 말했다. 그녀의 눈 아래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있었다. 지난 보름 동안 그녀는 중요한 일을 도맡아 해주었다. 미궁에서 길을 잃지 않게 지도를 그리고 숨겨져 있는 문이나 함정 등을 발견했다.
게다가 그녀는 거의 1~2시간마다 발정 났다. 난 그녀가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몰래 자위한 것도 알고 있다.
"역시 힘드나?"
“네. 무력의 한계입니다. 백작 각하와 함께 가봤자 저는… 아니, 저희는 발목만 잡게 될 것입니다."
주위를 살폈다. 합류한 메이드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주인님. 인정하기 싫지만… 클로디아의 말대로예요. 저희는 지쳤어요. 아니, 멀쩡한 상태였다고 해도 힘들었겠죠. 미궁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저희만으로 감당하기 힘들어요.”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환경은 점점 더 극한으로 변하고, 나오는 몬스터는 강력해지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오러 익스퍼트인 그녀들조차 버거울 정도다.
천천히 대책을 세우며 내려가면 모르겠지만,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고 보고 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
“어쩔 수 없군. 너희는 이 층에서 기다려라. 지금부터 나 혼자 내려가마. 미궁의 가장 깊은 곳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괜찮겠지."
오히려 혼자 움직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몬스터는 나를 먼저 공격하지 않으니까. 쓸데없는 전투를 모두 무시할 수 있는 거다.
‘문제가 되는 건 길이군. 클로디아에게 적절한 조언을 받아 움직이면 되겠지.'
메이드는 모두 찾았다. 이제 유리아만 찾으면 된다.
“백작 각하. 모험가의 격언 중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걸음을 내딛기 전에 열 번을 생각하라. 요정의 힘을 과신하지 마시고 신중하게 행동하세요.”
“그래. 클로디아. 조언 고맙다."
이후, 홀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해바라기밭이었다. 노란 해바라기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천장은 하늘처럼 새파랗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따스하다. 미궁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아주 평화로워 보이는 곳이었다.
'겉으로는 말이지.'
여긴 미궁이다. 모든 걸 의심해야 한다. 저 하늘처럼 보이는 천장도, 따스하게 불어오는 바람도, 어여쁜 해바라기도.
정면에 있는 해바라기를 향해 천천히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해바라기는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눈치챈 나는 바닥에서 작은 돌멩이를 주워 해바라기를 향해 던졌다. 돌멩이를 맞은 해바라기가 몸을 부풀린다.
그것은 해바라기처럼 생긴 몬스터였다. 씨가 모인 부분은 쩍 벌어지더니 날카로운 혀와 이빨을 내보인다. 잎사귀와 덩굴은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렸다. 해바라기의 노란 꽃잎 중심이 쩍하고 갈라졌다. 그 사이로 시뻘건 눈동자가 나타나 데굴
데굴 구르며 주위를 살펴본다.
끔찍한 해바라기와 눈이 마주쳤다. 해바라기는 여타의 몬스터처럼 나를 무시했다. 움직이는 다른 무언가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눈을 감는다.
‘멀리서 볼 때는 꼼짝없는 해바라기처럼 생겼군.’
꽃으로 의태 하는 식물형 몬스터. 그 자체는 아무 문제 없었다. 신기하지도 않다. 문제가 되는 건 숫자였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전무 해바라기다. 대충 확인해본 결과 진짜 해바라기는 하나도 없고 모조리 몬스터야.'
대충 훑어봐도 2,000마리가 넘는다.
‘보니까 덩굴을 이용해 움직일 수 있는 것 같던데… 클로디아들이랑 같이 오지 않길 잘했군.’
이놈들은 클로디아와 메이드들의 존재를 알자마자 달려들었을 것이다. 좀비처럼 밀려오는 수천 마리의 해바라기 몬스터? 상상만으로도 토악질이 나온다.
‘다음 층으로 내려가려면 수문장을 찾아 처리해야 한다. 수문장은 어디에 있지?'
수문장을 찾기 위해 위로 올라갔다. 다른 층에 비해 천장이 높았다. 진짜 하늘처럼 느껴졌다.
‘천장뿐이 아니다. 넓이도 다른 층에 비해 훨씬 넓다. 얼씨구. 산이나 들판, 거기에 흐르는 강까지 있군.'
한참 하늘을 날다가 멈췄다. 뜻밖의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성?’
검은색의 성이 해바라기밭 사이에 있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성을 보니 이 층은 마치… 귀족의 영지 같군.'
성을 향해 날아간다. 수문장은 높은 확률로 저 안에 있을 것이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하늘을 날 수 있는 내겐 무용지물이었다. 성벽을 가뿐히 넘어서 내성으로 들어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정문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내가 정문 바로 앞에 선 순간이었다.
철커덩!
마치 나를 환영하듯이 문이 저절로 열렸다.
"……."
꺼림칙함을 느끼면서도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의 내부를 둘러본 나는 눈을 치떴다.
‘테브라에 있는 내 저택과 구조가 똑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색깔이다. 전체적으로 어두운색이다. 색깔의 명도가 낮아진 느낌이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리아의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획 돌려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그리고 실망했다. 그것은 유리아가 아니라, 유리아의 형태를 한 새까만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넌 뭐지? 왜 유리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냐?"
“저는 라비트입니다.”
"그 이름은….”
라비트는 미궁 도시의 이름이자, 이 미궁의 이름이기도 했다.
“네. 당신들이 미궁이라 불리는 것의 의지가 바로 저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냥터지기라 할 수 있습니다.”
“유리아는? 유리아는 어디에 있지?”
“그녀는 관리자층에 있습니다. 그림자 사슬 글레이프를 얻기 위해 쉐도우 마스터 그리샤의 시련을 수행 중입니다."
“관리자층?”
“최하층인 이곳의 아래에 있습니다.”
“아래에 있는 관리자층이 최하층이 아닌가?”
“관리자층은 번외층입니다. 사냥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유리아를 만나야겠다. 그 관리자층인가 뭔가 하는 곳으로 날 안내해라.”
“당신이 가봤자 시련의 방해만 될 뿐입니다. 오히려 시련의 기간만 더 길어질 테죠. 그런데도 관리자층으로 내려가시겠습니까?"
눈살이 찌푸려졌다.
머리가 복잡하다.
미궁이 나를 막고 시간을 끈다. 라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미궁은 내게 힘을 줬다. 내가 이렇게 빨리 여기까지 당도할 수 있었던 건 미궁이 준 힘 덕분이다. 물론 미궁이 내게 힘을 줬다는 건 가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호의적으로 나오는 미궁을 보
니 가설이 맞는 것 같았다.
유리아가 정말로 그 시련을 수행 중이라면… 방해해선 안 된다.
"...그 판단은 나중에 한다."
“그러시죠.”
나는 성안을 걸었다. 복도나 장식품. 그 모든 게 익숙했다.
“내부가 익숙하군.”
“저는 임시로 그녀에게 관리자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이 성의 내부는 그녀의 가장 익숙한 곳을 재현한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머무는 곳은 프루커스 백작가이지만, 머문 시간은 테브라 저택이 더 많다. 아직은 테브라 저택 쪽이 더 익숙하겠지.
익숙한 집무실에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의자를 빼내 앉았다. 의자에 앉기엔 내 몸이 너무 작았다. 나는 책상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50층에서 내게 힘을 준 건 너지. 왜 그랬지?”
“원래는 유리아. 그녀에게 힘을 주려고 했습니다. 허나 그녀는 거절하더군요. 너무 완강하였기에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당신이 마왕을 기습해 죽이기를 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실패했지. 그리고 넌 지금도 내게 힘을 주고 있군.”
“현재 저는 마왕에게 좀먹히고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도 저를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시시각각으로 힘을 쓰고 있습니다. 마왕은 저를 소유할 권한이 없습니다. 유리아와 당신이 마왕을 물리쳐 주셨으면 합니다.”
“그 소유권은 누가 가지고 있지?"
“임시 관리자인 유리아가 가지고 있습니다.”
“유리아가 내게 힘을 주라고 했나?”
“아니요. 힘을 준 건 온전히 제 의지입니다."
"왜?"
“알아본 바에 따르면 당신은 그녀의 주인이니까요. 그것만으로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신의 호의를 사는 건, 유리아의 호의를 사는 것과 같다는 계산도 어느 정도 깔려 있었습니다.”
미궁은 꽤 영악한 것 같았다.
“너는 미궁을 사냥터라고 부르는군.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짐작은 가. 너는 고대인들이 이용하던 사냥터였나?”
“네. 이해가 빠르시군요.”
“비슷한 고대 유물을 하나 가지고 있거든. 쉐도우 마스터 그리샤가 주인이었겠군."
“맞습니다. 당신에게 설명하기 위해 준비한 말들이 모두 쓸모없어졌군요.”
라비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미궁까지 날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 거다.
‘뻔한 이야기라 대충 짐작했는데 맞나보군.’
웹소설이나 만화를 밥 먹듯이 보면 이 정도 설정은 대충 유추할 수 있다.
거기에 나는 비슷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 '고대 전사 훈련소의 열쇠'. 사용하면 다른 공간에 있는 훈련소로 갈 수 있다. 실전 같은 훈련을 할 수 있는 고대 유물이다. 지금도 메이드들을 훈련 시킬 때 사용하고 있다.
난 라비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유리아의 형태를 하고 있는 그림자는 이질적이었다. 잘 만든 조각상을 보는 느낌이다.
문득, 쉐도우 마스터 그리샤가 궁금해졌다. 이름을 보면 여자가 틀림없었다.
“유리아의 모습 말고 그리샤의 모습도 취할 수 있나?”
“당신에겐 그녀의 모습이 더 익숙할 텐데요.”
"그리샤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알겠습니다.”
그림자가 꾸물거리더니 형태가 바뀐다.
나는 감탄사를 흘렸다. 그리샤는 깔끔한 얼굴의 여성이었다. 웨이브 진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라비트에게 돌진했다. 만질 수 없었다. 몸은 그냥 통과되었다.
“저는 그리샤의 그림자입니다. 실체가 없습니다.”
흥미가 팍 식었다.
“아, 그래. 본론으로 들어갈까?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들 하지. 내게 원하는 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