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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598화 (1,378/2,000)

< 1598화 > 1598.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아, 그래. 본론으로 들어갈까?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들 하지. 내게 원하는 게 뭐야?”

라비트는 내가 오길 기다렸다고 말했다. 미궁의 힘을 주고 최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는 말이다.

"그녀의 시련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입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유리아가 지금 무슨 시련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시련의 당사자만이 시련의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내 도움이 어디에, 왜 필요한지 설명해라.”

“마왕은 이미 최하층을 파악했습니다. 당신도 성 밖의 해바라기를 보셨을 겁니다.”

“봤지. 질리도록 많더군. 네가 만든 몬스터가 아닌가? 네가 제어하면 되지 않나.”

“저는 사냥터지기일 뿐입니다. 사냥감을 인도할 수는 있으나, 사냥감을 사냥할 권한은 없습니다. 바깥의 해바라기들은 마왕이 만들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기껏해야 공격성을 억제하는 것뿐입니다. 때가 되면 성으로 진격하겠지요.”

“해바라기 몬스터들을 처리해달라는 거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시련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마왕으로부터 이 성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혀를 찼다.

내게 선택권을 주며 부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이곳이 마왕에게 함락되면 시련을 진행 중인 유리아가 위험해질 게 분명했다. 유리아의 위험성을 깨달은 마왕이 유리아를 내버려 둘 리가 없을 테니.

“넌 이미 내 대답을 알고 있어. 그렇지?”

"……."

“네가 내게 힘을 준 건 고맙다만, 그것 때문에 네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다. 유리아를 위해서다. 그것만 알아둬라."

“네. 말하지 않으셔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해바라기부터 싹 다 태워보실까."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지금의 나는 섹스의 요정이다. 해바라기 몬스터 수천 마리 따위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 전에 마왕의 권능에 대비해야 합니다. 마왕이 직접 나설 가능성도 있습니다. 권능에 저항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과연 고대 문명. 악마의 권능에 저항하는 법도 알고 있나.”

“일단,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물리법칙을 이용하는 권능에는 소용없습니다. 예를 들면, 권능으로 만들어진 강철 공격 같은 건 물리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겠으니 권능에 저항하는 방법부터 말해라.”

“에테르 마법입니다. 마나를 에테르로 변환해 육체를 감쌉니다. 그럼 육체에 향한 권능을 저항할 수 있습니다. 악마 사냥꾼들이 필수적으로 익히는 마법이지요."

“고대에는 악마 사냥꾼도 있었나. 근데 난 마법을 쓸 줄 모른다. 마법을 익힐 재능도 없다.”

“지금 당신은 요정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미 에테르를 느낀 적 있습니다. 그때의 감각을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에테르를 느낀 적 있다고? 그럴 리가.”

"기억 안 나십니까? 당신이 마왕의 권능에 당해 요정이 되었을 때. 그때, 제가 직접 개입하여 에테르로 당신을 보호했습니다. 당신이 요정이 된 것도 마왕의 권능에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하루살이가 되었을 겁

니다. 대악마 누푸누의 권능이죠”

“요정으로 만드는 권능이 아니었다고?”

“마왕이 뭐 하러 당신을 요정으로 만들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근데 정말로 난 에테르를 느낀 적 없다.”

“당신은 대전사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에테르를 못 느낄 리 없습니다.”

“넌 날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군.”

나는 재능으로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게 아니다. 영약과 경험으로 오른 경지다. 유희 생활 어플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내겐 영성이 없다. 천재들과 같은 영성을 내게 요구해봤자 곤란할 뿐이다."

“…지금의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 요정입니다. 요정은 엘프 이상으로 마나에 민감한 종족이죠. 지금이라면 에테르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에테르가 느껴지십니까?”

"느껴… 진다!”

옅다.

마나와 비교하면 한없이 가볍다.

“이 가벼운 것으로 권능에 저항할 수 있다고?”

“에테르 마법은 권능을 모사하여 만들어진 마법입니다. 권능에 대항할 수 있는 건 권능뿐이다. 라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마법입니다. 허나 마법으로 권능을 재현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권능이 순수한 자연에 가까운 힘이란 걸 알아냈습니다. 에

테르는 자연에 가까운 힘입니다.”

솔직히 별 관심 없는 정보였다.

중요한 건 내가 에테르를 느꼈다는 거다.

나는 에테르 마법을 사용했다. 술식 같은 건 필요 없다. 지금 나는 요정이니까.

겉으로 봤을 때는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내 주위는 에테르가 감싸고 있다.

“이게 에테르란 말이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에테르는 어디까지나 권능에 저항할 뿐입니다. 권능을 이겨낼 순 없습니다.”

“저항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다."

밖으로 나가려던 나는 라비트를 돌아봤다.

“라비트.”

“네.”

“위층과 다른 층에 내 메이드들이 있다. 그녀들을 여기로 데려올 수는 없나? 마왕이 그녀들을 공격하거나 인질로 잡으면… 내가 좀 많이 빡칠 것 같은데.”

“저는 불가능합니다만, 당신은 가능합니다. 제가 힘을 좀 더 드리지요. 그녀들을 공간 이동으로 데려오십시오."

“고맙다.”

쉐도우 마스터 그리샤의 사념이자, 잔재인 그녀는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봤다.

잿빛의 세계다.

하늘, 땅, 강, 나무. 모든 게 잿빛이었다. 잿빛만 아니었다면 아주 평화로운 세계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 잿빛 세계에서 두 명의 여자가 단검을 맞대며 싸우고 있었다.

똑같은 움직임, 똑같은 얼굴, 똑같은 마법. 유일한 차이점은 한 명은 진짜고, 다른 한 명은 그 그림자라는 것.

‘유리아 그레이스. 보통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예상 밖이군.'

이곳은 유리아의 심상이었다.

그리샤의 잔재인 그녀가 유리아에게 내린 시련은 자신의 그림자를 쓰러뜨리는 것.

진부하다면 진부한 시련이었다.

‘원래라면 그리 어렵지 않은 시련이다. 그림자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걸 알려주기 위한 시련으로… 포기하지 않는 이상 시련자가 이기도록 설계된 시련이니까.'

그리샤는 후배를 괴롭히는 취미가 없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만 갖췄다면 사냥터의 관리자 권한과 그림자 사슬 글레이프를 넘길 생각이었다.

'변수는 세 가지인가.'

첫 번째는 심상.

이 잿빛 심상은 그림자를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유리아의 그림자도 그 영향을 받아 강해졌다.

두 번째는 유리아의 말도 안 되는 재능.

그림자는 유리아의 재능마저 모방한 것이다. 유리아와 그림자는 서로 싸우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는 그리샤의 잔재가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세 번째는 그림자 사슬 글레이프.

글레이프가 개입해 그림자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글레이프가 가진 미약한 의지가 자기 주인이 될 자를 시험하려는 것이다.

‘어이가 없는 건 이 정도 되면 그림자가 압도해야 한다는 거다. 근데 유리아 그레이스는….’

압도되기는커녕 조금씩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샤는 유리아 그레이스의 전투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수준이 이미 자신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 세계나 둘러볼까.‘

잿빛으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둘러봐도 달리 재미는 없었다.

그리샤는 이 세계에서 잿빛과 그림자가 아닌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번개였다.

잿빛 세계에서 영원히 타오르는 새파란 번개.

그리샤는 저 번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단지, 타오르는 번개가 아름답게 느껴질 뿐이었다.

콰콰콰쾅!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해바라기밭에 내려꽂혔다.

해바라기가 타는 냄새 대신에 밤꽃 냄새가 물씬 풍겼다. 벼락이 내려 꽃혀 움푹 파인 곳을 바라보면 정액이 떨어져 있었다.

"키에에에에엑!”

땅속에 숨어 있던 해바라기 몬스터가 솟구치더니 나를 향해 넝쿨을 휘두르며 공격했다. 나는 허공에서 회전하며 공격을 피했다. 손을 흔들자 허공에서 생성된 정액 고드름이 떨어져 해바라기 몬스터를 꿰뚫는다.

이틀 전부터 해바라기 몬스터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선공 효과가 끝난 것이다.

라비트의 말로는 마왕의 힘이 더 강해진 탓이라고 한다. 반대로 라비트는 약해지고 있었다. 이 미궁의 지배력을 마왕에게 상당수 빼앗겼다고 한다.

'마왕이 75%. 라비트가 25% 정도라고 했던가.‘

마왕이 이렇게 미궁에 집착하는 이유는 라비트를 통해 들었다.

마왕은 미궁과 마석문의 힘을 이용해 마계를 구현할 목적이다.

'대충 미궁으로 마왕성을 짓는다는 거지. 동시에 마계로 통하는 문도 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꾸준히 해바라기 몬스터를 처리했다.

'어제 3천 마리 정도 죽인 것 같은데… 어떻게 오늘이 더 많냐.‘

한곳에 모여있는 해바라기 몬스터들을 향해 벼락을 떨어뜨리려는 순간이었다.

키이이이이이잉!

쇳소리 비슷한 날카로운 소리가 천장에서 들렸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천장을 올려봤다가 두 눈을 부릅떴다.

천장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내린다.

-마왕입니다! 마왕이 침공했습니다!

라비트의 다급한 음성이 머릿속에 울렸다. 나는 숨을 삼키며 천장을 노려봤다. 마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허나 쏟아지는 몬스터 너머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마왕의 존재감이 확실하다.

“문 닫고 지키고 있어. 멜리사와 메이드들이 있으니 버틸 수 있을 거다. 혹시 몰라 총알 보급도 충분히 모아놨으니까.”

나는 천장의 갈라진 틈을 바라본다. 잡몸에 힘 뺄 필요는 없다. 보스를 가장 먼저 죽인다.

지금의 나는 먼치킨 섹스 요정이다. 마왕이 상대라도 할 만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세계가 반전했다.

땅이 천장이 되고, 천장이 땅이 되었다.

갈라진 틈에서 쏟아지던 몬스터들이 벌레처럼 기어 나온다.

-반전의 권능입니다. 아마, 몬스터들을 모은 뒤에 다시 반전시켜 성으로 낙하시킬 속셈이겠죠.

“하, 재밌게 해주는데? 반전한 걸 후회하게 해주지.”

이젠 땅이 된 천장의 갈라진 틈을 보며 마법을 준비한다. 대량의 마나가 한순간에 쑥 사라지며 탈력감이 느껴졌다. 나는 이를 악물며 버텼다.

“메테오.”

허공에서 운석이 지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운석의 상태가 이상했다.

'메테오가 왜 하얀색이야?'

의아하던 나는 무언가를 깨닫고 경악했다.

'정액 메테오잖아!"

하얀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는 하얀 메테오는 난자를 향해 돌진하는 정자와 같았다.

정자 메테오가 땅을 임신시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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