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2화 > 1602.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그림자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느낌상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몸은 그림자 속에 잠기기 전보다 가벼웠다. 한 발짝 걷는다. 용솟음치는 힘이 느껴졌다. 힘의 중심은 심장이었다.
후두둑.
몸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각질이었다. 그걸 보고 내가 환골탈태했음을 깨달았다.
“어디 편찮은 곳은 없으십니까?"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유리아가 물었다.
“최고야. 방금 막 태어난 것 같다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건… 너 때문이겠지."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유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심장을 중점으로 육체를 조정했습니다. 주인님이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자연스럽게 육체를 드나들 것입니다."
“이제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건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육체의 회복 속도나, 지구력이 올라갈 것입니다.”
유리아가 딱 잘라 말했다.
그것만으로 감지덕지다.
아직 힘에 대해선 긴가민가한데 오러 마스터 상급이나 최상급 수준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유리아의 안내를 받아 관리자층에서 나왔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나는 보름 정도 잠들었다고 말한다. 생각 이상으로 잠들어 있었던 터라 놀랐다.
성으로 온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 미궁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미궁을 유리아의 그림자 사슬이 붙잡으며 유지하고 있었다.
“이거 빨리 미궁을 떠나야겠군.”
“아직 이틀 정도는 여유롭게 버틸 수 있습니다.”
“네가 고생할 필요 없어. 바로 준비해서 미궁 밖으로 나가자. 미궁에 너무 오래 머문 게 마음에 걸리네.”
성으로 돌아왔다. 메이드들은 이미 떠날 준비를 끝마쳤다. 미련은커녕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내 앞에는 23명의 모험가가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미궁에서 살아남은 모험가들이다. 라비트가 미궁의 층을 정리하면서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들의 가장 앞에는 모험가 길드 마스터인 타타리가 있었다. 타타리는 두 눈에 힘을 주고 당당하게 나를 올려본다.
“백작 각하. 제가 저지른 죄를 전부 인정하겠습니다.”
“죄를 인정하는 범죄자 치곤 지나치게 당당하군. 뭘 믿고 그리 뻗대는 거지?"
“미궁 도시 라비트의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타타리. 넌 단지 모험가 길드의 마스터일 뿐이다. 미궁 도시는 네 것이 아니다. 넌 그저 도시의 대표자일 뿐이다.”
“저를 쓰십시오. 제겐 지금까지 쌓아온 인맥과 능력이 있습니다. 평생을 백작 각하께 비치겠습니다. 이 도시의 모든 것이 백작 각하의 소유가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도시의 모험가들은 백작 각하의 소유물이 될 것입니다. 모험가들은 백작 각하의
병사가 될 것이고, 시민들은 백작 각하의 명예를 노래할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오오.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는군.”
“…모험가 길드는 라비트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모험가들은 전 대륙에 퍼져있습니다. 저를 부리시어 모험가들의 힘을 손에 넣으십시오.”
다리를 휘둘렀다.
빡!
관자놀이를 맞은 타타리가 옆으로 쓰러진다. 나는 타타리의 머리를 짓밟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너희 모험가들은 자기가 대단하다고 착각하지. 모험가. 있어 보이는 이름이지. 근데 실제는 어떻지? 돈을 좇는 용병이나 별반 다를 거 없지 않나.”
“저희는! 돈을 좇는 용병과는 다릅니다! 저희가 있기에 몬스터의 개체수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저희 모험가야말로 이 대륙을 지키고 있습니다!”
짓밟힌 채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한다. 웃길 뿐이었다. 모험가들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다면, 기사보다 모험가가 더 대접받았을 것이다.
“헛소리를 들려주는 것도 질렸다. 넌 죽는 순간까지 전부 내려놓지 못했군.”
“…내려놓겠습니다. 신발을 핥으라면 핥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백작 각하! 저는! 저는 쓸모가 있습니다!”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나왔어야지."
타타리에게서 발을 치우고 메이드들을 둘러봤다. 인원을 체크한다. 한 명의 사망자도 없다는 것에 안심한다.
"주인님. 총살이 어떨까요? 적당히 매달아두고 총을 갈기는 거예요.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리죠.”
“교수형이 적합합니다.”
"배신자에겐 참수를.”
"화형."
"꼴도 보기 싫으니 묻어버리죠.”
메이드들이 저마다 의견을 냈다. 모험가들에게 쌓인 것들이 많은 모양이다. 내가 없는 도안 모험가들을 관리했을 테니 그 스트레스도 있었을 것이다.
“됐다. 시간 낭비다."
내 말에 메이드들이 입을 다물었다. 멜리사의 경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살려준다고? 잠깐. 너 누구냐. 설마 도플갱어인가! 네 이놈! 진짜 주인님은 어디에 있지?!"
“멜리사.”
유리아가 나직이 멜리사를 불렀다.
“마님. 이건 장난이 아니다. 정말로 주인님이 맞는 거냐? 설마 마님이 주인님의 뇌를 개조해버린 건가?”
“멜리사. 주인님의 뜻은 이딴 버러지들을 죽이기 위해 시간과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미궁은 곧 붕괴합니다.”
“아하. 굳이 죽일 필요 없이 내버려 두면 이 미궁과 함께 죽는다는 거군.”
모험가들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막연하던 죽음이 성큼 가까이 다가온 것을 느낀 것이다. 밧줄로 묶인 무릎걸음으로 내게 다가온다.
“백작 각하! 백작 각하!"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눈물과 콧물을 질질 짜낸다. 동정심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달려드는 놈들을 발로 차버리고 성 밖으로 나갔다. 성밖에 그리샤의 모습을 한 라비트가 서 있었다. 라비트의 시선은 유리아에게 향했다.
“관리자님. 밖으로 나가는 문을 만들어두었습니다. 저곳을 통해 나가시면 됩니다.”
성벽 한쪽에 못 보던 문이 있었다. 나는 문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라비트. 아쉬움은 없나?”
"없습니다."
라비트가 즉답했다.
유리아는 라비트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했습니다, 라비트.”
“유리아 관리자님은 그리샤 님보다 강하십니다.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겠지요. 그 앞날에 빛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생기는 법이니까요.”
“제겐 이미 빛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문을 열고 미궁 밖으로 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공간 사이로 붕괴되는 미궁이 보였다. 라비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곳에 남겨진 모험가들의 비명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콰직, 콰지직!
미궁 입구가 금이 가더니 그대로 무너졌다. 이것으로 미궁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미궁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험가들이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모험가들의 수가 적다. 길드 마스터와 연관된 놈들은 도망친 건가? 눈치 빠른 놈들이군.’
그게 아니어도 미궁이 막혔으니 도시를 떠나는게 당연했다. 이 도시의 근간은 미궁이니까. 미궁을 이용할 수 없으면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백작 각하.”
하늘을 보며 이 도시의 처우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늙수그레한 남성의 음성이다. 부드러우면서도 안정된 톤이라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목소리만으로 알 수 있다. 높은 신분의 사람을 많이 상대해본 놈이다.
50대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있었다. 얼굴은 여우상이었고, 입은 옷은 평범해 보이지만 깔끔하다. 평범한 남자는 결코 아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군.”
“트레비레 블러크입니다. 백작 각하께 빚을 갚으러 왔습니다.”
남자의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다. 무슨 개수작이냐고 썩 꺼지라 말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네가 누군지 모르겠군.”
“이해합니다. 시간이 상당히 흘렀으니까요. 프프렉 도적단과 아르텔 마을. 혹시 잊으셨습니까?”
“설마 그걸 잊겠나. 네가 누군지 이제야 알겠군”
나는 힐끗 유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유리아는 가만히 있었다.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르텔 마을.
유리아와 내가 처음으로 만난 마을이었다. 프프렉 도적단을 그곳을 습격하고, 유리아의 모친을 죽였다. 물론 프프렉 도적단에 대한 복수는 끝냈다.
트레비레 블러크.
당시 정보 길드의 프터스 지부장이었다. 그때, 정보 길드원이 배신하면서 일이 좀 꼬였었다.
트레비레는 그 사죄의 보상으로 특중급의 정보를 무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솔직히 말해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정보 길드가 없어도 내겐 원작의 정보가 있었고, 자잘한 정보가 필요할 때는 돈을 지불해서 샀다. 돈은 이미 충분히 많았으니까.
“기억나는군. 좀 재수 없는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꽤 괜찮게 변했군.”
“하하. 자주 듣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제가 혈기가 좀 왕성했었지요. 그렇다고 이 일에 대한 의욕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그 이상으로 의욕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빚을 갚으러 왔다고 말했었나? 별 기대는 되지 않지만 들어는 주지. 어떤 정보를 가져왔나?”
정말 기대가 안 됐다.
정보 길드의 정보가 없더라도 아무 문제 없으니까. 내가 진짜 원하는 마왕의 대한 정보는 정보 길드 따위가 가지고 있을리도 없고.
트레비레는 주위를 스윽 둘러봤다.
“이곳에서 말해도 되겠습니까?”
마나를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마나의 벽이 그와 나, 메이드들을 감싼다.
“…대단하시군요. 마나의 벽을 이렇게나 쉽게 만들어내다니…."
“메이드들은 내 수족이다. 믿을 수 있으니 말해라.”
“프터스 도시가 마도 연합에 함락됐습니다. 프루커스 가신들은 테브라 영지로 피신해 있는 상태입니다. 2,000명이 넘는 병사들이 죽었으나, 골든 로즈 기사단과 엘라인 부인은 테브라로 이동하여 농성 중입니다.”
“…마도 연합은 뭐냐?”
“마탑의 연합입니다. 사악한 프루커스 백작을 몰아내기 위해, 대륙의 평화를 위해, 라펠리 왕국을 위해 일어난 세력입니다.”
“아일린 공주가 마탑을 손을 잡았다고 하더니… 일이 이렇게 되는군.”
“아일린 공주는 그저 명분 중 하나일 뿐입니다. 마탑은 이미 백작 각하를 적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겠지. 이렇게 빨리 성과를 보이는 것을 보면 말이야. 테브라의 상황은 어떻지?"
“포위당한 상태이나, 잘 버티고 있습니다. 테브라의 방어 능력은 놀랄 정도로 뛰어나더군요. 항구를 끼고 있어서 그런지 보급도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영지의 힘만 따지면 프루커스 백작 저택이 있는 프터스보다 테브라가 더 강하다.
‘드워프를 노예로 부려서 이것저것 만들고, 메이드들의 시작점이 테브라니까. 현대화기도 갖다 놨고… 항구에는 해군 본부도 있지. 아무리 마법이라고 해도 단기간에 함락당할 정도는 아니야. 당장 거기에 있는 미사일만 해도 어지간한 영지는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니까.'
그래도 공격당했다는 사실에 짜증 난다. 어쩌면 테브라도 위험한 상태일 지도 모른다. 이 세계의 정보 이동 속도는 한계가 있으니까.
지금 당장 공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해 테브라로 돌아가고 싶다.
“프터스의 전력은 절대 만만치 않다. 내 형제이자, 오러 마스터인 카일 프루커스가 남아 있을 터. 그는 어떻게 됐지?"
“카일 프루커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