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3화 > 1603.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카일 프루커스는… 마도 연합에 제압되어 끌려갔습니다. 죽지는 않았으나, 좋은 상태는 아니라고 봅니다. 엘라인 부인과 골든 로즈 기사단이 테브라로 피난할 수 있었던 건 카일 프루커스가 마도 연합의 시선을 끌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카일
프루커스가 없었다면 엘라인 부인 또한 적들에게 붙잡혔을 겁니다.”
머릿속에 상황이 그려졌다.
카일 프루커스는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을 것이다. 살생과 전투를 꺼려도 두려워할 놈은 아니다. 카일이 적들의 시선을 잡는 동안 골든 로즈 기사단이 엘라인과 가신들을 보호하며 빠져나갔겠지.
“다른 이들은. 아버지와 젠트는 어떻게 된 거지?”
엔티온 프루커스와 젠트 프루커스.
프루커스가 공격당했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엔티로은 전대 가주이며 오러 마스터이고, 젠트 프루커스는 내 형제다. 두 사람 모두에게 프루커스의 피가 흐른다.
“젠트 프루커스는 일주일간의 농성 끝에 항복했습니다. 아일린 공주가 젠트 프루커스와 그 아내의 신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일린 공주가? 그럼 목숨은 무사하겠군. 항복한 건 마음에 안 든다만.”
그래도 일주일간 농성한 끝에 항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항복하지 않은 것보단 낫긴 하다.
‘젠트는 버린다.'
젠트 프루커스의 목숨? 지금 와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형제애 따윈 없었다.
‘그래도 구할 수 있을 때는 구해야지.'
젠트를 위해서가 아니다. 내 평판과 형수를 위해서다.
“아버지는?”
오러 마스터 중급 이상의 실력자에, 라펠리 왕국의 수호검이라 불리는 남자다.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엔티온 프루커스는 실종 상태입니다."
“아버지까지 마도 연합에 당했나?”
“아닙니다. 마도 연합이 습격하기 전에 악원의 수해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습니다. 엔티온 프루커스가 지키고 있던 우트렌 요새는 몬스터에게 함락당한 상태입니다. 우트렌의 병사와 기사들은 대부분 전사했습
니다.”
"암울하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원작에서도 악원의 수해가 문제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마왕이 무슨 짓을 한 거겠지. 악원의 수해는 대륙에서 가장 마계와 가까운 곳이니까.'
악원의 수해와 테브라와는 거리가 있으니 몬스터에게 바로 공격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악원의 수해는 어느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대륙 전체의 문제였다. 악원의 수해는 대륙 중심의 절묘한 곳에 있으니까.
“트레비레. 정보는 잘 전해주었다. 덕분에 정보 수집에 필요한 시간을 아낄 수 있겠군. 너는 빚을 갚았다. 이제 그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아닙니다, 백작 각하. 그때 저는 특중급의 정보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제가 말한 정보들은 시간을 투자하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하급 정보에 불과합니다.”
"……내게 알려줄 정보가 더 있나 보군.”
“그 전에 앞서, 현재 정보 길드의 상황에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말하라.”
“정보 길드는 두 개로 갈라진 상태입니다. 길드 마스터 노펭을 따르는 자들과 서브 마스터인 저를 따르는 자들로.”
“무엇 때문에 갈라진 거지? 내가 알기로 정보 길드는 규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만."
“노펭이 먼저 규율을 깼습니다. 정보 길드는 절대적인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허나 그는 마도 연합에 붙었습니다. 그는 마도 연합이 백작 각하를 죽이고 대륙의 패권을 손에 쥐리라 판단했습니다.”
“너는 마도 연합이 아니라 내가 이길 거라 보나?”
“그렇기에 백작 각하를 찾아온 것입니다. 길드 마스터인 노펭이 규율을 깼으니 저도 규율을 깨기로 했습니다."
“마도 연합이 못 믿겼나? 아니면 노펭이 너의 정적인가?"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백작 각하께서는 가장 날카로운 비수, 암제가 있지 않습니까.”
암제.
헬브리트 공작가를 하루아침에 멸문시킨 전설의 암살자를 뜻하는 이름이었다.
나는 눈에 힘을 빡 주었다. 나도 모르게 눈동자를 굴려 유리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트레비레라면 그것만으로 유리아가 암제라는 걸 알아차릴 것이다.
“왜 암제가 나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저희 정보 길드는 암제를 계속 조사했습니다. 뒤를 쫓으려고도 시도해보았으나, 암제는 너무 철저하여 실패했습니다. 저희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암제에게 암살당한 피해자에게.”
“암제에게 당했다는 건 어떻게 알지?”
“암살당한 피해자들을 전부 조사했습니다. 거기서 범인을 알 수 없는, 비슷한 수법으로 당한 피해자들을 분류하여 정보를 긁어모았습니다. 그 결과, 직간접적으로 백작 각하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유리아의 실수는 아니다. 그냥 이놈이 지나칠 정도로 유능한 것이다.
'이제 와서 암제의 정체가 드러나도 별로 상관없긴 해.'
그래도 역시 최대한 숨기는 편이 좋다.
“그 정보를 알고 있는 자는?”
“저와 부하 4명뿐입니다. 저희의 입을 막으시겠습니까?”
입을 막기 위해 죽여야 하는 건 눈앞의 트레비레뿐만이 아니다. 여기에 없는 그 부하 4명까지 찾아내 죽여야 한다. 그러기엔 시간이 없다.
“너는 유능하지. 내게 충성을 바칠 수 있나?”
트레비레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게 백작 각하의 귀가 될 영광을 주십시오. 이 대륙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보를 각하께 바치겠나이다.”
“좋다. 지금부터 그대는 나의 신하다.”
“감사합니다, 각하. 정보를… 아니, 보고 할 것이 더 있습니다.”
“뭐지?”
“마도 연합의 뒤에 드래곤이 있습니다. 마도 연합은 하루아침에 탄생한 세력이 아닙니다. 드래곤이 마법을 미끼로 마탑을 규합한 것입니다. 마도 연합은 오래전부터의 물밑작업으로부터 이루어진 결과물입니다."
“드래곤? 그래. 레오시오 크라이소드. 그 음흉한 레드 드래곤이군. 그놈이라면 이런 짓을 벌이고도 남지. 놈이 어디에 있는지 아나?"
별 기대 없이 물었다. 같은 드래곤인 프리실라가 추적 중인데도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다. 정보 길드가 레오시오의 거취를 알 리 없었다.
“짐작 가는 곳이 두 군데 있습니다.”
“두 군데나 있다고?"
“마도 연합이 창설되기 며칠 전, 마탑의 대표자들이 알카이론 산맥으로 향한 것을 파악했습니다. 그곳에서 드래곤과 회동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알카이론 산맥. 북쪽에 있는 거대 산맥이다. 1년 내내 눈이 내리는 겨울로 유명했다. 산세가 험하고 몬스터가 많아 사람이 살지 않는다. 레오시오가 몸을 숨기기에 적합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 곳은 어디지?"
"악원의 수해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 리 없습니다. 드래곤이 악원의 수해의 몬스터들을 쫓아낸것이라면.… 악원의 수해에 일어난 일도 납득됩니다.”
"……."
두 개의 선택지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알카이론 산맥, 악원의 수해. 둘 중 한 곳에 레오시오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두곳 전부에 없을 수도 있었다. 트레비레의 정보는 확실하지 않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전력을 두 개로 쪼갤 순 없다. 그건 위험을 자초하는 꼴이니까.'
고민이 깊어질 때였다.
"주인님. 레오시오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마도 연합을 움직여 프터스를 공격하고 점령한 이유는 저희를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레오시오의 적은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프리실라. 그래. 프리실라가 두 눈에 불을 켜고 레오시오를 추적하고 있지. 레오시오의 입장에선 프리실라가 더 무서울거야. 같은 드래곤이니까.”
프리실라와 달리 레오시오는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음흉하게 움직인다. 그건 분명 프리실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다. 레오시오가 아무 수작을 부리지 않는다는 전제로 순수 전투력만 따지면 레오시오보다 프리실라가 더 강한 게 아닐까.
나는 결정을 내렸다.
“우선 마도 연합부터 정리한다. 다른 건 몰라도 테브라가 함락당하는 건 막아야지. 내가 어떻게 쌓아 올린 기반인데."
테브라에는 코리아 상단이 유통하는 현대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테브라가 무너지면 코리아 상단이 마비된다. 돈줄이 막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테브라에 있는 메이드들을 버려둘 수 없었다.
“트레비레. 넌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라.”
“예, 각하. 유의미한 정보를 모아 보고 하겠습니다.”
트레비레는 조용히 물러났다. 시야 속에서 사라지는 그를 확인했다. 주위에 있는 시민들은 우리를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시민들에게 조금도 흥미 없었다. 지금은 테브라로 돌아가는 일이 더 급하다.
인벤토리에서 공간 이동 주문서를 꺼내 메이드들에게 나눠줬다. 테브라는 내게 중요한 곳이었기에 좌표가 지정된 공간이동 주문서가 많았다.
라비트의 시민들이 계속 지켜보고 있었으나, 상관없었다. 이미 상황은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더 이상 패를 숨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찌이이익!
나를 시작으로 메이드들이 공간 이동 주문서를 찢었다.
테브라 항구 도시의 저택에 나와 전투 메이드들이 나타났다.
바쁘게 움직이던 메이드들이 우리를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기쁜 어조로 외친다.
"주인님! 주인님이 오셨어!"
“유리아 님이랑 대장님도 오셨어!"
"오실 거라 믿고 있었어요, 주인님!”
메이드들이 격하게 우리를 반겨준다. 나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녀들의 표정에는 안심과 초조함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꽤 급박한 상황일 것이다.
콰아앙!
폭음이 들렸다. 공기의 떨림이 여기까지 전해진다. 미사일을 쏘아내는 반동 같은 게 아니다. 무언가가 성벽을 때린 것이다.
메이드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 저택에서 일하는 메이드들은 전투가 전문이 아니다. 전투법을 배웠어도 기껏해야 총을 쏘는 정도가 전부다. 그런 그녀들이니 불안에 떠는 건 당연했다.
"멜리사, 통제실로 가."
“알겠다.”
“AM부대는 모두 작전 준비.”
“네. 주인님.”
“너희들도 자리로 가. 교전 시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
“네, 주인님…. 메이드장은 엘라인 부인과 함께 성벽을 지키고 있어요."
메이드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흩어졌다. 복도에는 나와 유리아만 남았다. 분노에 찬 나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으며 저택 밖으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