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5화 > 1615.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프리실라는 다음날 정원에서 눈을 떴다. 드래곤 상태였기에 저택 안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몸이 상처투성이인 건 그대로였다.
"프리실라 님.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쉬시죠."
나는 안타까움을 담아 프리실라에게 말했다. 드래곤 상태일 때는 몰랐는데, 인간 상태일 때 보니 그녀의 몸은 말이 아니었다. 자잘한 상처는 포션으로 회복했어도, 깊은 상처는 포션에도 한계가 있었다. 특히 오른쪽 허벅지 바깥쪽의 상처와 왼
쪽 옆구리에 난 상처가 컸다. 어깨도 부자연스러워 보이고.
“그렇게 여유 부릴 시간은 없다. 너와 유리아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세계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네 성격은 내가 잘 안다. 만약 대가가 필요하다면… 내 모든 걸 주마. 이 세계를 위해 도와다오.”
프리실라가 날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파란색 머리카락과 그보다 더 깊고 맑은 파란색 눈동자에 빨려들어 갈 것만 같다. 미녀가 이렇게 부탁해오니 거절하는 게 쉽지 않았다.
“프리실라 님. 일단 방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프리실라 님을 위한 조용한 방을 준비했습니다.”
"...그러지."
방으로 들어온 프리실라는 의자에 앉으려고 했으나, 나는 그녀를 억지로 침대에 눕혔다.
“상처는 아프지 않으십니까? 최상급 포션을 쏟아부었는데 회복이 더디더군요. 원하신다면 진통제를 드리겠습니다.”
“됐다. 보는 것과 달리 고통스러운 건 아니다. 상처 회복이 더딘 건 저주 때문이다. 레오시오. 그놈이 유물을 이용해 저주를 걸었다. 그 유물은 어떻게든 박살 냈지만… 저주가 사라지고 몸이 완전히 회복하기까지 몇 달은 걸리겠지."
“놈이 유물까지 씁니까?”
드래곤은 마법 분야에 자존심이 강하다. 레오시오의 경우 그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드래곤은 인간이 만든 마도구는 잘 쓰지 않는다. 고대 유물도 마찬가지다. 유물은 찬란했던 인간 문명의 유산 같은 거니까.
"레오시오는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다. 유물이든, 뭐든 쓸 수 있는 건 뭐든 쓰고 있다. 그만큼 놈이 몰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마왕과 손잡은 놈이니 갈 데까지 가도 이상하지 않죠. 레오시오와 마왕은 악원의 수해에서 뭘 하려는 겁니까?"
악원의 수해는 원작에서도 자세히 다루지 않아서 잘 모른다. 원작대로라면 레오시오는 카일의 손에 이미 뒤져있어야 하고.
“몬스터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알고 있느냐?”
“짐승이나 맹수처럼 번식하는 거 아닙니까?”
"번식은 당연히 한다. 내가 묻는 건 몬스터의 시작점이다."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이 세계의 몬스터에게 딱히 관심 없었다. 이 세계에서 나는 헌터도 아니고, 모험가도 아니니까. 굳이 몬스터와 싸울 필요가 없다.
“마나다. 오래된 마나와 순수한 마나가 마주치고, 우연히 육신이 될 재료가 존재한다면 몬스터가 발생한다.”
“그 재료란 건?”
“생물이 될 수도 있고, 무생물이 될 수도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진화라고 할 수 있겠군. 악원의 수해에 몬스터가 많은 이유는 그곳이 이 세상의 중심, 마나의 흐름이 시작되는 곳이라 그렇다.”
"혹시 인간도 몬스터가 될 수 있는 겁니까?”
“조건만 갖춰진다면 가능하다.”
“레오시오는 몬스터로 진화하려는 겁니까?”
“비슷하다. 마왕의 힘을 빌려 악원의 수해의 마나를 흡수해 육체를 재구성하려는 거다. 정해진 수명을 초월하기 위해.”
내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유리아가 입을 열었다.
“미궁에서 본 마도 병기와 마도 연합의 마도 병기는 시범작이라 할 수 있겠군요.”
“마도 병기? 그건 또 뭐지?”
의문을 가진 프리실라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미궁에서 마왕을 상대하고, 영지로 돌아와 마도 연합을 상대했던 이야기들.
“마도 병기는 시범작이다. 그것도 완성된 시범작.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적 여유가 더 없겠군. 지금 당장 악원의 수해로가서 레오시오와 마왕을 막아야 한다. 막지 못한다면 놈들은 커다란 재앙이 되어 이 세상을 덮칠 것이다.”
“지금 당장이요? 우리 쪽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 움직이는 건 좀….”
“아직 이일의 중요성을 모르는 건가?"
“압니다. 그래도 무작정 적진에 쳐들어가는 건 미친 짓입니다. 게다가 프리실라 님도 따라오실 것 아닙니까? 프리실라 님은 현재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십니다. 일주일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레오시오가 마도 연합을 이용해 너를 공격한 이유를 생각해라. 시간을 주는 건 놈에게 기회를 주는 거나 다름없다.”
“…사흘. 사흘의 시간은 주시죠. 아직 전장의 뒷수습이 덜 끝났습니다. 특히 이번 전장에서 고생한 골든 로즈 기사단에게 휴식이 필요합니다.”
“이틀. 부탁이다. 내 모든 것을 줄 테니 도와다오.”
나는 프리실라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에 조급함과 절박함이 느껴졌다.
“후우. 알겠습니다. 뭐든지 하겠다는 그 말 잊지 마십시오."
“스승님! 안 돼요! 저놈은 이상한 걸 시킬 놈이라고요!”
샤르넬이 소리쳤다. 그녀는 아주 커다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스승님도 저처럼 될지 몰라요! 이 큰 가슴이 얼마나 불편한데…!”
“으음…. 나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샤르넬이 소리친다.
나는 일이 귀찮아지기 전에 유리아와 함께 방 밖으로 나왔다.
"유리아, 어떻게 생각해?"
“프리실라 님의 의견에 틀린 점은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레오시오와 마왕을 정리하는 게 맞습니다.”
“그래. 문제는 전력이지. 골든 로즈 기사단과 AM부대까지 전부 끌고 가야 할까?”
“제 생각에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을 선별해 데려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소수 정예인가. 하긴 어중이떠중이들을 데려가봤자 도움이 별로 안 되겠지. 이 결전에 데려가는 건….”
AM 부대의 대장인 멜리사, 골든 로즈 기사단의 단장인 플로이, 유리아는 당연하고 나도 참석한다. 그리고 샤르넬과 프리실라. 프리실라는 상처 입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해도 드래곤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녀가 쌓은 지식이라던가.
'여섯 명으로 충분한가?'
상대는 에이션트 드래곤인 레오시오와 원작 최종 보스 마왕.
'유리아가 어떻게 마왕을 상대하고, 나머지 다섯이 레오시오를 상대하는 그림이겠군. 스톰브레이커는 수복 중이라 사용하지 못하는데…. 음.’
생각에 집중한다.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손쉽게 패배할 것 같지도 않다.
'할만한데?'
내가 가진 힘을 떠올린다.
나는 오러 마스터다. 이 세계의 인간 중에서 나와 정면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건 유리아밖에 없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매우 강하다.
'아니지. 잠깐 잊고 있었군. 내 진짜 힘은 오러나 검술 따위가 아니야. 유희 생활 어플이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유희 생활 어플이 내게 있다.
‘할만한 게 아니라, 질 수가 없잖아.’
자신감이 차올랐다.
이틀이 지났다.
악원의 수해에 어떻게 가냐는 문제가 있었다. 악원의 수해 지역의 좌표를 저장한 공간 이동 주문서가 없었기에 공간이동 주문서를 사용할 수 없었다.
유리아에게 부탁해 워프 게이트나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악원의 수해 근처 마나의 흐름이 일정하지 않고 계속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악원의 수해까지 마차를 타고 가면 며칠은 걸린다. 일분일초가 급한 지금 마차는 너무 느렸다.
내가 생각한 건 헬리콥터였다. 헬리콥터 두 대를 운용하면 여유로우면서 빠르게 악원의 수해로 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프리실라는 헬리콥터의 속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날아가는 편이 훨씬 빠르겠구나. 내 위에 타거라.”
“프리실라 님의 상처가 벌어질까 우려됩니다.”
“내 상태는 내가 잘 안다. 고작 이 정도로 상처가 벌어질 정도로 나는 나약하지 않다.”
프리실라는 단호했다. 우리는 프리실라를 말리지 못하고 블루 드래곤의 등에 올라탔다. 블루 드래곤이 커다란 날개를 움직이며 하늘을 날았다. 과연 헬리콥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빠른 비행 속도였다.
‘5분도 안 지났는데 벌서 산 3개를 지났군.’
작은 산이라고 해도 산이었다. 마차를 타고 갔으면 몇 시간은 걸렸을 것이다.
나는 근처에 있는 여인들에게 말했다.
“중요하니 다시 말할게. 마왕은 유리아가 상대하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는 모두 레오시오를 상대한다. 알았지? 괜히 유리아를 도와주겠답시고 방해하지 마."
“잘 알고 있다. 주인님이야말로 잘해라. 이곳에서 돌발행동을 할 확률이 높은 건 주인님이 아닌가."
멜리사가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뼈를 때리는 말이라 반박하기 힘들었다.
“크흠.”
나는 헛기침을 하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마침 짐마차를 끌고 지나가는 행상인이 보인다. 호위하는 용병들은 드래곤을 보고 놀라 나자빠졌다. 나는 그들을 보고 킥킥 웃었다.
-도착이다.
프리실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드래곤 상태라 그런지 육성이 아닌 마법으로 목소리를 만들었다. 1시간도 되지 않아 도착한 것이다.
프리실라는 공중에 멈춰 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나는 지상을 내려다봤다. 악원의 수해가 보인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악원의 수해 속의 풍경과 달랐다.
흑록색 나뭇잎을 가진 나무로 빽빽해야 하는데, 말라비틀어진 나무만이 가득하다. 땅은 시커멓다. 땅에서부터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어디서 느껴본 적 있는 듯한 기운이었다.
‘부정한 마나. 악마들이 좋아하는 마나다. 인위적으로 오염시킨 건가. 이렇게 대규모로?’
몬스터로 유명한 악원의 수해는 죽은 땅이 되어 있었다. 몬스터는커녕 살아있는 생명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프리실라 님. 레오시오와 마왕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설마 우리가 올 줄 알고 도망친 겁니까?”
느껴지지 않느냐?
"예?"
-지금의 너라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냥 가르쳐주시지."
살짝 투덜거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무언가가 느껴질락말락 했다.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자 유리아가 조언을 건넸다.
"주인님. 천안을 사용해보세요.”
“아, 그래. 천안이 있었지."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