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1화 > 1621.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캐릭터를 소환합니다. 대상: 엘레나 발데르트]
[유리아 그레이스의 남은 소환 유지 시간: 30일]
[‘신의 아틀란티스’ 유희 세계가 비활성화됩니다.]
눈앞에 엘레나가 나타났다.
밝은 파란색 단발에 파란색 눈동자를 가진 여성은 가장 먼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딱히 다듬을 것도 없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제복은 깔끔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엘레나는 이어 나를 확인하고 차분하게 주위를 확인했다.
“유리아가 있는 세계로 불러온 것 같다만… 퍽 삭막한 곳이군.”
엘레나가 담담히 주변을 둘러본 감상을 말한다. 마계가 꽤 삭막한 곳이긴 했다.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군. 유리아가 안 보이는 걸 보아… 급한 상황인 모양이지?"
“엘레나. 네 도움이 필요하다.”
엘레나는 턱을 치켜들며 팔짱을 꼈다.
“내가 무조건으로 널 도와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보인다. 어딘가 장난기가 담겨 있는 미소였다. 마음 같아서는 엘레나에게 어울려주고 싶지만, 지금은 시간이 부족했다.
왼손으로 엘레나의 허리를 확 잡아당기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뺨을 붙잡는다. 순식간에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엘레나. 다시 한번 말하지. 네 도움이 필요하다. 거절이나 협상은 허락하지 않겠다. 짐의 여자답게 굴어라.”
“…오늘따라 박력이 넘치는군. 내게 뭘 원하는 거지?”
“여긴 마계다. 악마들의 소굴이지. 짐은 이곳의 악마들을 쓸어버리려고 한다.”
“악마?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군. 좋다. 협조하지. 결코 네 기세에 밀려서 협조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근데 일인칭이 왜 짐이 됐지? 황제 놀이라도 하는 거냐?”
“일종의 페널티라고 할 수 있겠군. 짐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거니 신경 쓰지 마라.”
“지금 네게서 어마어마한 쌍놈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걸 알고 있나? 평소에도 쌍놈이었으나 지금은 8배 정도 더 심한 것 같군.”
"헛소리.”
“……슬슬 날 좀 놓아주지 않겠나? 은근슬쩍 가슴 만지지 말고.”
나는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일이 끝난 뒤에 엘레나에게 누가 위에 있는지 알려줘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급한 불부터 해결해야 한다.
엘레나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꼬며 내게 물었다.
“계획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군. 내가 뭘 하면 되지? 미리 말해두는데, 환술에도 한계가 있다. 내가 한계 돌파를 사용하더라도 이 세계를 통째로 환술로 집어삼키는 건 불가능하다.”
“그 정도는 짐도 안다. 환상을 현실로 만드는 환술… 환접술(幻蝶術)이라고 했었나. 그 환술로 짐을 강하게 만들 수 있나?"
“일시적이라면 불가능하진 않다. 다만, 그 강함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물론 터무니없는 힘은 아무리 상상해도 발현할 수 없다. 나의 환접술은 만능에 가까우나, 환접술을 사용하는 나는 만능이 아니니."
딱.
엘레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서 푸른색 나비가 나타났다. 나비는 내 곁으로 살랑살랑 날아오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힘이 차오르는 게 느꼈다.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그대를 위한 폭군’ 세계의 나 정도의 힘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그거… 다행이로군.”
엘레나의 안색이 창백했다. 그녀는 살짝 몸을 떨며 기침했다. 핏물이 튀어나왔다.
“설마 이 정도의 힘을 구현하게 될 줄은…. 알고 있나? 나는 방금 수명의 80% 이상을 사용했다.”
“너의 현신에 감사하고 있다. 이 빚은 언젠간 갚도록 하지.”
“됐다. 여차하면 완전 회복을 사용하면 되니 큰 타격이 아니다."
그녀는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내게 물었다.
“내게 원하는 건 이게 끝이냐?"
“해줘야 할 일이 있다. 공간 이동을 할 여력은 남아 있나?”
“날 너무 얕보는군. 널 강화하며 피를 토했다곤 하나, 그건 네가 터무니없이 강한 힘을 원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태로도 공간 이동 정도는 몇 번이고 할 수 있다. 어디로 가고 싶은 거냐?”
“가야 할 곳은 많다. 허나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외지인으로서 여기 주민들에게 선물부터 던져줘야겠지.”
“선물?”
“현대 문명의 위대한 산물이지."
나는 씨익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핵가방 3개였다.
뱀파이어 형사 세계에서 구한 물건들이다. 몇 개 더 구하고 싶었지만, 그 세계에서도 핵가방을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3개도 겨우겨우 구했다.
“그 얼굴을 보니 이게 뭔지 대충 알겠군. 추방자들은 자기들 세계에 전쟁을 종결시킬 무기가 있다고 자랑하더군. 핵이라고 했던가?"
“정답이다, 엘레나. 역시나 똑똑하군.”
“좀 꺼림칙하긴 하다만… 좋다. 인간에게 사용하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겠지. 무엇보다 여긴 내 세계도 아니고 말이다.”
“짐의 세계도 아니다. 악마들의 세계지."
권능을 가진 악마들이 방사능 따위를 두려워할 리 없다. 마수도 마찬가지다. 그 강인한 괴물들이 방사능에 당해 골골거릴거라 생각되지 않는다.
“어디로 보내면 되지?”
“북쪽을 제외하고 동, 서, 남. 각각 세 곳.”
파란 나비가 살랑살랑 날아와 핵가방에 내려앉았다. 직후 핵가방이 사라진다.
동, 서, 남.
세 방향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잿빛 하늘이 불타듯 번쩍이고, 폭발의 여파로 인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버섯구름이 천천히 피어오른다.
팔짱을 낀 엘레나가 감탄했다.
"속 시원하게 쓸어버리는 게 마음에 드는군. 저거. 내 세계에서도 사용할 수 있나?”
“가져가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시스템이 있는 이상 사용은 불가능할 거다.”
“그렇겠지. 저런 위험한 물건을 아무 제약 없이 사용하게 두도록 내버려 둘리 없으니."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의 시스템은 밸런스를 맞추는 게 일이다.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나타난 핵가방을 용납할 리 없었다.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의 수준을 생각하면 핵은 의미 없다.'
무수히 많은 신이 존재하는 세계다. 신이 힘을 쓰는 자들이 마음먹고 대응하면 핵은 크게 의미 없을 것이다.
“이런. 죽지 않은 악마들이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
대악마 수준의 악마들이 틀림없었다. 놈들은 내가 공격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이쪽을 향해 날아오거나, 뛰어오고 있었다. 놈들 중에서 멀쩡한 꼴을 한 놈은 한 마리도 없었다.
나는 웃으며 칼을 손에 쥐었다.
귀찮게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마왕 아스테릭스는 위로 뛰어올라 그림자 칼날을 피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무릎을 잃었을 것이다. 마왕의 시선이 유리아를 찾는다.
‘반사의 권능. 충격의 권능.'
두 권능을 사용했다. 반사 권능으로 자신에게 날아오는 마법을 반사한다. 반사된 마법은 멜리사가 처리했다. 충격의 권능으로 달려드는 플로이와 유리아에게 공격한다. 플로이는 옆으로 움직여 유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리아는 플로이가 벌어준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유리아의 몸이 사라졌다.
마왕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는 이어서 권능을 사용했다.
'화살의 권능, 색적의 권능.'
3천 개의 화살이 나타나 적들을 향해 쏟아진다. 플로이는 갑옷을 믿고 몸을 웅크리며 화살을 견디고, 마법사들은 방어 마법으로 대응했다. 화살은 적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주진 못했으나,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시간을 버는 게 마왕의 목적이었다.
‘가장 위험한 건 은발의 여자다. 그 여자의 위치는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 어디로 숨은 거냐?'
마왕의 눈동자가 쉬지 않고 움직인다. 색적의 권능은 시야 내에 숨은 적을 찾아내는 권능이다. 즉, 적이 숨은 곳을 시야 내에 넣어야 한다는 거다. 즉, 숨은 유리아를 찾아내기까지 2~3초는 걸린다는 뜻이다.
‘찾아내어 바로 반격한다. 그 여자에게 치명상만 입힐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렵지 않다.'
일단 정면 쪽에는 없다. 마왕이 바로 뒤로 돌아본다.
꽝!
마왕의 머릿속에서 폭음이 울렸다.
"윽!"
마왕이 머리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육신은 멀쩡하다. 충격이 터진 쪽은 마왕의 영혼 쪽이다.
사용하고 있던 색적의 권능이 강제로 사라지면서 그 여파가 마왕의 영혼을 때린 것이다.
‘유진 프루커스! 그 인간에게 폴렉이 죽었다고? 말도 안 된다! 폴렉은 대악마는 아니어도 상급 수준의 악마다! 그리 쉽게 당할 리가 없다!'
거기다 유진 프루커스가 마석문을 통해 마계에 들어가고 5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상급 악마가 죽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곳은 인간계가 아니라 마계다! 악마가 온전히 힘을 쓸 수 있는 마계!
'그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마계에서 다른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반란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급작스럽다.'
그때였다.
마왕은 또 다른 권능이 사라진 걸 느꼈다.
‘중력의 권능이 사라졌다. 켈로시록이 죽었다. 믿을 수 없군. 이렇게 연달아 상급 악마가 죽다니. 거기에 둘 다 각각 하늘과 땅속에 있어서 쉽지 않은 놈들인데….'
마왕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당황하는 걸 깨달은 유리아가 등 뒤에서 기습해왔기 때문이다.
'회피의 권능. 채찍의 권능.'
유리아의 공격을 가까스로 회피하며 손바닥에서 튀어나온 가시 채찍을 휘두른다. 유리아는 무리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뒤로 물러나며 그림자로 모습을 감췄다. 허나 기척까지 완전히 감추진 못했다. 그러기엔 마왕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마왕이 유리아에게 냉기를 날렸으나, 유리아는 그림자 사슬로 냉기를 흐트린 뒤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전투가 이어졌다. 서로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마왕이 버티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고, 유리아들은 유진이 없었기에 무리한 공격은 자중했다.
‘여기선 무리를 해서라도 잡아야 한다. 그림자를 다룰 수 있는 건 너뿐만이 아니다.'
색적의 권능을 잃은 마왕은 초조함을 느끼고 숨겨진 한수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림자의 권능. 암흑의 권능.'
마왕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 유리아를 뒤쫓는다.
꽝!
충격파가 일어났다.
그림자의 권능과 암흑의 권능이 사라졌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수백 개에 달하는 권능이 일시에 사라졌다. 말도 안 되는…. 이게 가능한 일인가?! 마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지금 당장에라도 마계로 돌아가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다. 허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마왕이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는 순간, 유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그 틈을 노렸기 때문이다. 수백 개의 권능을 잃은 마왕은 이를 악물며 유리아를 상대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