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2화 > 1622.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핵에 맞아 골골대면서도 분노와 증오를 내비치며 달려드는 악마들을 모조리 처리한 나는 엘레나와 함께 마왕성으로 이동했다. 그녀의 공간 이동 덕분에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줬으면 한다. 유리아는 어디에 있고, 왜 마계에서 악마를 죽이는 거지?”
엘레나가 물어왔다.
딱히 비밀이랄 것도 없었기에 엘레나에게 대충 설명했다.
“유리아는 다른 공간에서 마왕과 싸우고 있다는 뜻인가. 다른 곳과 이어진 통로가 보이더니… 그게 마석문의 통로였던 모양이군."
“맞다. 마계의 악마가 죽을수록, 마왕이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의 수가 줄어든다. 마왕이 약해진다는 뜻이지.”
“상황은 이해했다. 다만, 왜 핵으로 마왕성을 노리지 않았지? 누가 봐도 마왕성의 전력이 다른 곳보다 강하지 않나? 핵을 이용하면 쉽게 전력을 깎을 수 있었을 텐데.”
“다른 곳보다 전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아까 핵을 맞고도 살아남은 악마들을 보지 못했나? 이곳에 있는 악마들은 그것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군.”
엘레나의 질문이 끝났다.
나는 마왕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왕성은 음침했다. 시커먼 돌로 지어진 성이었다. 크기는 커서 웅장함이 느껴졌다. 물론 그 이상으로 꺼림직함이 느껴지지만.
엘레나는 마왕성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성이라하면 좋든 싫든 소음이 나기 마련이다. 성에는 인력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 성은…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성을 관리하는 악마도 없는 건가?"
“안으로 들어가 보면 알겠지.”
나는 마왕성 정문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정원이 없는 대신에 긴 레드 카펫이 본성 입구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뚜벅뚜벅. 우리는 말 없이 걸었다. 우리는 각자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악마를 경계하고 있었다.
끼이이익.
낡은 문을 열고 본성에 들어섰다.
어두웠다.
삭막한 마계만큼이나 본성도 삭막했다. 장식품은 일절 없고 바닥이나 벽에 먼지가 쌓여 있다. 구석진 곳에는 거미줄이 보인다. 마계에도 거미 같은 벌레가 있는 모양이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먼지가 쌓이지 않은 곳은 계단과 레드카펫 뿐이군.”
엘레나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마왕이 자주 이용하나 보군.”
나는 말하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먼지가 없는 곳만을 밟으며 가다 보니 알현실에 도착했다.
알현실도 삭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장식품은 없었다. 다만 알현실 끝부분에 왕좌가 놓여 있다. 검은색 바위를 깎아 만든 왕좌. 인간이 안기에는 상당히 큰 왕좌였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새까맣고 넓은 공간. 그 끝에 놓여 있는 커다란 왕좌. 원작에서 묘사된 최종 결전 장소다.’
이곳에서 마왕과 카일 일행이 싸운다. 승자는 카일이 되며 원작은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 왕좌에 앉았다. 별로였다. 왕좌는 너무 크고 단단했다. 겉으로 봤을 때 웅장하다는 걸 제외하면 왕좌로서 실격이었다.
“엘레나. 준비해라.”
"뭘 말이냐?"
“이 마왕성을 박살 낼 생각이다. 그럼 악마들도 튀어나오겠지.”
손목에 걸어둔 유성검천이 반짝 빛난다.
마왕성 상공에 커다란 유성검이 생성되었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진다. 검지를 위에서 아래로 까닥인다. 유성검이 마왕성을 향해 내려꽂혔다.
콰콰콰콰쾅!
마왕성이 거세게 흔들린다. 엘레나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재빨리 내 옆으로 다가왔다. 직후, 천장에서 유성검의 검날이 천장을 뚫고 떨어졌다. 거대한 검은 계속 떨어져 바닥을 뚫고 아래로 내려간다. 검으로부터 무형의 파동이 퍼지며 성을 박살낸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천장과 벽이 부서져 잿빛 하늘이 보이고, 바닥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 지하가 보였다.
"으으으으으으!"
지하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굉장히 낮고 거칠었다. 나와 엘레나의 시선이 동시에 지하로 향했다.
“누구냐! 누가 감히 마왕성을 공격했는가…!”
지하에서 먼지투성이 악마가 튀어나왔다.
커다란 박쥐 날개, 근육질의 몸, 염소의 머리와 4개의 뿔을 가졌다. 외형만 봐도 악마란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그야말로 악마의 귀감 같은 악마다.
짤랑짤랑.
그의 허리춤에는 악마의 열쇠뭉치가 걸려있었다.
“너는 누구냐?”
나는 턱을 괴며 악마에게 물었다. 악마는 나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손톱을 세웠다.
"...인간? 인간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짐이 먼저 질문했다. 대답해라. 너는 누구냐?”
"크흠! 보통의 인간이 아니로구나! 나는 발리카세! 마왕님의 충실한 신하이자, 지하 감옥의 신하이다! 네 이놈! 당장 왕좌에서 내려와라! 그 의자에 앉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마왕님뿐이다!”
“그래. 발리카세. 너의 권능은 무엇이냐?"
“내 권능이 궁금한가? 직접 겪어봐라!”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눈썹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 감각. 어디선가 느껴본 적 있었다.
“흐흐흐. 이 건방진 인간놈. 감히 마왕님의 자리를 더럽혀? 네놈과 그 옆에 있는 여자를 산채로 씹어 먹어주마. 흐흐흐. 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인간 고기인가! 입에서 군침이 도는구나.”
기억났다.
정지의 권능이다.
대상을 정지시키는 권능. 마왕이 자주 사용하는 권능이었다.
"흐흐흐흐흐."
웃으며 다가온 발리카세가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 손톱은 어지간한 검보다 더 날카로웠다. 놈의 손이 내 머리에 닿기전, 내가 움직였다. 염력으로 권능을 떨쳐내고 놈의 손목을 낚아채 비틀었다.
뿌드득. 손목이 돌아간 놈이 입을 벌리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악! 어, 어떻게 인간 따위가 내 권능에 저항하는 것이냐!!”
“저항할 수 있는 이유? 짐이 너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인간 따위가 감히!!"
발리카세가 날개를 퍼덕이며 다른 손을 치켜들었다. 나를 공격하려다가 갑자기 멈췄다. 놈의 눈동자가 혼탁해진다. 나는 원인이 무엇인지 바로 눈치챘다.
“엘레나. 환술을 걸었나?"
“가만히 지켜보려니 너무 시끄러워서 말이다. 마침 동요하는 정신이 보이더군. 괜한 참견이었나?"
“아니, 잘했다. 덕분에 일이 더 쉬워졌어."
화련비도를 휘둘렀다. 악마의 머리가 그대로 떨어졌다. 강력한 권능을 가진 것 치곤 여러 가지로 부족해 보이는 악마였다.
악마를 죽인 나는 앞으로 걸어갔다. 지하 구멍, 발리카세가 튀어나온 곳을 들여다본다.
어둡다. 지하가 상당히 깊다.
'최소 30m는 될 것 같군.'
느낌이 왔다. 저 안에 악마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손을 뻗어 엘레나의 허리춤을 휘감았다.
“뭐, 뭐냐?!”
"가만히 있어라. 지금 바로 아래로 내려갈 테니까.”
“뭐? 이거 놔라. 혼자서 충분히… 흐윽?!”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지하로 뛰었다. 천안을 사용하니 어두운 지하도 잘 보였다.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염력을 이용해 몸을 감싸 부드럽게 착지했다.
지하 공간.
그곳은 감옥이었다.
복도가 있고, 그 좌우에 옥방이 쭉 늘어서 있다.
“성안에 이렇게 많은 감옥이 있을 줄이야… 이거 참 놀랍군. 범죄를 저지른 악마를 잡아둔 건가? 하, 악마와 죄수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군.”
엘레나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감옥에 갇힌 죄수 악마.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긴 했다.
“범죄? 이건 마왕의 컬렉션이다.”
“아. 마왕의 권능이 악마의 권능을 사용하는 권능이라고 했나? 과연. 마음에 드는 권능을 지하에 모아둔 건가."
“마왕은 모든 악마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으나, 죽은 악마의 권능은 사용할 수 없다. 악마들끼리 서로 싸워 죽이지 않도록 감옥에 집어넣은 것이겠지.”
나는 가장 가까운 감옥으로 걸어갔다. 감옥의 문은 손잡이의 열쇠 구멍을 제외하고 어떠한 틈도 없었다. 음식을 투여하는 구멍도 없다. 악마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왜 발리카세가 간수 노릇을 하는지 알겠군. 정지의 권능으로 여기에 갇힌 악마들을 수월하게 관리할 수 있을 테니까.’
철컥.
문은 잠겨있었다. 발리카세의 허리춤에 열쇠 꾸러미가 걸려 있었다는 걸 떠올린다. 그 시체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가져오기 귀찮다.'
힘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감옥문을 있는 힘껏 잡아당긴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힘을 줬다. 마나와 염력까지 사용했다. 이번에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 하는 거냐?"
옆에서 보고 있던 엘레나가 핀잔을 준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무언가 장치가 되어 있는 모양이다. 권능 같은 거로 막아 뒀다거나.”
“잠금의 권능 같은 거냐? 웃기지도 않는군.”
"그런 권능이 실제로 있을지도 모른다.”
“비켜봐라. 내가 해보지.”
엘레나가 나섰다. 그녀가 손가락을 딱 쳤다. 문고리가 철컥 돌아가더니 잠금이 해제됐다.
“잠금을 해제하는 마법인가?”
“환술로 잠금을 조작했을 뿐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환술을 이용해 현실을 조작했다는 뜻이었다. 환술사들이 이 장면을 봤다면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나는 문을 열었다.
3평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이었다.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둠 그 자체인 공간의 중심에 악마가 앉아 있었다. 하반신은 염소 다리에 상반신은 늙은 노인의 외형을 한 악마였다. 악마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나와 엘레나를 보며 킬킬 웃는다.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찾아왔군. 나는 격리의 악마, 가르가르라고 하네.”
“격리의 악마? 상대를 격리하는 권능이라고 가지고 있는 거냐?”
“단절의 권능을 가지고 있네.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특화된 권능이지. 공격에도 쓸 수는 있으나, 너무 느려서 효율이 안 나는 권능이지."
“이곳에 갇힌 이유는?"
“자네도 짐작하고 있지 않나. 내 권능이 마왕의 마음에 들었네. 내가 갇힌 이유는 그게 전부일세. 악마들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놈은 특히 마음에 드는 권능을 가진 악마를 지하에 감금했지.”
스르릉.
칼을 뽑아 들었다. 사실 이놈의 이름이나 권능 따위엔 별 관심 없었다. 악마인 이상 죽어야 한다.
“이름 모를 인간이여. 날 살려주게. 마왕을 배신하고 자네의 편에 서겠네. 나는 분명 자네의 도움이 될 것이네. 약속하지."
"필요 없다."
“나는 마왕이 숨겨 놓은 것들을 알고 있네. 그 마왕이 진짜 아끼는 권능들 말일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