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623화 (1,403/2,000)

< 1623화 > 1623.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나는 마왕이 숨겨 놓은 것들을 알고 있네. 그 마왕이 진짜 아끼는 권능들 말일세.”

"……."

개수작이다. 라고 일갈하며 죽여버리기에는 꽤 혹하는 제안이었다.

'마왕도 생각이 있다면 아끼는 권능을 가진 악마는 따로 관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악마의 제안은 신빙성이 충분하다.'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다 싶을 때 이놈을 죽여버리면 된다.

자칭 격리의 악마, 가르가르가 히죽 웃었다. 그는 휘청거리며 감옥을 나왔다.

“이거 참. 이렇게 걷는 건 몇십 년만인지 모르겠군. 걷는 법은 잊어먹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구먼."

“누가 나와도 된다고 했지?"

"이거 왜 이러나?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잖나. 자네들을 공격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솔직히 싸워도 내가 질것 같고."

“수상한 짓거리는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한다면… 그 목을 잘라주지."

“알겠네. 내 목숨이나 보장해주게.”

“걱정 마라.”

일이 전부 끝나기 전까지 죽일 생각은 없었다.

나는 엘레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여차할 때 죽여버리자는 뜻을 보낸다.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몰라도 엘레나는 팔짱을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알겠다. 오늘 밤에 너의 수청을 들겠다. 내거 거절하더라도 강제로 시킬 테지. 어쩔 수 없는 일이군."

"……."

농담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안 간다. 나는 농담일거라 생각한다. 아니어도 딱히 상관없을 듯했다.

“저 감옥에는 챌믹이라는 악마가 갇혀 있네. 가진 권능은 변신의 권능으로 무언가로 변신할 수 있네. 다만 변신 대상의 능력은 사용할 수 없기에 눈속임에 불과해.”

“전투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권능이군. 마왕은 왜 그놈을 지하 감옥에 가둔 거지?”

“마왕의 모습을 하고 마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고를 쳤지.”

"과연."

이번에도 엘레나가 환술을 사용해 문을 열어줬다.

가르가르가 있던 감옥과 비교해 구조적 차이는 없었다. 악마도 방의 중심에 서 있었다. 나와 똑같은 외형을 하고서 말이다.

불쾌감이 치솟았다. 머리로 무언가를 판단하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뇌천류(雷天流) 뇌광(雷光).

붉은 뇌광이 어둠 속에서 질주하며 악마의 머리를 베었다. 악마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내 얼굴인지라 더욱 불쾌했다.

바닥에 쓰러진 악마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볼품없는 해골 뼈다귀. 그게 악마의 정체였다.

“가차 없군. 그렇게 불쾌했나?”

“엘레나. 누군가가 짐의 모습을 한다는 건… 벌레가 몸을 기어 다니는 것보다 훨씬 불쾌하다.”

감옥 밖으로 나섰다.

가르가르는 내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자네, 무섭구먼. 아무리 악마라도 그렇지 대화 한 번 해보지 않고 죽여버리나? 그 악마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지도 않나?”

나는 가르가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왜 마왕을 배신한 거냐?"

“뭔가 착각하고 있군. 난 처음부터 마왕의 편이 아닐세. 마왕에게 붙잡혀 수천 년을 감옥에 갇혀 살았는데, 어떻게 마왕에게 충성하겠나? 마왕을 마왕이라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힘의 논리에 의한 것뿐이네. 이 마계에서 가장 강하기에 마왕이라 부르는 거지."

“마왕을 따르는 악마도 제법 있는 듯한데.”

“죽기 싫으면 따라야지. 어쩌겠나. 뭐, 이 감옥에 있는 악마들은 나처럼 마왕을 따를 생각이 없는 악마들이 한가득이긴 하다만.”

화련비도를 옆으로 뻗었다. 화련비도의 칼날이 지하 감옥의 벽을 긁는다. 오러 블레이드까지 사용했음에도 벽에는 흠집하나 나지 않는다.

“지하 감옥의 벽이 단단하군.”

“봉인의 권능이지. 조건만 맞으면 대상을 영원토록 봉인할 수 있는 권능이지. 마왕이 특별히 아끼는 권능 중 하나이네.”

“위험한 권능 같아 보이는군."

“위험하지. 하지만 그만큼 까다로운 권능이라네. 봉인의 권능을 사용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상대를 굴복시켜야 한다는거네. 전투든, 내기든 어떤 식으로든 상대에게 패배감을 느끼게 해야 하지."

지하 감옥에서 수백 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도 자살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봉인의 형태로 갇혀 있으니 자살할 수가 없는 거다.

“그 말은 감옥에 갇힌 악마들은 모두 마왕에게 패배했다는 뜻이냐?”

“마왕은 악마의 이름을 알면 가진 권능을 알 수 있네. 마왕이 가진 권능의 능력 중 하나지. 악마가 마왕과 싸우는 건 자신의 패를 모두 알려주고 싸우는 것과 똑같네. 반면 마왕은 권능을 3개까지 동시에 사용할 수 있지. 마왕은 조심성도 많아서 기습도 잘 통하지 않네. 상황이 이런데 악마가 마왕과 싸워 어떻게 이기겠나?”

나는 다음 지하 감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에 있는 악마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음. 폭발의 악마인 그로마일 것이네. 별명대로 폭발의 권능을 가지고 있지.”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는 거냐?”

“한때 나는 마왕의 보좌관이었네. 마왕에 협력하는 척하면서 뒤통수를 노리고 있었는데… 설마 독심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을 줄 알았겠나.”

넘겨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복도를 걷던 내 다리가 우뚝 멈춘다.

“독심의 권능을 가진 악마는 어디에 있지?"

마왕이 독심의 권능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면 유리아들이 크게 불리해질 것이다. 최대한 빨리 독심의 권능을 가진 악마를 찾아내 죽여야 한다.

“내가 감옥에 갇히기 전에 죽었네. 듣기로는 자살했다더군. 자살한 이유는… 뭐, 뻔하지. 마왕의 마음을 읽고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게 아니겠나.”

이미 죽었다면 다행이다.

'독심의 권능이 있었다면 마왕은 이미 사용해서 우위를 점했겠지. 내가 좀 조급했군.’

철컥!

엘레나가 지하 감옥의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자마자 폭발이 일어났다. 가르가르의 말을 듣고 호신강기로 대비하고 있었기에 피해는 없었다.

“크케케케케케케!”

괴상하게 웃는 악마는 수박 정도 크기의 털북숭이였다. 털 사이로 굉장히 작은 팔과 다리가 나타나 있었다. 입과 눈이 어디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로마! 나일세!"

가르가르가 그로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크케케케케케케!"

그로마가 괴상하게 웃으며 권능을 사용했다. 가르가르의 앞에 빛이 번뜩인다. 가르가르는 정면에 단절의 권능을 사용했다. 곧 폭발이 일어났으나, 가르가르는 멀쩡했다.

“이런! 그만두고 내 말좀 들어보게! 우리 같이 힘을 합쳐 마왕에게 복수하지 않겠나?! 자네라면….”

“크케케케케케케!”

그로마는 가르가르의 말을 듣지 않았다. 감옥 내에 연속적으로 폭발을 일으킨다. 눈속임이었다. 놈은 통통 튀면서 감옥을 벗어나려 했다.

"멈춰라.”

염력을 사용해 그로마를 움켜쥔다.

“크케… 케케케케…!”

그로마 버둥거린다. 나는 염력에 힘을 주어 그로마를 터트렸다. 그로마의 시체 조각들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안타깝구먼."

푹.

화련비도의 칼날이 가르가르의 왜소한 어깨를 찌르고 들어갔다.

“음. 아프군. 내가 악마가 아니었으면 치명상이었을 걸세.”

"이번이 마지막 경고다. 네놈이 해야할 일은 안내일 뿐이다. 주제넘는 짓은 하지 마라.”

“알겠네. 자네의 마지막 경고를 받아들이겠네. 이 칼 좀 치워주지 않겠나?”

칼을 뺐다. 어깨의 상처는 순식간에 지혈되며 회복된다. 악마다운 회복력이었다.

이후에도 복도를 걸으며 감옥을 열었다. 악마가 보이는 족족 죽였다. 대화 따윈 하지도 않았다.

대다수의 악마는 기습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오래 갇혀 있었던 탓인지 반응이 둔했다. 그중에는 오랜 봉인 시간에 삶의 의지가 꺾여 도리어 죽음을 원하는 악마들도 있었다.

20분 동안 70마리에 달하는 악마를 죽인 나는 화련비도의 칼날을 가르가르에게 겨누었다.

“축하하네, 악마 학살자. 역사상 이토록 많은 악마를 죽인 인간은 자네가 처음일 것이네. 기분은 어떤가?”

“아무 느낌도 없다. 이제 마왕이 숨긴 악마들을 말해라.”

지하 감옥에 갇힌 악마 대부분이 대단하고 성가신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왕이 주로 사용했던 지배의 권능, 빙의의 권능, 공간의 권능 등을 사용한 악마들은 없었다.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있다고 봐야 한다.

“마왕성 어딘가에 비밀 장소가 있네. 마왕이 나의 권능을 이용해 단절시켜 놓은 곳이지. 그곳에 마왕이 아끼는 악마들이 갇혀 있을 걸세.”

"안내해라.”

내뱉은 목소리는 차가웠다.

엘레나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내 어깨를 꾹 누르듯이 잡는다.

“진정해라. 초조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 네가 죽인 악마들은 적지 않다. 그 마왕이라 하더라도 타격이 전혀 없을 수 없다. 어쩌면 마왕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엘레나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마왕의 상대는 그 유리아다. 마왕이 아주 약간이라도 방심한다면 치명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짐은 초조함을 느낀 적 없다.”

"그러시겠지."

엘레나가 피식 웃었다.

우리는 가르가르의 뒤를 따라 마왕성 뒤편으로 이동했다.

마왕성 뒤에는 신전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신전을 바라봤다. 유성검을 사용해 박살 낸 마왕성과 달리 신전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이런 신전이 마왕성 뒤에 있을 줄 몰랐군.”

“괴리의 권능, 투명의 권능 등의 여러 권능을 이용해 만들어 놓은 결과물일세. 자네가 지하 감옥에 있는 악마들을 죽여댄 덕분에 모습을 드러낸 거지.”

신전은 웅장하기보다는 아름다웠다. 음침한 마왕성에 비하면 믿기지 않을 만큼.

엘레나는 팔짱을 끼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조소였다. 그녀는 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마왕이 신전을 짓고 숨겨 놓았다? 신실한 마왕이 여기에 있었군."

“마왕은 신을 모시지 않네."

"그럼 왜 여기에 신전을 지은 거지?”

“자신을 위한 신전이지. 마왕. 그놈은 자신이 악마의 신이 되길 원했네. 자신은 악마들의 신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놈이었지.”

“모든 악마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면… 뭐, 신이라고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군.”

엘레나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르가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놈이 인간계를 침공한 것과 관련 있나?”

“악마의 수를 늘리기 위해서네. 악마는 다른 생물과 달리 부정한 마나 농도가 높은 곳에서 자연 발생하네."

“악마가 더 많은 마왕의 힘은 더 강해지겠군.”

"인간계를 침식하여 마왕성을 짓고, 마왕성을 다시 신전으로 짓고 마신으로 군림하는 것이 그놈의 목적이네. 정작 그놈을 추앙하는 악마는 한 줌도 되지 않네만.”

“왜?”

“마음에 드는 권능을 가진 악마를 잡아 감옥에 가두는 놈일세. 누가 그런 놈을 좋아하나? 악마들은 마왕을 두려워할지언정 존경하지는 않네."

가르가르는 앞으로 걸어가 신전의 문을 열었다.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