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틀란티스]의 구역은 기본적으로 주변 구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구역 혼자서 살아가기는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교를 하듯 다른 구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다른 구역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아 고립되면 생활이 힘들어진다. 생존의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예외는 있다. 대표적으로 서쪽의 사막 구역이다. 사막 구역은 기본적으로 다른 구역보다 넓었다. 그러나 풍족하지는 않다. 척박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다른 구역의 관심을 받지 않는다.
구역간의 교역? 다른 구역에서 사막 구역으로 넘어오는 경우는 상인을 제외하고 드물었다. 여행 목적? 서쪽 외곽 구역에는 사막을 보겠다고 여행 오겠다는 미친놈들이 있을지 몰라도, 내가 있는 ‘5,146 구역, 전갈사막’은 아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다른 구역이 접촉해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내가 천마신교를 이 사막에 세우고 구역을 지배한 지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다른 구역이 공식적으로 접근해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희들의 춤을 지켜보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련이 남아서 그런지 발이 좀처럼 떼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무희들이 나를 보며 웃는다.
가시적인 웃음이라도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아름다웠으니까. 땀에 젖은 피부는 탱글탱글했고, 내쉬는 숨결은 야릇했다. 원래라면 무희들에게 다이빙하듯 뛰어들어 천국의 시간을 보냈을 테지만… 지금은 구역에 불청객이 온 상태다.
나는 에나스와 함께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아마 동맹을 요구할 듯싶습니다.”
에나스가 말했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았다. 동맹으로 얻는 이득은 별로 없다.
나는 알현실로 들어갔다. 넓고 푹신한 의자에 반쯤 몸을 기댔다. 시녀들이 술과 과일을 가져왔다. 나는 시녀들의 젖가슴과 엉덩이를 매만지며 건네주는 술과 과일을 마셨다. 나는 지금 행복했다.
곧 에나스가 다른 구역에서 왔다는 사자들을 데려왔다. 하얀색 천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 자체는 신기하지 않았다. 사막의 살인적인 햇볕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건방진 것들. 내 앞에서 끝까지 얼굴을 가리고 있을 것이냐?”
“죄송합니다, 전갈 사막의 지배자시여. 저희는 타인에게 얼굴을 내비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저희의 문화이며 규율입니다.”
천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고운 여성의 목소리. 그것만으로 화가 풀렸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이곳은 나의 구역이다. 너희의 문화와 규율을 내게 강요하지 마라. 얼굴을 드러내기 싫다면 이대로 도시 밖으로 꺼져라.”
내 경고에 사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들 중 가장 높아 보이는 인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갈 사막의 지배자께서 하신 말이 옳습니다. 다른 구역에 왔다면 다른 구역의 법과 문화를 따라야 하는 법이지요.”
그들은 천천히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었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들의 미모가 평균 이상으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뚜렷한 이목구비, 흑갈색 머리카락과 구릿빛의 피부. 무엇보다 내 시선을 끈 것은 그녀들의 귀였다. 길쭉한 귀. 그녀들은 인간이 아니라 엘프였던 것이다.
“인간이 아니었군.”
“문제가 됩니까?”
“전혀.”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시녀들을 내보냈다. 대충 돌려보내려고 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이제야 대화할 준비가 끝난 것 같군. 다시 소개하지. 나는 5,146 구역, 전갈사막의 지배자이자, 천마신교의 주인인 천마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지금 나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진짜 얼굴인 것도 아니다. 기만(SS)을 이용해 얼굴을 바꾼 상태다.
“저희는 5,140 구역, 사막숲의 지배자, 칼라스 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저는 일행의 대표인 헬리안입니다. 칼라스 님의 명령에 따라 천마신교를 찾아왔습니다. 천마님의 명성은 5,140 구역에서도 유명합니다.”
5,140 구역, 사막숲.
서쪽에 있는 사막 중에서 부유한 측에 속하는 구역이다. 사막숲이란 이름답게 사막에 나무가 자란다. 설마 사막숲의 주민이 엘프일 줄은 몰랐지만.
‘엘프는 종류가 다양하니 이상한 건 아니지.’
우드 엘프, 아쿠아 엘프, 나이트 엘프 등등 자연에 따라 엘프가 있다. 사막 엘프가 있다고 해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군. 냉수라도 한 잔 줄까?”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들은 거절하지 않았다. 물이기 때문이다. 이 사막에서 냉수는 차보다 비싼 고급품이었다. 시녀들이 얼음물 동동 띄운 냉수를 가져왔다. 사막 엘프들은 냉수를 꿀꺽꿀꺽 삼켰다. 그녀들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퍼진다.
“어떤가?”
“…물맛이 아주 좋습니다. 천마님을 만나기 위해 여러 사막을 돌아다녔습니다만, 이처럼 맛이 좋은 물은 처음입니다. 평범한 오아시스의 물은 아닌듯하군요.”
그거야 당연하다. 이건 한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브랜드의 생수니까. 기본적으로 사막에 고여있는 오아시스의 물보다 여러모로 뛰어나다.
“나는 잡설을 싫어한다. 본론에 들어가지. 그쪽 구역이 원하는 건 뭐지?”
“우선 이 일은 저희 구역뿐만이 아니라 서부 사막지대 전체에 일어난 일임을 알아주십시오.”
“닷새 전의 일을 말하는 건가?”
“예. 닷새 전 모든 사막 구역의 지배자에게 ‘오아시스의 주인’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오아시스를 유지하고 싶으면 여자를 바치라는 내용이었지. 아주 짜증스러운 요구였다. 더 열받는 건 실제로 오아시스가 말라가고 있다는 점이지.”
닷새.
오아시스의 주인은 열흘의 기간을 주었다. 그중 절반이 지난 지금, 오아시스는 절반 이상 메말랐다. 오아시스의 물을 퍼 나르며 비축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 오아시스의 물이 차오르지 않고 있다. 이대로면 사흘 내로 오아시스의 바닥이 드러날 것이다.
“저희 사막숲 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아시스는 사막의 생명입니다. 이대로 오아시스가 사라지게 둘 수는 없습니다.”
“해결법은 간단하지. 오아시스의 주인에게 제물을 바치면 된다.”
“사막숲은 인신 공양이 금지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동족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 대단한 동족애로군.”
“……혹시 천마님께선 오아시스의 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까?”
나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역으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확신할 수는 없으나, 인신 공양을 하지 않으셨으리라 봅니다.”
“왜?”
“여기까지 오면서 인신 공양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인신 공양을 진행했다면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야기했을 겁니다.”
“내가 비밀리에 인신 공양을 진행했을 수도 있지 않나?”
“오아시스의 주인의 요구는 이미 사막지대 전체에 퍼졌습니다. 숨겨도 의미 없습니다. 결국엔 알게 될 테니까요. 무엇보다 천마님은 그러실만한 분이 아니란 건 알고 있습니다. 상대가 신이라 할지라도 맞서 싸우면 싸웠지 굴복하지 않으실 테니.”
“나에 대해 들은 모양이군. 그 말대로다. 나는 오아시스의 주인인가 뭔가에 굴복할 생각 없다.”
“저희 사막숲 또한 천마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오아시스의 주인에게 한 번 굴복하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될 것입니다. 5,140 구역, 사막숲은 전갈사막의 지배자이신 천마님께 정식으로 동맹을 요청합니다. 동맹의 기한은 오아시스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동맹의 목적은 오아시스의 주인의 타도입니다.”
헬리안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시큰둥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헬리안이 당황한 듯 두 눈이 흔들린다.
“동맹을 해서 내가 얻는 이득은 뭐지?”
“오아시스의 주인의 타도입니다. 오아시스의 권한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천마신교는 오아시스가 없더라도 버틸 수 있다. 물이 나올 구석이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오아시스의 주인을 상대할 필요는 없다. 왜인 줄 아나? 너희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버티지 못하는 너희가 오아시스의 주인을 쓰러뜨릴 테니까.”
사막숲.
사막에 있는 숲. 좋다. 이름만 들어도 신비한 느낌이 마구마구 난다. 근데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 숲을 유지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가 필요할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코 물이다.
‘오아시스의 물로 나무를 키우고 유지하겠지. 즉, 오아시스가 사라지면 사막숲도 사라진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급한 건 이 엘프들이다.’
급하니까 이렇게 사자를 보내는 것이다. 아마 다른 사막 구역에도 엘프들을 보냈겠지.
“……천마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오아시스의 물이 없더라도 버틸 생각이 있다.”
“주제 넘는 발언입니다만,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 사막에서 물과 관련된 일은 무척 민감합니다.”
“멍청하군.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죽이면 된다. 그 간단한 해결 방법을 모르는 건가.”
헬리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미친놈 보듯 날 바라봤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에나스! 밖에 있나? 들어와라!”
“네. 천마님.”
대기하고 있던 에나스가 바로 들어왔다.
“에나스. 반란을 준비하는 놈들이 있나?”
“서쪽 빈민가에 10인 이상의 사람이 회동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반란의 냄새가 나는군. 쓸어버려라.”
“네. 천마님.”
에나스가 밖으로 나갔다.
나는 어깨를 세우며 헬리안을 바라봤다. 헬리안의 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봤나? 뛰어난 지도자는 반란의 싹을 허락하지 않는 법이다.”
“…저희는 천마님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은 적 없습니다. 또한 저희는 천마님의 뜻을 존중합니다. 천마님의 뜻은 칼라스 님에게 전하겠습니다.”
헬리안은 바로 떠날 준비를 한다. 나와 엮이기 싫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긴다.
“잠깐. 말은 끝까지 들어라. 사막숲이 혜택을 제공한다면 동맹을 맺을 생각이 있다.”
헬리안이 멈칫했다. 그녀는 잠깐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무희다. 사막숲의 무희를 내게 넘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