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634화 (1,414/2,000)

“첫째는 무희다. 사막숲의 무희를 내게 넘겨라.”

무희가 없다. 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오락거리가 극단적으로 적은 이 사막에서 무희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사막숲도 사막 지역인 이상 분명 무희가 존재할 것이다.

“물론 무희는 엘프들이여야 한다.”

헬리안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천마님. 저희는 인신공양을 하지 않습니다.”

“누가 인신공양을 하라고 했나? 무희를 넘기라고 했다. 나는 무희를 죽이지 않는다. 1년. 1년 동안 내 아래에서 일한 무희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주겠다.”

“맹세하실 수 있으십니까?”

“얼마든지.”

나는 씩 웃었다.

권리를 주겠다고 했지 돌려 보내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무희들은 내게 남을지, 고향으로 돌아갈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게 될 것이다.

‘잘해주면 돼. 돈도 많이 주고, 먹을 것도 제공하고… 적당한 권력까지 쥐여주면 되겠지.’

무희의 사회적 지위는 창녀나 일반인보다는 높으나, 전사보다는 낮다. 권력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싹 사라질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무엇입니까?”

“무희를 보내기로 했나? 네가 그럴 권한은 있고?”

“최종 결정권은 칼라스 님에게 있습니다만, 무희 10명 정도는 보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영토다.”

“네?”

헬리안이 미간을 좁힌다.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해한다. 여긴 중앙 대륙 쪽이 아닌지라 영토라는 개념이 생소하니까.

“…구역 내의 땅 일부를 달라는 겁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말이 잘못 나왔군. 나는 영토라는 단어가 익숙해서 말이야. 동맹에 가담하지 않는 사막 구역이 있을 거다. 나는 그놈들을 공격할 거다. 그 지배권을 인정받길 원하며, 동맹들이 내 정복 활동에 방해하지 않을 것을 원한다.”

동맹에 참가하지 않는 구역도 많을 것이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사막숲처럼 똥줄 타는 놈들이 먼저 나서서 오아시스의 주인과 싸울 테니까. 그 대가로 인신공양. 신에게 인간을 바치는 것. 신이 존재하는 세계이니 인신공양은 드물어도 엄청난 비난을 받지 않는다. 나 같은 권력자에겐 여자 몇 명을 바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하고. 과거 에나스가 말했던 것처럼 늙어서 쓸모없는 여자를 바치는 것도 한 방법이니.

“제 권한을 벗어나는 요구로군요. 칼라스 님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맹자들의 의견도 필요합니다. 대답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입니다.”

“동맹을 제안하고 이끄는 건 그쪽이다. 대답은 알아서 가져와라.”

“만약, 천마님의 제안을 동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당연히 내가 꼴리는 대로 할 거다만?”

“…….”

“공간 이동 주문서는 가지고 왔겠지. 이틀 내로 대답을 가져와라.”

마음 같아선 직접 쳐들어가서 대답을 듣고 싶으나, 상대가 허락할 리 없었다. 이 사막지대에서 구역의 지배자는 한 나라의 왕이나 다를 바 없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바로 전쟁이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들은 궁궐을 나서 공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했다.

나는 다시 시녀들을 불러 술을 마시며 늘어졌다. 에나스가 조심히 내 곁으로 다가온다.

“천마님. 구역을 넓히실 작정이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온다. 밖에서 대화 내용을 엿들은 것이다. 내가 암묵적으로 허락한 일이었다.

“원래 그럴 생각이었다. 다른 구역의 눈치가 보여서 안 그럴 뿐이었지.”

천마신교는 무적이 아니다. 사막 지역은 넓다. 넓은 만큼 저력이 존재한다.

‘함부로 다른 구역을 침범하고 전쟁을 벌였다가… 다른 구역이 뒤통수를 칠 수 있다.’

백환 세계에서 전쟁을 경험해본 나다. 이런 것쯤은 머리를 조금만 굴려도 알 수 있다.

‘최악의 경우 공공의 적이 될 수도 있지.’

천마신교가 박살 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조용히 지내며 힘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오아시스의 주인인가 뭔가 하는 놈 덕분에 판이 흔들렸다.’

앞으로 사막은 두 개로 나뉠 것이다. 동맹에 가입한 자들과 가입하지 않은 놈들. 동맹은 날로 먹으려 하는 비동맹이 꼬울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나처럼 비동맹자들의 구역을 노리는 놈들도 있을 테지.

“에나스.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전쟁을 준비해라.”

“천마신교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천마께서 명령하신다면 천마신교의 전사들은 적들을 향해 돌격할 것입니다.”

“든든하군. 그럼 이제… 내 자지나 빨아라.”

“네. 천마님.”

에나스의 펠라치오 솜씨는 날이 갈수록 상승했다.

• • •

5,140 구역, 사막숲의 사자인 헬리안은 다음 날 찾아왔다.

“칼라스 님께서 천마님의 동맹 가입을 환영하셨습니다.”

“내 조건이 받아들여졌다는 거군.”

나는 헬리안의 뒤쪽을 쳐다봤다. 그녀의 뒤로 10명의 여인이 있었다. 검은색의 옷으로 몸을 감싼 그녀들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옷을 벗었다. 검은색 천이 매끈한 구릿빛 피부를 타고 스르륵 떨어진다.

몸매가 드러나는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무희를 본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엘프답게 모두 미모가 뛰어났다. 젖가슴과 보지가 언뜻 보인다. 음부도 구릿빛으로 음모 하나 없이 매끈하다. 철저히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무, 무슨 조건?”

무희들에게 시선이 팔린 나는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대사관 파견입니다. 서로의 구역에 대사관을 파견하기를 원합니다. 천마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대사관으로서 이 구역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 에나스. 사막숲으로 대사관을 파견해라.”

“네. 천마님.”

갈색 피부 엘프 무희가 눈앞에 있는데 대사관 따위가 중요하겠나.

지금 나는 미래를 보고 있었다.

엘프 무희와 기존의 무희들이 섹시 댄스 대결을 하는 미래를!

‘끝내주는군.’

군침이 질질 흐른다. 당장 무희들과 함께 연회장으로 뛰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헬리안의 볼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헬리안이 나무판을 꺼냈다. 특이한 기운을 흘리는 목판이 내 시선을 끌었다.

“그건 뭐지? 보통 물건은 아닌 것 같군.”

“맹세의 연판장입니다. 사막숲의 신성한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사막 동맹의 근원이자, 증거가 될 것입니다.”

연판장을 받았다.

「맹세의 연판장

연판장에 이름을 적고 피를 묻혀 맹세한다.

맹세를 어길 시 불이익을 받는다.

랭크: A」

랭크 A의 물건. 결코 가벼운 물건이 아니었다.

“맹세를 어기면 어떤 불이익을 받는 거지?”

“확실히는 모릅니다만, 끔찍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A급의 저주라.

할만한데?

최악의 경우 내가 죽더라도 완전 회복이 있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당연히 저주를 막거나 저주를 해제하는 물건들이 있었다. 저주를 거는 물건보다 희귀하고 귀해서 문제지.

연판장에 이름을 적는다.

천마를 적었다. 연판장에서 연기가 나오더니 이름이 지워졌다.

헬리안이 그걸 보고 입을 열었다.

“천마님. 진명을 적으셔야 합니다.”

“나는 천마가 진명이다.”

“하지만….”

헬리안이 뭐라고 하든 다시 이름을 적었다.

아까와 똑같은 천마. 그러나 아까와 달리 기만(SS)을 사용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연판장은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어떻게…. 천마란 이름이 본명이셨습니까? 아니, 아까 그렇게 적었을 때는 연판장이 반응했는데….”

헬리안의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SS랭크의 기만이다. 고작 A랭크에 불과한 연판장 따위가 저항할 수 있을 리 없다.

“나는 천마다.”

헬리안이 입을 오물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똑똑한 여자다.

이번에는 연판장에 피를 묻힐 차례다. 칼로 손바닥을 찢었다. 콸콸콸. 생각했던 것보다 피가 많이 나왔다. 피투성이의 손바닥을 연판장에 꾹 찍었다.

“천마님! 포션을 가져오겠습니다!”

“필요 없다.”

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피는 이미 멎었고 상처 부위는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재상하고 있었다.

「이름: 성유진

클래스: 천마(天魔)

칭호: 보지의 수호자

신좌: 마천의 왕

소속: AL 401 지구.

근력: 127 민첩: 115 체력: 120 마나: 130 행운: 69

고유 특성: 기만(SS)

특성: 천마지체 (S)

스킬: 천마신공 (SSS) 종속 (S) 마풍신공 전수(SSS), 전투 회복(S), 생지옥(S)

(상태창 적용중)」

지금 내 상태창이다. 천마지체(S) 덕분에 어지간한 상처는 바로 낫는다.

“동맹은 이것으로 성사되었다.”

헬리안에게 연판장을 던졌다. 헬리안은 연판장을 양손으로 받아내고 고개를 숙였다.

“예. 확인했습니다.”

“연판장을 보니 동맹은 나를 포함해 4곳 밖에 없군. 이대로 괜찮은 거냐?”

“3명의 지배자가 곧 동맹에 가입할 것입니다.”

“오아시스의 주인을 찾는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 동맹을 해도 정작 오아시스의 주인의 위치를 알아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사막숲의 고위 주술사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오아시스의 주인을 찾아낼 것입니다. 이미 오아시스의 주인이 사막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헬리안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5,140 구역, 사막숲은 엘프 주술사들의 힘이 무척 뛰어나다고 한다.

• • •

오아시스의 주인이 말한 기간이 지났다.

나는 당연히 공양을 바치지 않았다.

「오아시스의 주인(僞)이 오아시스를 거둬갑니다.」

「5,146 구역, 전갈 사막에는 이제 오아시스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아시스의 주인(僞)이 관대함을 베풉니다.」

「제물 10,000 명을 오아시스의 주인(僞)에게 공양하면, 오아시스의 축복이 사막에 내려질 것입니다.」

오아시스가 메말랐다.

오아시스가 있던 장소에는 물 한 방울은커녕 젖은 모래도 보이지 않았다.

“제물 1만? 지랄.”

나는 보란 듯이 생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콰직! 빈 플라스틱 생수병이 찌끄러뜨리고 뒤로 내던졌다.

쿠르릉.

먹구름이 몰려온다. 이윽고 먹구름에서부터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환호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용길공주가 제대로 일하고 있군. 오늘은 잔뜩 즐거워해라. 곧 전쟁이 일어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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