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665화 (1,445/2,000)

조금 시간이 지나자 회전력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나는 서둘러 헤엄쳐 호수 밖으로 올라갔다. 투명할 정도로 새파랗던 호수는 이무기의 피와 살덩어리로 오염됐기 때문이다. 1초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나리!! 대단하십니다요! 나리!!”

옥토가 제 자리에서 깡충깡충 뛰며 호들갑을 떨었다. 진심으로 우려 나오는 감탄은 아니다. 살기 위한 연기다. 나는 썩 마음에 들었다. 원래 아첨이란 게 연기니까. 옥토는 나름 제 주제를 잘 아는 편이었고.

“이무기. 별거 아닌 놈이었다.”

“이무기의 시체는 안 챙깁니까? 나리.”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엉망이 된 이무기의 시체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저 시체가 보상이란 뜻이었다.

“귀찮다.”

“이무기의 고기는 그 맛이 뛰어나고, 정령에도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요.”

“이 빌어먹을 토끼 새끼가. 지금 내 정력을 무시하는 거냐?!”

“아니에요! 아니에요! 나리!!”

옥토가 다급히 말했다. 나는 말하는 토끼의 방정을 무시하고 근처에 털썩 앉았다.

‘정력에 좋다는 말에 조금 혹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움직이기 귀찮았다.

회전마룡의 힘을 사용하느라 기진맥진했다.

그리고 보상은 이것뿐만이 아닐 것이다.

‘히든 던전이다. 뭔가 있다. 이무기만 잡고 돌아갈 수는 없지. 옥토는 길을 잘 찾으니 잘 이용하면….’

눈앞에 알림창이 떠오른다. 다행히 옥토를 앞세워 숨겨져 있는 보상을 찾아 움직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월산의 정기가 달의 호수를 가득 채웁니다.」

「이무기에게 눌러있던 기운이 해방됩니다.」

「외부와의 차단이 해제됩니다.」

「토끼 상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공간이 쩍 갈라지더니 커다란 배낭을 멘 토끼가 튀어나왔다.

토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나와 옥토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야. 동족분이 있으셨네요. 근데 제 고객은 아니시군요. 거기 인간님. 반갑습니다, 전 토끼 상인 로토입니다!”

이쯤 되면 히든 구역의 보상이 뭔지 모를 수가 없다. 이 히든 구역의 보상은 토끼 상인의 상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나쁘지 않네.’

괜히 투덜거렸으나 올라가는 입꼬리는 막지 못했다. 나쁜 정도가 아니라 운이 좋다. 이런 히든 구역에서 만나는 특수 상인은 그만큼 특별한 물건들을 판매하니까. 만났다면 땡잡은 것이다. 물론 가진 AP가 많을 경우에 한해서.

“로또.”

“로토입니다!”

“그래. 로또. 무슨 물건을 파는 거지? 쓰레기 같은 물건들을 판다면 실망해서 널 죽일지도 모른다.”

“무, 무서운 분이시군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고객님에게 딱 맞는 물건들을 판매하는 상인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저는 시스템 님의 하청이거든요!”

단번에 납득됐다.

‘시스템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겠지. 특수 상인 중에서도 최상급이군. 로또 맞았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다음에도 여기에 오면 널 만날 수 있나?”

“아니요. 전 1년에 몇 번 밖에 나오지 않는 특수한 상인이니까요. 운이 좋지 않으면 만날 수 없어요. 고객님이 저를 만난 건 고객님의 운이 좋아서예요. 웬만한 운으로는 저를 만나기 쉽지 않답니다! 하하하!”

토끼 상인이 유쾌하게 웃었다.

행운 능력치가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내 행운이 좀 높긴 했다.

나는 로또에게 다가갔다. 토끼 상인의 뒤에 시스템이 있다면 죽이고 빼앗는 건 불가능했다.

“물건부터 보여줘라.”

“여기 있습니다.”

로또가 토끼 귀를 쫑긋거리며 짧은 발을 흔들었다.

눈앞에 알림창이 떴다. 토끼 상인에게서 구매할 수 있는 물건들이 촤르륵 늘어서 있다.

「피로 물든 도포(S) - 800,000 AP

악마 소환서(SS) - 2,000,000 AP

번개 질주(C) - 150,000 AP

가식(A) - 1,780,000 AP

어느 연금술사의 비약이 숨겨져 있는 지도(B) - 400,000 AP

마왕의 운명(SSS) - 66,666,666 AP

…….」

값비싼 물건과 스킬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이 물건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나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가장 위에 있는 피로 물든 도포(S)의 경우에는 마공을 사용할 때 보정이 붙는다.

‘S랭크 결코 낮은 등급이 아니야.’

평범한 추방자들의 경우 A랭크 물건이나 스킬을 얻을 기회가 오면 눈엘 불을 켜고 달려든다.

‘근데 이게 나한테 도움이 되나?’

천마신공에 대한 보정은 이미 받고 있었다.

특성 천마지체(S)와 스킬 천마신공(SSS)이 그거다.

‘이 도포가 천마지체만큼 천마신공과 시너지를 일으킬까.’

그럴 리 없다. 천마지체는 천마신공을 위한 특성이었다. 그리고 도포와 천마지체는 방향성이 다르다.

‘내 천마신공은 한계에 달했어. 도포의 효과로 추가로 보정 받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게 있나?’

보정 받는다고 해서 규격외(EX) 랭크로 올라가는 건 아니니까.

나는 피로 물든 도포(S)를 넘겼다. 그리 끌리지 않았다.

‘피로 물들었다고 하니 피 냄새도 나겠지.’

다음으로 내 시선을 끈 건 SSS 랭크 특성이었다.

마왕의 운명(SSS) - 66,666,666 AP.

모든 능력치를 올려주는 특성이다. 그 외에 마왕이 될 수 있다는 부연 설명이 붙어 있었다.

‘랭크에 비해 설명이 적고 모호하다. 이건 대박 안 봐도 대박이군.’

사고 싶으나 AP가 부족했다.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보유 AP: 12,410,197」

‘내가 가진 AP가 적지 않은데… 마왕의 운명(SSS)은 비싸도 너무 비싸군.’

저걸 살 수 있는 인간은 몇 없을 것이다. 나는 미련을 털어내고 다른 물건들을 확인했다.

물건들을 주르륵 훑는 와중에 특이한 물건이 내 시선을 끌었다.

「현무의 콘돔(A) - 50,000 AP」

콘돔이 있었다. 그것도 A랭크 콘돔이었다.

「현무의 콘돔

콘돔을 끼면 극강의 방어력을 가질 수 있다.

랭크: A」

“이건 또 뭔 병신같은 물건이야.”

어이가 없어 중얼거리자 토끼 상인이 눈을 반짝였다.

“아, 그 상품을 말하자면 콘돔을 끼는 것만으로 현무에 버금가는 방어력을 가질 수 있죠! 일회용이란 점이 단점이지만, 어지간한 공격을 버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요! 아마 청룡의 브레스에서도 버틸 수 있을 거예요!”

“난 절대 콘돔을 끼지 않는다.”

「성감의 밧줄(S) - 1,500,000 AP

청결액(A) - 50,000 AP

서큐버스의 채찍(A) - 700,000 AP

토끼털 구속구(B) - 120,000 AP

발정의 토끼 귀(SS) - 2,500,000 AP

…….」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목록을 본 토끼 상인 로또도 두 눈을 부릅떴다. 로또는 괜히 뒷걸음질 치며 살짝 거리를 벌렸다.

“이, 이 목록은 제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시스템이 고객님에게 맞춰서 판매하는 상품들이에요!”

“시스템은 날 잘 알고 있군.”

나는 성인 용품들을 천천히 살펴봤다.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없었다.

특히 마음에 드는 건 두 개였다. 하나는 성감의 밧줄(S). 구속한 대상의 성감도를 2~100까지 조절할 수 있다.

‘그리고 발정의 토끼 귀.’

「발정의 토끼 귀.

토끼 귀를 착용하면 발정한다.

랭크: SS」

랭크 SS치고는 빈약한 효과.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랭크의 기준은 시스템이 매긴다. 시스템이 SS라는 높은 랭크를 붙였다면 분명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종의 저주를 생각하면 된다. 대상에게 저주를 건다고 해서 무조건 걸리지 않지. 대상의 저항력이나 정신력, 특수한 물건의 효과 등에 영향을 받으니까.’

이 심플한 효과를 가진 물건이 SS 랭크라는 것은 상대방이 장난 아니게 강하더라도 통한다는 뜻이다.

“사겠다.”

“오? 저, 정말로? 전투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효과인데요….”

“산다고 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폭풍의 쇼핑을 계속했다.

“고객님! 여기 토끼 귀와 잘 어울리는 토끼 꼬리도 있습니다! 물론 바니걸 의상도 있지요!”

“나리!! 바니걸 의상은 제가…!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요! 모델만 구해주세요! 역작을… 역잘을 만들겠습니다요! AP만 충분하다면 여기에 파는 바니걸 의상보다 더 좋은 품질의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요!”

두 마리의 토끼가 빽빽 소리 지른다. 나는 무시하고 쇼핑에 집중했다.

「강철의 토끼 꼬리.

토끼 꼬리를 착용하면 육체 내구도가 상승한다.

랭크: S」

‘생각보다 가격은 별로 나가지 않는군. 사야지.’

바니걸 옷은 보류했다. B랭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A 랭크였으면 샀을 텐데.’

명품을 보며 높아진 눈은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광란의 쇼핑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 옆에는 로또에게서 구매한 물건들이 점점 쌓였다.

「보유 AP: 2,250,197」

천만 AP를 쓰는 건 순식간이었다.

전투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들이 아닌 성인용품에만 AP를 썼다.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다.

‘지금 내가 지배하고 있는 구역만 해도 몇 개인데. AP는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벌려.’

본래 벌어들인 AP로 구역에 투자해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기본이지만…, 나는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디 보자…. 성인 용품은 거의 다 샀군.’

목록의 끄트머리에서 재밌는 물건을 발견했다.

「달의 거울.

달빛이 닿는 곳을 볼 수 있다.

달빛을 모을 수 있다.

랭크: S」

달의 거울.

항아가 가지고 있는 보물. 가격은 무려 200만 AP다.

“재밌는 걸 파는군.”

“관음하기 딱 좋은 물건이지요.”

“달빛을 모은다는 건 무슨 뜻이지? 달빛을 모아서 레이저로 쏘는 건가?”

“물론 그것도 가능해요. 달빛은 에너지니까요.”

“에너지를 축적한다는 능력을 가졌다는 거군. 그 에너지는 다양하게 쓸 수 있겠지?”

“네. 네. 에너지는 사용자가 쓰기 나름이죠.”

물론 상점에서 파는 달의 거울(S)은 가짜다. 달의 거울 뿐만이 아니라 신과 관련된 물건들은 모두 가짜다. 원본에 비하면 그 효과가 상당히 떨어진다.

“재밌군. 구매하겠다.”

“감사합니다!”

달의 거울이 나타났다.

동그란 거울이었다. 크기는 수박과 비슷했다. 달의 거울에는 내가 비치고 있었다. 나는 거울에 집중했다. 그러자 내 모습이 일그러지더니 다른 것이 보였다.

엘레나였다.

의자에 앉아있는 엘레나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괴며 오만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다섯 명의 남녀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눈치를 보고 있다. 엘레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들을 하나씩 훑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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