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8화 > 1678. 헌터 VS 뱀파이어
생각보다 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덕분에 일이 쌓였다. 천마신교의 일이라던가, 에이플랜 레기온의 일이라던가.
‘몰라. 귀찮아.’
천마신교나 에이플랜 레기온이나 나 한 명 없다고 망해버릴 정도로 부실하지 않았다.
천마신교의 경우 갑자기 지배 구역이 넓어지면서 여러 문제가 한 번에 터진 모양이지만, 아래에 있는 놈들이 잘할 거라 믿는다. 정 안 되면 대량으로 숙청해서 문제를 없애면 된다. 숙청은 답을 알고 있다.
‘에이플랜 레기온에 가봐야 하고, 육변기도 교육해야 하고… 할 게 너무 많아.’
귀찮았다.
‘나중에 하자.’
[유희를 종료합니다.]
***
어제 하루는 굼벵이처럼 시간을 보냈다.
인간에겐 간혹 뭐든 하기 싫은 날이 찾아오는데, 어제가 바로 그날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씻지도 않고 누워 있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그리고 밤에는 한하린과 함께 자동차 극장으로 갔다. 액션 영화였던 것같은데 대충 봐서 영화 내용이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다만, 자동차 극장은 꽤 스릴 넘치는 곳이었다. 나중에 한하린과 또 갈 것 같다.
오늘 나는 소파에 반쯤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유희 생활 어플을 확인한다.
[성유진
레벨: 87
근력: 120 체력: 113 민첩: 110 지능: 110 정력: 120 마나: 120]
[사용 가능 포인트: 10,651]
포인트를 쓰지 않았다.
뭔가 애매한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1만 포인트를 보면 심장이 막 뛰며 설렜는데, 지금은 아무 감흥도 없다.
‘오늘은 퀘스트가 초기화되는 날이다. 좋은 퀘스트가 나왔나?’
[앤더슨 가의 비밀
여기 앤더슨 가족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딸, 아들. 애완견.
이들 일곱 가족은 모두 제각각의 비밀과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앤더슨 가의 친절한 이웃으로써 앤더슨 가의 고민을 해결해 주십시오. 앤더슨 가족들은 매우 고마워할 것입니다.
퀘스트 성공 조건: 엔더슨 가족의 고민 해결.
퀘스트 성공 보상: 비밀 카드.]
‘앤더슨 가의 비밀’은 미국 시트콤이었다. 그것도 20년 전쯤에 방영한 시트콤이다. 썩 재밌지는 않았다. 인터넷 평가도 별로 안 좋았고.
‘어머니랑 딸 역할을 맡은 배우가 예뻤지.’
그걸 제외하면 기억에 남는 건 별로 없었다.
‘아들 놈의 비밀이 게이였던가?’
이 퀘스트를 선택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퀘스트 보상인 비밀 카드는 일회성 물건으로 사용하면 대상의 가장 큰 비밀을 알려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보상은 탐나지만… 게이 새끼랑 마주치기는 싫어.’
두 번째 퀘스트를 확인한다.
[30일간의 면벽수련
벽을 보고 수련하십시오.
모든 욕망을 버리고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으십시오.
자기 관조.
더 강해지기 위한 필수 과정입니다.
퀘스트 성공 조건: 30일간의 면벽수련.
퀘스트 성공 보상: 모든 능력치 5 증가.]
“쯧.”
보자마자 혀를 찼다.
면벽수련이 뭔지 나도 안다. 동굴 같은 곳에 박혀 벽만 보는 수련이 아닌가.
‘미친 짓이지.’
보상은 나쁘지 않다. 모든 능력치 5 상승.
능력치 110부터 1 올리려면 600 포인트가 필요하고, 120부터는 무려 1,000 포인트가 필요하다.
지금 나는 120대 능력치가 3개, 110대 능력치가 3개다.
그러니 모든 능력치 +5는 총 24,000 포인트의 이득이라 할 수 있다.
‘내가 24,000 포인트 때문에 30일 동안 면벽수련을 한다고? 아주 개좆같은 소리군. 이건 30일 동안 섹스를 하지 말라는 거나 똑같잖아. 차라리 다른 유희 세계에 들어가서 진행하는 게 훨씬 낫지, 면벽수련은 절대 안 한다.’
[좋은 뱀파이어는 없다.
뱀파이어는 세계의 골칫거리입니다.
인간보다 뛰어난 신체 능력, 인간만큼 교활한 지능, 인간 이상의 수명.
지구 최고의 포식자인 그들은 인간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인간은 음식일 뿐이니까요.
여기 한 글로벌 기업이 있습니다.
BC라 불리는 UN의 산하기관입니다. 어느 국가에서든 공무원 취급을 받는 그들은 세계의 골칫거리를 해결해주는 화끈한 해결사들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뱀파이어 사냥꾼이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회사로서 운영되고 있죠.
당신은 Blood Chaser 회사에 입사를 희망하는 건실한 청년입니다. BC 회사에 입사하여 뱀파이어 로드의 무시무시한 음모를 저지하십시오!
퀘스트 성공 조건: 뱀파이어 로드의 음모 저지.
퀘스트 성공 보상: 블러드 컴파스
※페널티가 존재합니다.
※도우미 설정이 가능합니다.]
‘이건 웹툰이군.’
뱀파이어 사냥꾼이 주인공인 웹툰이었다. 인기는 그다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으음. 재미는 있을 것 같네. 보상은 뭐지?’
[블러드 컴파스
대상의 피를 나침반에 떨어뜨려 사용합니다.
블러드 컴퍼스는 피의 주인을 추적합니다.
일회용입니다.
가격: 10,000 포인트
※주의
대상이 죽으면 효과가 사라집니다.]
‘꽤 쓸만한 보상이잖아.’
당장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무언가를 추격할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 그때 이 나침반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직 얻은 게 아니라서 랜덤 뽑기 상점에서 구입할 수 없어. 나중을 위해서라도 이런 건 얻어두는 게 좋겠지.’
한 번 얻은 후에는 랜덤 뽑기 상점에서도 구입이 가능했다. 솔직히 필요성만 따지면 ‘비밀 카드’가 더 높지만.
‘근데 도우미 설정은 뭐지?’
[도우미 설정.
인연 레벨 5 이상의 캐릭터를 일시적으로 퀘스트 세계관에 소환합니다.
도우미와 유희 생활 어플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유희 생활 어플의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도우미는 퀘스트가 끝난 후, 퀘스트의 기억을 어느 날의 꿈으로 인식합니다.
세계관에 맞춰 도우미의 능력치가 조정됩니다.
유희 세계 입장 시 도우미의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재밌네.’
가장 재밌는 건 유희 생활 어플을 공유할 수도 있고, 공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다.
이런 신박한 조건이 붙으니 [좋은 뱀파이어는 없다] 퀘스트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도우미 캐릭터를 설정하는 것도 고민되네. 인연 레벨 5 이상은 꽤 많아.’
인연 레벨은 5까지 비교적 빠르게 상승한다. 그다음부터 더럽게 잘 안 오르지.
[페널티 1. 신체 능력 조정]
[이 세계관에 초인은 없습니다. 신체 능력이 조정됩니다.]
[페널티 2. 마나가 뭐임?]
[이 세계관에 마나는 없습니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페널티 3. 특수 물건 너프]
[특수 효과를 가진 물건이 대폭 너프됩니다.]
[도우미를 설정합니다.]
[설정된 캐릭터는 주서현(신의 아틀란티스)입니다.]
[주서현의 인연 레벨은 7입니다. 도우미 설정이 완료됩니다.]
[주서현은 유희 생활 어플에 대해 모릅니다.]
[주서현은 퀘스트가 끝나면 이 일을 어느 날의 꿈으로 여길 것입니다.]
[도우미 설정을 끝마쳤습니다.]
[유희를 시작합니다.]
***
나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 버스는 조용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창문 밖을 보니 제법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새벽 5시.
버스는 계속해서 달렸다.
뒤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버스에는 나를 제외하고도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전부 남자였다.
‘아직까지 뭔지 모르겠군. 스마트폰이 멀쩡한 걸로 보아선 납치당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뭐, 도착하면 알겠지. 그보다 주서현의 정보다.’
유희 세계 입장 시 도우미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걸 잊지 않았다.
[도우미 정보 확인.]
[주서현은 1년 전에 급작스럽게 이 세계에 나타났습니다.]
[주서현은 우연히 BC 회사에 스카우트되어 사원으로 입사했습니다.]
[주서현은 두각을 드러내어 빠르게 승진하여 현재 대리로서 한국 서울 지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인가. 딱 봐도 여긴 한국인 것 같으니 회사에 입사하면 주서현을 만날 수 있겠군.’
주서현이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무척 기대된다.
‘……잠깐. 주서현은 혹시 아틀란티스에 있을 때 모습 그대로 소환된 건가?’
그럼 아주 재밌는 상황일 것이다.
주서현은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계속 정조대를 착용한 상태니까.
‘크크. 본의 아니게 주서현의 보지를 1년 동안 묵혀버렸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주서현을 어떻게 골려줄까 하는 생각을 하는 동안 버스는 쉬지 않고 달렸다.
오전 7시.
목적지에 도착했다.
‘BC 한국 지부 훈련소?’
입구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얼굴을 굳혔다.
‘맞다, 원작의 시작은 훈련소부터였어. 이런 시발….’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내가 속으로 욕을 곱씹고 있을 때였다. 버스는 훈련소 연병장에 도착했다. 창문 밖을 보니 다른 버스들도 줄줄이 서 있었다.
쾅!
버스 문이 거칠게 열리고 붉은 모자와 붉은 셔츠를 입은 근육질 남자가 버스 위로 올라와 소리쳤다.
“아쎄이들! 당장 튀어나와!!!”
쩌렁쩌렁 울리는 그 목소리에 자고 있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섞여 연병장으로 나갔다.
연병장에서 교관의 지시에 따라 줄을 섰다. 대충 둘러보니 20대 초중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수는 대략 60명 정도다. 여자는 한 명도 없다.
“똑바로 서라!”
“이것도 전부 평가에 들어간다!”
“아가리 닥치고 기다려라! 조금이라도 몸이 흔들리는 놈은 바로 기열이다!”
“회사가 우스워 보이나? 훈련소를 수료하지 못하면 회사에 입사할 수 없다!”
교관들이 돌아다니며 악을 질러댔다. 나는 표정관리에 힘썼다. 인상을 찌푸리면 그걸로 또 지랄해댈 것이다.
‘원작대로라면 이 훈련소에서 평가를 매긴다. 최상위 평가를 받으려면 자동진행은 최대한 안 하는 게 좋겠지. 훈련소 3등까지는 지부 선택권을 받을 수 있으니까. 달리 말하면 3등 내에 들지 못할 경우 주서현이 있는 서울 지부로 가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한 달.
훈련소 기간인 한 달 동안 열심히 해야 한다. 무언가를 할 때는 남들보다 뛰어난 성적을 보여야 한다.
‘하, 씨발. 벌써부터 섹스 마렵다.’
여긴 군대 훈련소가 아니다. 그러나 원작에 따르면 군대 훈련소 이상으로 가혹한 것이다. 원작을 떠올리니 탈영하고 싶은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아쎄이들! 긴장 안 하지?! 엎드려!!”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