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5화 > 1685. 헌터 VS 뱀파이어
꿀꺽.
주서현이 다가오는 것을 본 나는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나를 바라보는 주서현의 눈빛은 서늘했다. 팔뚝에 닭살이 오소소 일어날 정도였다. 그녀가 가진 적의와 살의가 명백하게 느껴진다.
다행히 연기 특성 덕분에 내색하진 않았으나,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주서현이 예상 이상으로 적대적이다.’
그 성격상 막 반갑다고 방방 뛰지 않을 거라는 건 당연했다. 근데 설마 이 정도로 날 적대할 줄 몰랐다. 그녀의 적의에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면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만약, 내가 아틀란티스의 성유진이란 걸 확신한다면? 이 세계에 떨어져 1년이나 구른 이유가 나 때문이란 걸 알게 된다면?
‘안 그래도 아틀란티스에서 날 죽이려고 한 주서현이다. 지금 더 빡쳐 있는 상태일 텐데…. 전부 알게 되면 날 원망하며 죽이려 들지 않을까?’
지금 내가 주서현과 싸운다면 이길 수 있나?
훈련소에서 봤던 주서현의 전투 영상을 떠올린다. 신체 능력은 아틀란티스에 있을 때보다 떨어졌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검술만 놓고 본다면 아틀란티스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내겐 찰나가 있어. 하지만 주서현도 가속 능력자지.’
그 가속은 아틀란티스에서 얻은 능력이 아니다. 주서현 아틀란티스에 오기 전부터 헌터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 능력은 가속. 아틀란티스 당시의 주서현은 나의 [찰나]처럼 순간 가속을 사용할 수 있었다.
‘주서현을 상대로 찰나는 별 의미가 없다는 거지.’
마나가 없어 뇌전도 마음껏 쓸 수 없다. 마나 대신 활력을 소모해서 능력을 쓸 수 있긴 하나, 지금 내겐 활력도 일반인 수준이었다. 뇌전은 기껏해야 전기 충격기 수준이다.
‘생각해보자. 지금 내가 주서현과 싸운다면?’
가속 능력을 가진 주서현에겐 멀찍이 떨어져서 저격하는 게 아닌 이상 총은 별 의미 없다.
‘주서현과 순수 검술만으로 싸우라고?’
자신이 없었다. 이길 자신이.
결론은 났다.
‘모르는 척하자.’
모르는 척하다가 우위를 점했을 때 아는 척하는 거다. 조금 불안하긴 해도 연기 특성이 있으니 주서현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현성아. 현성아. 우리 현성아.”
3명 중 유일한 남자이자, 꺽다리 아저씨가 지현성을 찾았다. 지현성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깨달은 듯 음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지현성입니다.”
“특수부 1과 노계상 대리다. 너 같은 병아리를 맡는 건 3번째지. 참고로 1번째와 2번째는 1년도 못 버티고 순직했다. 부탁이니 1년은 넘기자.”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네가 내 말만 잘 들으면 순직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자, 1층에 카페가 있는데 거기 가서 파트너끼리 대화나 나누자고.”
노계상 대리는 지현성을 데리고 카페로 갔다. 나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노계상과 지현성이 파트너가 되는 건 원작 대로였으니까.
최선영은 최상우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짧은 머리에 목 부분에 손톱에 긁힌 듯한 상처가 있었다. 나는 약간 실망했다. 웹툰으로 봤던 것보다 외모가 별로였다.
“최상우 씨죠? 특수부 2과 최선영 대리입니다. 잘 부탁해요.”
“최상우입니다.”
“회사 건물 안내부터 해드리죠. 따라오세요.”
최선영이 웃으며 말했다. 얼핏 보면 굉장히 성격 좋은 상사 같지만 전투 업무에 돌입하면 성격이 바뀐다. 누가 늑대 인간 하프 아니랄까 봐 전투 때는 굉장히 거칠어진다.
최상우는 코를 긁으며 최선영의 뒤를 따라갔다. 아마 자신과 같은 늑대 인간의 피가 섞인 인간임을 알아본 것이리라.
“…….”
주서현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경계심이라기보다는 마치 생물을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다. 주서현이 무게를 잡고 서 있으니 주변의 시선도 내게 집중된다.
나는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 회사에 입사하게 된 성유진입니다. 주서현 대리님. 훈련소에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혹시 주서현 대리님께서 제 파트너가 되시는 겁니까?”
“…성유진?”
“네.”
“성유진 맞지?”
“네. 성유진입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나와 그녀는 오늘 처음 만난 것이다. 주서현은 허리춤의 검 자루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검을 뽑을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다.
‘존나 쫄리네.’
내 연기가 통한 것일까.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 자루를 쓰다듬던 손도 내린다. 나를 향한 적대감도 사라졌다.
주서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틀란티스.”
“네?”
“천공의 주인, 에이플랜 레기온, 시스템.”
“가, 갑자기 무슨 말이세요? 암호 같은 겁니까?”
나는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했다. 지금 주서현은 내가 아틀란티스에 대한 기억이 있는지 떠보는 것이다. 너무 대놓고 떠보는 점이 주서현답다고 해야 하나.
‘절대로 반응하면 안 된다.’
잠시 내 반응을 지켜보던 주서현은 이내 몸을 돌렸다.
“따라와.”
“주 대리님? 어디로 가는 겁니까?”
“사무실. 네가 해야 할 업무를 가르쳐 줄게.”
나는 냉기를 풀풀 흘리는 주서현의 뒤를 따라갔다.
내 책상은 주서현의 개인 사무실 안에 있었다. 주서현의 바로 옆자리에 내 책상과 컴퓨터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서현의 반응이 나쁘지 않아.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아는 척하는 건데. 지금이라도 아는 척하고 스킨십할까?’
직상 상사와 회사에서 오피스 섹스를….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아니한가.
주서현은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나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주서현은 대리잖아. 근데 의자가 왜 중역 의자야? 내 의자는 10만 원도 안 될 것 같은 싸구려인데! 어? 컴퓨터도 다르잖아! 주서현은 딱 봐도 최신형에 내껀… 중고인가?’
설마 주서현의 계략인가. 이런 식으로 화풀이할 줄은 몰랐다. 나는 아는 척하겠다는 생각을 수정했다. 내가 아틀란티스 때보다 약해졌고, 기억도 가지고 있다는 걸 안다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어쩌면 일부러 날 괴롭힐 수도 있었다.
값만 100만 원이 넘을 것 같은 의자에 앉은 주서현은 다리를 꼬고 분위기를 잡는다.
“앉아. 불어 볼 게 있어.”
“네.”
의자에 앉았다. 끼이이익! 안 좋은 의자일 것 같긴 했는데 심지어 중고였다.
“지금 네가 몇 살이지?”
서류에 적혀 있을 텐데도 굳이 물어본다. 그 목적이 뭔지 쉽게 짐작된다. 이 세계의 내 정보를 짐작하고 있는 나는 막힘 없이 대답했다.
“스물둘입니다.”
“난 스물다섯이야.”
“아, 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무심코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아틀란티스에서는 거침없이 내뱉으며 짜증 난 주서현의 표정을 즐겼을 테지만, 여긴 아틀란티스가 아니었다.
그 후로 주서현의 집요한 개인 질문이 이어졌다.
***
주서현은 성유진을 보자마자 확신했다. 이 성유진은 내가 알고 있는 성유진이 확실하다고. 얼굴만 봐서 그런 게 아니었다. 느껴지는 분위기가 성유진과 판박이였다. 무엇보다 자신을 보자마자 몸을 훑는 듯한 그 시선과 주위를 둘러보는 척하며 미녀를 찾는 수작은 성유진임을 확신하게 만들어줬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살의가 치솟았다.
주서현은 이 세계에 와서도 성유진은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다. 그녀의 하반신을 옥죄는 정조대가 성유진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했다. 죽이고 싶다. 검을 뽑아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성유진은 자신을 처음 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기억이 없는 그와 싸워서 이길 가치가 있는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복수를 행해도 되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놈을 상대로 한 복수의 의미가 있나?’
그 의문이 들자마자 흥분감이 팍 식어버렸다.
주서현은 성유진을 떠봤다. 아틀란티스의 이름을 언급하고 관련된 단어를 말했다. 성유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기억이 없다. 아니, 어쩌면 기억이 없는 척을 하는 걸지도 몰라.’
성유진의 더러운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녀였다. 성유진이라면 자신에게 장난을 친다는 이유로 거짓말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후에 그녀는 성유진을 사무실로 데려왔다. 일부러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성유진의 시선이 자신의 다리로 향했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간간이 자신의 가슴을 쳐다본다.
그 음흉한 시선에 주서현은 아이러니하게도 안심했다.
‘역시 성유진이야.’
여자에 미친놈다웠다.
주서현은 서류에 적힌 내용을 성유진에게 물었다. 조금이라도 대답이 이상하면 꼬투리를 잡아 추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유진의 대답은 완벽했다. 서류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이상했다.
‘그 성유진이 초등학생 시절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성유진은 실력과 별개로 좀 멍청했다.
“임진왜란이 벌어진 연도는?”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그냥. 고등학교 역사 성적이 제법 좋았던데, 이 정도는 당연히 이 정도는 알지?”
성유진은 잠깐 입을 다문 후에 다시 대답했다. 성유진에게 집중하고 있던 주서현은 이상함을 느꼈다. 잠깐이지만 성유진이 성유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1592년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시작일은?”
주서현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이번에도 성유진의 반응이 이상했던 것이다.
“……1910년 8월 29일입니다.”
“6.25 전쟁이 일어난 연도는?”
“그 정도야 쉽죠 1950년입니다.”
“다른 것도 쉬웠을 텐데?”
“무, 물론 쉬웠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주서현은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겉으로 볼 때는 그 뭔가를 확실히 알아낼 수 없다.
주서현은 더운 척 정장 자켓 단추를 풀었다. 성유진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가슴을 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저 안 보는 척하면서 보는 스킬…. 성유진이 확실한 건 맞아.’
문제는 성유진이 정말 기억을 잃었는지, 기억을 잃은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네게 특별한 물건은 없어?”
“특별한 물건이요?”
“칼이라던가, 방어구라던가… 열쇠라던가. 그런 물건들 말이야.”
“아, 지금 저한테는 없지만 집에는 있어요.”
주서현이 성유진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