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6화 > 1686. 헌터 VS 뱀파이어
“네게 특별한 물건은 없어?”
주서현이 갑자기 툭 물어왔다.
“특별한 물건이요?”
“칼이라던가, 방어구라던가… 열쇠라던가. 그런 물건들 말이야.”
뭘 말하는지 알겠다.
아틀란티스의 물건을 말하는 것이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나는 찰나를 사용하고 어떤 대답을 할지 천천히 고민했다.
그 물건들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다. 반대로 없다고 한다면? 이 세계에 있는 동안 정조대의 열쇠를 풀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안 된다. 모처럼 이 세상에서 주서현과 만났는데 떡을 못 친다니?
나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
“특별한 물건이라…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신기한 검이 있긴 합니다.”
“…신기한 검?”
주서현의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달빛을 받으면 더 날카로워지는 검이요. 중국의 한검인데…. 이게 진짜 엄청나요.”
주서현이 미간을 찌푸린다. 내가 말하는 검은 달의 짐승을 죽이고 얻은 월광 소나타7을 말한다. 주서현은 그런 검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다. 그 검의 존재를 아는 건 현시점에서 나와 옥토, 항아가 전부니까.
“아, 그리고 창고에 열쇠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열쇠?!”
그 주서현이 발작하듯 말했다. 그녀가 무슨 열쇠를 떠올리고 있을지는 뻔했다.
“네. 열쇠요. 검이랑 같이 창고에 있는 걸 본 기억이 있습니다. 어디에 쓰는 열쇠인지는 모르겠지만… 창고에 있어서 함부로 건들지 않았죠.”
“그 열쇠 작았어?”
“예, 뭐. 일반 열쇠보다는 작았습니다. 작은 자물쇠 같은 거에 들어가는 키 같더군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주서현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로선 당장 그 열쇠를 내놓으라 하고 싶겠지. 하지만 그랬다간 금품갈취가 된다. 주서현의 성격상 그런 짓을 할 리 없다.
그렇다고 자신은 정조대를 찼으니 그 열쇠가 정조대의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할 일은 더 없을 테고. 자기가 말해도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 것이다.
“…이 세상에는 특이한 검이 있어. 내가 가진 검도 그래. 검날 따로 관리할 필요 없이 흐르는 물에 씻으면 검날이 날카로운 상태로 유지되지.”
“놀랍네요. 뭐, 뱀파이어가 있는 세상이니 이상하진 않군요.”
“괜찮다면 그 검을 보러 가도 될까?”
“지금요? 지금은 좀 곤란한데요. 위치는 인천이라 서울에서 가까운 편이긴 한데…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꽤 어수선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나중에 기회 되면 보여줘. 아니, 보여줄 수 있을 때 말해. 내가 직접 찾아갈 테니.”
“아, 네. 검을 많이 좋아시는군요.”
“아무래도 검을 주무기로 사용하니까. 관심이 있는 편이지.”
“알겠습니다. 검은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근데… 업무는 뭘 하면 되나요?”
“업무…. 잠시만 기다려.”
주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무실 밖으로 떠났다. 나는 잠깐 어이가 없었다. 해야 할 업무를 알려 달랬더니 왜 사무실 밖으로 나가지?
‘화장실이 급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나는 그녀가 없는 틈을 타서 사무실을 둘러봤다.
사무실은 깨끗했다. 너무 깨끗해서 이상했다.
‘책장이 다 비어 있군. 책상 위에도 모니터밖에 없어. 개인적인 물건은 아예 없어 보이고. 서랍에 넣어뒀나?’
천장 구석에 있는 카메라가 눈에 들어온다. 함부로 서랍을 열다가 스파이로 몰릴 수도 있었다.
5분 정도 지나 주서현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에 총과 검을 들고 있었다.
“네가 사용할 총기와 검이야. 추가로 필요한 장비가 있으면 회사에 부탁하던가, 개인적으로 구매해.”
“근데 검이요? 전 나이프가 기본 장비일 줄 알았습니다만.”
“기본 장비는 나이프야. 내가 검을 달라고 했지. 넌 검도를 수련했잖아.”
“나이프 보다는 검이 더 편하긴 하죠. 감사합니다. 근데 업무는….”
“너와 난 현장을 돌아다닐 테니 사무실에서 처리할 업무는 거의 없어. 기껏해야 가끔 사무실로 들려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뿐이지. 마침 너도 써야 할 보고서가 있으니, 그걸로 보고서를 쓰는 방법을 가르쳐줄게.”
“써야 하는 보고서요?”
“아까 도로에서 뱀파이어를 죽이고 경찰서에 갔다고 들었어.”
“아.”
“뱀파이어를 상대할 땐 과장에게 문자라도 보내고 하는 편이 좋으니 알아둬.”
주서현은 컴퓨터 전원을 켜며 보고서를 작성하는 법을 내게 알려주었다. 그녀의 답답한 마우스 컨트롤과 느린 타자 속도를 보니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겠다.
‘보고서. 존나 대충 쓰는데? 이래도 되나?’
주서현은 30분에 걸쳐 보고서 작성법을 가르쳐줬지만, 나는 대충 해도 5분이면 보고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됐어. 이걸 구형진 과장에게 보내면 돼.”
보고서 전송법까지 가르쳐준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다른 업무는 안 합니까?”
“말했잖아. 우린 현장 요원이야. 현장 일이 있을 때까지 대기.”
“일은 언제 시작합니까?”
“일이 생기면 업무가 떨어질 거야.”
“그럼… 그때까지 뭐합니까?”
“글쎄. 게임이라도 하던가.”
주서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숨을 쉴 뿐이다.
‘그 주서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낸다고? 그럴 리가.’
시간이 날 때마다 검술 수련을 하던 그녀였다. 지금도 분명 머릿속으로 검술 수련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름 바 명상이다.
나는 주서현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게임을 켰다. 그녀처럼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심심했다. 게임을 하다 보니 재밌어서 몰입하게 됐다.
‘회사에서 하는 게임이라 그런가? 평소에 할 때보다 더 재밌네!’
나는 지금 돈 벌면서 게임하고 있었다.
간간이 주서현의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무시하고 게임에 집중했다.
‘다행히 처음과 달리 날 마구잡이로 적대하는 건 아닌 것 같네.’
끔찍한 직장 생활을 보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내가 아틀란티스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
오후 1시쯤에 주서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점심 먹으러 가자.”
“네, 대리님.”
“…….”
사무실 밖으로 향하던 그녀가 우뚝 멈춰 섰다.
“대리님?”
“주서현 대리님이라고 불러. 이 회사에 대리가 나 혼자만 있는 줄 알아?”
“주 대리님이라 부르면 안 되겠습니까? 그게 편할 것 같아서요.”
“너 편하려고 회사에 들어왔어? 회사 생활이 우스워?”
“……죄송합니다. 주서현 대리님.”
“앞으로 잘해.”
주서현이 사무실을 나선다. 나는 뒤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년이 평소에는 분한 표정만 짓는 주제에.’
자지가 간지러웠다.
지금 당장 스마트폰을 꺼내 내 자지에 박혀 헐떡이는 주서현 영상을 본인에게 보여주며 능욕하고 싶었다. 덤으로 저 발칙한 엉덩이도 손바닥으로 때려주고.
‘참자. 지금 주서현이랑 싸우면 내가 진다.’
주서현의 뒤를 따라 걷는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주서현의 엉덩이로 갔다.
‘몸매가 좋아서 정장도 잘 어울리는군. 저 바지 아래에는 정조대를 차고 있겠지?’
본의 아니게 1년 동안 숙성된 보지다. 지금 이 보지를 따먹으면 맛이 얼마나 좋을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정신 차리자. 일단 주서현과 친해지자.’
나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회사가 엄청 넓네요. 아까 보니 최소 15층은 되는 것 같습니다. 주서현 대리님. 시간이 되시면 회사 구경 좀 시켜주실 수 있으신가요?”
“글쎄. 나도 몰라. 1층에 카페나 편의점이 있고, 2층에 식당. 3층에는 사격장, 5층에 특수부가 있어. 이것만 알아둬도 돼.”
말이 끊겼다.
주서현은 기본적으로 과묵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주서현은 시선을 끌었다.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호의와 존경이 가득한 시선이다. 그리고 남자들은 나를 부러운 듯이 쳐다본다.
‘지현성의 말에 의하면 주서현이 여신이란 말까지 듣는다지?’
마음 같아선 주서현의 어깨를 만지며 그녀를 놀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랬다간 기억이 있다는 걸 들키고 만다.
띵!
2층에 도착했다. 넓은 식당이었으나, 사람들은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나와 그녀는 준비된 식판을 받아 식탁에 앉았다. 직원들의 시선이 끌린다.
“주서현 대리님이잖아. 늘 혼자서 밥 먹더니 오늘은 다른 사람이랑 같이 먹네?”
“누구야? 내가 저번에 같이 밥 먹자고 할 때는 거절하시던데.”
“아까 본 신입이네. 주서현 대리님 파트너.”
“주서현 대리님이랑 파트너라니…. 운도 좋은 놈이네.”
“주 대리가 직접 선택했다던 말이 있던데. 사실이야?”
“부장님이 모르면 누가 압니까? 특수부 부장에게서 들은 것 없어요?”
“그년이랑은 안 친해. 그년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주변이 시끄러워도 주서현은 개의치 않았다. 나는 그녀 맞은 편에 앉았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그래.”
나는 우선 식판 위에 놓인 요리들부터 스캔했다. 전통적인 한식이다. 너비아니가 있고 갈치 조림도 있다. 미역국에는 소고기가 두둥실 떠다닌다. 꽤 푸짐한 것으로 보아 식단에 예산을 제법 쓰는 모양이다.
먼저 국부터 삼키코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미역국에서 싸구려 맛이 나는군. 조미료를 많이 썼어. 게다가 고기는 투뿔이 아니잖아.’
불합격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요리에 대한 기대감도 떨어졌다.
밥을 먹으려는데 주서현의 시선이 따갑다.
“……주서현 대리님. 왜 그러십니까?”
“국이 맛없나 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미역국이 맛있다고 하던데.”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씨발. 실수했다!’
주서현은 내 입맛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내 연기를 간파했을지도 모른다.
‘무작정 부정하면 안 돼. 이럴 때는….’
머리를 굴린 뒤에 입을 열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입맛이 고급스러웠습니다. 평범한 음식들도 잘 안 먹어서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고생하셨지요. 이 음식들도 못 먹을 정도는 아닙니다. 제 입맛에는 안 맞지만요.”
“그래?”
죽은 어머니를 들먹이며 변명하기!
짧게 대답한 주서현은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변명이 통한 듯해서 다행이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주 대리. 파트너를 받았다며? 이거 섭섭한걸. 내가 그렇게나 함께 하자고 했을 때는 들은 체도 안 하더니 말이야.”
한 남자가 나타났다.
키도 크고 슈트핏도 잘 받는 남자였다. 얼굴에서 몸매까지 완벽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남자는 훈남 포스를 흩뿌리며 우리 근처로 다가왔다.
놈은 인사를 하면서도 은근슬쩍 나를 훑어본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피식 웃는다.
“이 신입이 주 대리의 파트너가 될 자격이 있을까? 난 아니라고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