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7화 > 1687. 헌터 VS 뱀파이어
“이 신입이 주 대리의 파트너가 될 자격이 있을까? 난 아니라고 봐.”
갑자기 나타난 놈이 시비를 걸었다.
발끈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주서현이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에겐 전혀 관심 없어 보였다.
‘설마 이것도 주서현의 계략인가? 내 반응이 어떤지 보기 위해?’
그게 진짜라면 주서현은 지난 1년 동안 무서운 년으로 변한 것 같았다. 나는 일단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혔다. 주서현의 계략을 간파했음에도 당해줄 이유는 없었다.
‘이럴 땐 신입 사원은… 어리바리 타겠지.’
당황한 척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남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진다. 날 향한 조소였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잠깐. 원작 웹툰에서 본놈 같은데….’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도 남자는 주서현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주 대리. 아직 늦지 않았어. 인사과에 가서 파트너는 필요 없다고 말해. 다른 사람이라면 어림도 없지만, 주 대리라면 들어줄 거야. 아니면 내가 대신 인사과에 전달해 줄까?”
주서현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곽 과장님. 전에도 말했듯이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곽 과장.
그 이름을 듣자 놈에 대해 떠올렸다.
이름은 곽수혁. 정보부 3과의 과장이다. 재벌가 출신으로 뒷배도 좋고 돈도 많은 놈이었다.
원작에서는 재수 없는 놈으로 표현되긴 해도 악역은 아니었다.
“이거 무척 섭섭한걸. 우린 같이 밥도 먹은 사이잖아. 이 정도는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
“전체 회식 때 말씀이군요. 곽 과장님은 제 직속 상사도 아닐뿐더러, 성 사원은 제가 선택한 파트너입니다.”
곽수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이야. 네 파트너로 왜 쌩 신입을 넣는 거야? 구 과장님의 명령이야?”
“말했듯이 제가 선택했습니다.”
“왜? 제발 부탁이니 그 이유 좀 알려줘. 저 신입이 나보다 더 잘난 이유를 말이야.”
“간단합니다. 성 사원에게는 예거가 될 재능이 있습니다.”
곽수혁이 차가운 눈으로 날 노려본다. 입을 턴 건 주서현인데 가만히 있는 날 왜 노려보는 건가. 나는 밥을 깨작거리며 그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냈다.
“…예거가 될 재능이라면 내게도 있다고 생각해. 혹시 정보부라고 무시하는 거야?”
회사에는 네 가지 부서가 있었다. 전투부, 정보부, 지원부, 특수부.
전투부는 특수부와 비슷하다. 뱀파이어와 전투를 치룬다. 다만, 전투부는 대규모 전면전이 많고, 특수부는 소수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전투부가 군대 느낌이라면, 특수부는 특수 요원 느낌이다.
정보부는 그 이름답게 정보를 다룬다. 주로 숨어 있는 뱀파이어를 찾아내는 것이 그들의 업무다.
지원부는 직원들을 지원한다. 직원들에게 기본 장비를 제공하고, 직원들이 원하는 장비를 할인된 금액으로 구해주거나, 뱀파이어의 시체를 회수한다.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만, 곽 과장님이 예거가 되기엔 기예가 부족합니다.”
역시 주서현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대쪽 같이 자기 할 말은 한다.
“저 신입은 기예를 가지고 있고?”
“잠재력은 있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본 사이 아니었나?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야?”
“성 사원과 저는 이 세계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다면 처음 만난 거지. 이 세계에서는 또 뭐야.”
곽수혁이 불퉁스럽게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서현은 내가 수저를 놓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식판에는 음식이 절반 이상 남아 있었다.
“주서현 대리님. 많이 남기셨네요. 어디 아프십니까?”
“…입맛이 없을 뿐이야. 애초에 많이 먹는 편도 아니고.”
나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상사가 일어나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으니.
“주 대리.”
곽수혁이 주서현의 어깨에 손을 뻗는다. 물론 가만히 있을 주서현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볍게 옆으로 그의 손을 피했다.
“…내 손이 더럽나? 아까 씻고 왔다만….”
“죄송합니다. 타인이 제 몸에 접촉하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요.”
“미안. 사과는 내가 해야지. 여성의 몸을 함부로 만지는 건 무례한 행동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급해져서 말이야.”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퇴근 후에 같이 식사 한번 하지 않을래? 근처에 좋은 식당이 생겼거든.”
“죄송합니다.”
“…오늘이 안 되면 다음에도….”
“죄송합니다. 가자, 성유진.”
“네. 주서현 대리님.”
주서현은 망설임 없이 떠난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망연자실 서 있는 곽수혁을 쳐다봤다. 곽수혁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곽수혁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성유진이라고 했나? 버릇이 없네. 사회생활은 처음이야?”
“사회생활은 처음입니다만, 전 타부서 상사의 눈치를 제가 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군대에서도 중대가 다르면 계급이 높아도 모르는 아저씨 취급이죠. 근데 정보부는 뱀파이어랑 직접 싸우는 부서가 아니라서 편하다던데. 완전 꿀부서겠네요.”
“뭐?! 너 지금 말 다했….”
곽수혁을 반발을 무시하고 주서현을 따라 식당 밖으로 나갔다.
내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지겠지만, 별 관심 없었다.
‘내가 직장 생활 잘해서 승진하려고 입사한 것도 아니고.’
내 목적은 이 세계의 주서현을 따먹는 것과 뱀파이어 로드의 음모를 분쇄하는 거다.
***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주서현은 아까처럼 의자에 앉아 눈을 감으며 명상했고, 나는 그 옆에서 게임을 했다.
“주서현 대리님.”
“…왜?”
“게임을 하려니 렉이 걸려서 그런데… 주서현 대리님 컴퓨터 좀 사용하면 안 되겠습니까?”
“…….”
주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켜섰다. 설마 의자까지 비켜줄 줄은 몰랐다. 나는 냉큼 그녀의 의자에 앉았다. 푹신하다. 그리고 의자에 남은 그녀의 온기가 느껴진다. 주서현은 나를 힐끔 보더니 내 의자에 앉아서 다시 눈을 감았다.
‘시발. 컴퓨터 성능 봐라. 존나 빠르네.’
그래픽 카드도 최신형에 가까웠다. 보고서만 작성하는 사무용 컴퓨터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오버 스펙이다. 영상 편집이나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근데 내 컴퓨터는 왜 저따위야.’
나는 이 세계에만 있는 게임을 위주로 플레이했다. 게임 순위를 훑어보니 뱀파이어가 돼서 인간을 학살하는 게임이 10위권 내에 위치해 있었다.
‘이거나 한 번 해볼까.’
게임에 빠져 있으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삐빅!
사내 네트워크로 메일이 찾아왔다.
“주서현 대리님. 메일 왔습니다.”
메일을 확인하고 싶어도 락이 걸려있었다. 주서현은 눈을 뜨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주서현의 아찔한 향기가 났다.
‘샴푸를 바꿨나. 아틀란티스에서 쓰던 게 없을 테니 당연한가.’
그러나 어딘가 익숙하다. 그건 아먀 주서현의 체향일 것이다. 주서현이 상체를 숙여 내 앞으로 훅 들어온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아래로 향하며 묵직함이 느껴진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지가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아는 맛이 두렵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이년, 아까 식당에 있을 때는 철저하게 굴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무방비해. 혹시 날 유혹하는 건가?’
모니터를 보는 주서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툭툭 때리는 독수리 타법이었다.
곧 메일이 열린다.
상부에서 내려온 정식 명령서였다.
“뱀파이어 사냥 업무야. 오늘 밤 11시.”
“원래 밤에 합니까? 낮에 하는 편이 더 낫지 않나요?”
코팅액을 바른다고 해도 햇빛에 완전히 면역되는 건 아니다. 태양이 뜬 낮에는 뱀파이어의 신체 능력이 떨어진다.
“이런 경우는 밤에만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녀석이야. 거처를 모르니 어쩔 수 없이 밤에 상대하는 거지.”
“…처리해야 할 뱀파이어가 셋이네요.”
“적당해. 슬레이브가 둘, 커먼이 하나니까. 나갈 준비해.”
“옙.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요?”
“먹고 가도 상관없어.”
“나가서 먹죠. 설렁탕이 땡기는 데 어때요?”
“그래.”
컴퓨터를 종료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주서현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 눈치챘다.
“…왜 그러십니까? 제가 뭐 실수라도…?”
“실전은 처음일 텐데 익숙해 보여서 말이야.”
아뿔싸!
지금 나는 업무를 경험하지 못한 신입 사원이란 걸 잊었다. 나는 찰나를 사용해 시간을 느리게 만들고 머리를 굴렸다.
“…엄밀히 말하면 첫 실전은 아닙니다. 회사로 오기 전 도로에서 뱀파이어를 하나 잡았고, 훈련소를 습격한 뱀파이어들을 저격했죠. 제가 신입이긴 한데 경력 있는 신입이랄까…?”
“내가 본 신입들은 10번 정도 업무를 수행하기 전까지는 덜덜 떨고 구역질하고 난리던데… 넌 아니네.”
“하, 하하. 제가 어렸을 때부터 강심장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근데 사실 지금 저도 떨고 있습니다. 주서현 대리님을 믿고 있어서 표가 안 날 뿐이지요.”
“…나를 믿는다고?”
“네. 주서현 대리님의 명성이야 이미 누구나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제 소중한 파트너이자 상사님이시고.”
“파트너이자 상사라….”
주서현이 몸을 획 돌렸다.
기분 탓일까. 몸을 돌리기 전에 그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는 것 같았다.
“가자. 운전은 할 줄 알지?”
“당연하죠. 면허증은 1년 전에 땄습니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근데 어떤 차입니까?”
“페라리. 모델은 잘 몰라. 회사에서 타고 다니라고 줬어.”
회사에서 페라리도 주는 건가. 회사 복지가 미쳐 날뛰고 있는 느낌이다. 나도 주서현처럼 대리를 달면 페라리를 지원받을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지.’
주서현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주서현을 붙잡으려 하는 것이다. 예거인 주서현이라면 굳이 회사가 아니더라도 민간 기업 쪽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
‘더 최악인 경우는 주서현이 뱀파이어가 되었을 때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주서현이 확 돌아서 뱀파이어가 된다면?
그건 회사를 넘어서 인류 차원의 재앙이 될 것이다.
‘실제로 뱀파이어 로드 중 하나가 예거 출신으로 능력이 뛰어나 회사가 잘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지.’
뭐, 쓸데없는 걱정이다. 주서현이 인간을 포기할 리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