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0화 > 1690. 헌터 VS 뱀파이어
“성유진!!”
주서현이 다급히 성유진의 뒤를 쫓아가려고 할 때였다. 뱀파이어 넷이 나타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도살자…!”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은 뱀파이어들은 막상 주서현을 앞에 두고 주춤거렸다. 도살자 주서현의 악명을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자자했다. 10명이 넘는 뱀파이어가 주서현을 죽이기 위해 습격했으나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모르는 뱀파이어가 없을 정도다.
“물러나지 마라! 저년은 혼자라고! 저년을 죽이지 못하면 우리가 야나 님에게 죽는다! 야나 님의 잔혹함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차라리 저년에게 죽는 게 더 나을 거다!”
“젠장! 난 이러려고 뱀파이어가 된 게 아니라고!”
“지금 와서 소리쳐봤자 늦었다! 한 번에 달려들어!”
뱀파이어 네 명이 동시에 달려든다.
주서현은 이를 악물고 그들에게 뛰어갔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무리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호흡을 가다듬고 적의 공격을 카운터 쳤을 것이다. 피지컬을 앞세워 전투하는 뱀파이어에겐 그게 가장 효율적이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는 조급했다.
‘지금 성유진은 아틀란티스의 성유진이 아니야!’
조급함을 느끼더라도 그녀의 몸에 새겨진 전투 기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두 발은 완벽하게 보법을 밟으며 뱀파이어들에게 접근하고, 그녀의 손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는다. 검집에서 미끄러지듯 나온 검은 바람보다 빠르게 가장 앞에 있는 뱀파이어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다른 뱀파이어의 손이 주서현의 오른쪽 팔뚝을 노린다. 뱀파이어의 손에 붙잡히는 순간 팔뚝은 으스러질 것이다.
‘순간 가속.’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능력을 사용했다. 성유진의 찰나를 보고 발전시킨 능력이다. 그녀의 시간이 빨라진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세상의 시간이 느려졌다.
주서현은 빠르게 판단을 내려야 했다. 성유진과 달리 그녀가 이 가속 세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3초도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에 최적의 검로를 찾는다.
검날이 빛났다. 검광은 주서현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원에 닿은 뱀파이어들의 팔이 잘리고 몸에 검상을 새긴다. 뱀파이어의 피가 튀며 주서현의 정장을 더럽혔다.
뱀파이어들은 모두 처리한 그녀가 창문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땅을 끄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무언가가 움직인다.
주서현이 검을 휘둘렀다. 바닥을 기어 오던 팔이 위로 솟구쳤다. 뱀파이어의 팔이었다. 주서현은 혀를 찼다. 실수였다. 너무 급해서 뱀파이어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녀는 뱀파이어를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뱀파이어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최고의 기습이 실패했다. 그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도, 도살자! 네 파트너의 생사가 궁금하지 않나?!”
주서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한층 차가워졌다. 조급함에 생각이 짧아졌던 머리가 냉정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야나라면 알고 있어. 그 여자라면 성유진을 바로 죽이지 않겠지. 애초에 성유진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잡아갈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야, 야나 님의 목적은 파트너가 아니라 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악연이 있으니까.”
“살려다오! 야나 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겠다!”
“거짓말 하지마. 넌 야나가 있는 곳을 모르잖아.”
주서현이 확신에 찬 표정을 짓는다. 뱀파이어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알았다.
“…어떻게 그리 잘 아는 거지?”
“말했잖아. 악연이 있다고.”
주서현의 검이 뱀파이어의 목을 잘랐다.
주서현은 창문 밖을 바라봤다. 성유진을 납치한 놈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바닥을 본다. 발자국 같은 것도 안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사라진 뱀파이어를 쫓는 재주는 없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섣부르게 회사에 연락해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야나의 성격상 회사에서 추가 지원이 오는 순간 성유진을 죽여버릴 것이다.
‘야나의 목적이 나라면 연락이 올 거야. 이 상황은 러시아에 있었던 사건과 비슷하니까.’
삐리리리리리리리!
뱀파이어 시체 중 하나에서 휴대폰 소리가 울렸다. 주서현은 뱀파이어 시체의 옷을 뒤적여 휴대폰을 들었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의 기종인 폴더폰이다. 대포폰이 확실했다.
“…….”
주서현이 휴대폰을 열고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에서 여자의 웃는 소리가 들린다.
-오랜만이야, 도살자.
“어디 있어?”
-시끄럽게 굴지 말고 내 말 들어.
“…….”
주서현은 입을 다물었다.
야나.
러시아에서 온 노블급 뱀파이어. 그녀에 대한 악명은 회사 내에서 대단했다. 러시아에 있을 때 예거의 자식을 납치해서 인질로 잡아 예거와 아이들을 죽여버린 잔혹한 여자다. 섣불리 자극하지 않는 게 좋다.
-지금 넌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네게 팔이 잘린 내 얼굴 같을까? 지금 네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쉽네.
과거 주서현은 야나를 죽이지 못하고 놓쳤었다.
“…….”
-도살자. 넌 내가 본 년들 중에 가장 짜증 나는 년이었어. 너무 완벽했거든. 아름답고, 강하고, 가족이나 친구도 없어서 완전무결했지. 그런데, 어머 세상에. 파트너가 생겼네? 그것도 네가 직접 선택한 파트너? 멀리서 찍힌 너와 네 파트너의 사진을 보고 딱 알았지. 너희 둘, 연인 관계지?
“헛짚었어. 그놈이랑 난 그런 관계가 아니야.”
-그럼 무슨 관계인데?
“……원수. 그놈은 원수야. 내가 직접, 내 손으로 죽여야 할 원수.”
그러니 야나의 손에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성유진은 자신의 손에 죽어야 했다.
-응? 아하하하하! 그딴 거짓말이 내게 통할 것 같아? 이 망할년아! 날 속이고 싶으면 네 떨리는 목소리부터 숨기고 말해! 연기도 더럽게 못 하네. 넌 검 휘두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지? 도살자년답네.
“…….”
야나는 주서현을 한참이나 욕했다.
주서현은 야나의 욕을 묵묵히 들었다. 야나는 자신을 욕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주서현이 움직이려하면 야나는 귀신같이 말했다.
-거기서 움직이지 마.
그렇게 5분 정도 지났을까.
야나의 욕이 드디어 끝났다.
-왔네, 네 남자. 이런 스타일을 좋아했구나? 생각보다 별로네. 이 남자의 어디가 좋은 거야?
“말했을 텐데. 그놈은 내 원수라고.”
-아, 네네.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자, 네 남자의 목소리야.
-끄아아악!
성유진의 비명이 울렸다. 주서현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올렸다.
-미안. 손가락이 부러졌네. 인간의 몸은 너무 약하다니까.
“…….”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더라. 설마 그 말 때문에 원수니 뭐니 지껄이는 건 아니겠지? 으음. 내가 대신 네 원수를 갚아 줄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 그놈은 내 손에 죽어야 하니까.”
-목소리에 힘 빼. 살기가 전화 너머로 전해지네. 아, 날 향한 살기야? 아니면 원수를 향한 살기야?
“…….”
-대답 안 해? 뭐, 됐어. 직접 만나자. 회사에 연락하지 말고 문자에 적힌 곳으로 와. 쓸데없는 짓을 하거나, 약속 시간보다 늦으면 네 남자는 죽는 거야.
뚝.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10초도 지나지 않아 문자 메시지가 왔다. 시간과 호텔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급 호텔?’
뱀파이어들이 일을 벌이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주서현은 의문을 뒤로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천천히 생각하기에는 시간이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다.
주서현의 차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 새로운 시간과 장소가 적힌 메시지가 왔다.
추적자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놈들은 주서현은 뺑뺑이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서현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
바닥에 쓰러진 나는 몸을 꿈틀거렸다.
‘시발. 방심했다. 설마 이 내가 납치당할 줄이야. 총이 아니라 검을 들고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후회는 아무리 해도 늦는 법이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낡은 창고였다. 한쪽에 쓰레기가 가득했고 벽면에는 녹이 슬었다. 밤바람 사이로 바닷냄새가 은근히 풍겨온다.
‘아까 잡혀 오면서 봤지. 자세히 어딘지는 몰라도 인적이 드문 창고였어. 어디 바다인지는 모르겠지만… 날 잡아 온 놈이 존나 빠른 놈이었지.’
날 납치한 뱀파이어 놈은 창고에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뻗어서 잠들었다. 땀을 잔뜩 흘리고 있는 걸 보아 어지간히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쇠사슬에 팔과 상체가 묶였다. 왼손은 엄지를 제외한 4개의 손가락이 부러졌다. 다리는 움직일 수 있었으나, 움직이는 순간 뱀파이어들의 시선을 끌 것이다.
‘뱀파이어만 63명이다.’
슬레이브 급이 40명. 커먼 급은 22명. 노블급이 1명이다.
창고 중심, 의자에 앉아 있는 백금발의 백인 미녀. 그녀가 바로 노블급 뱀파이어 야나였다.
‘원작에 나오는 년이지.’
원작에선 지현성의 가족을 납치했었다. 저 여자가 지껄이는 걸 듣자 하니 주서현과는 성가신 악연을 쌓은 모양이다.
‘야나. 겉모습은 거유 백금발 미녀지만… 진짜 모습을 알지.’
진짜 모습을 알기에 꼴리지 않는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모든 뱀파이어의 진체는 기본적으로 추했다.
‘날 인질로 삼아 주서현을 죽일 생각이겠지.’
60명이 넘는 뱀파이어.
아무리 주서현이라도 이 정도 숫자의 뱀파이어를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시발. 내가 붙잡힌 공주라니. 그딴 암 걸리는 전개… 절대 못 참지.’
게다가 저년은 내 손가락을 부러뜨렸다. 미녀가 내 손가락을 부러뜨렸다면 한 번쯤은 용서해주겠지만, 괴물년이 감히 내 손가락을 부러뜨려?
‘죽인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절그럭.
쇠사슬 소리가 창고를 가득 채웠다. 뱀파이어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뭐야? 할 말이라도 있어?”
야나의 목소리에는 조소가 섞여 있었다.
“씨발년! 니들은 오늘 다 뒈졌다. 사람 잘못 건드렸다는 걸 똑똑히 알려주마.”
“하. 이건 또 맛이 간 새끼였네. 안 되겠어. 얘들아. 저놈 다리 하나 뽑아. 그럼 좀 얌전….”
[천심(天心)을 발동합니다. 1분 동안 지속됩니다.]
내 몸을 구속하던 사슬이 스르륵 아래로 떨어진다. 그야말로 마법 같은, 비현실적인 광경에 야나를 포함한 뱀파이어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가장 먼저 정신 차린 건 야나였다.
“포위해서 잡아! 어떻게 사슬을 풀었는지 물어봐야겠어.”
뱀파이어들이 움직이기 전에 인벤토리에서 상자를 소환했다.
쿵!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상자가 떨어지자 뱀파이어들이 멈칫했다. 그들은 경계심과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상자를 바라봤다.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하나? 좋아. 보여줄게.”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수류탄을 비롯한 폭탄이 가득했다. 다이너마이트에서부터 시작해 c4까지. 화약이 한가득이었다.
“너희는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천마의 정신을 일깨웠다. 나는 폭탄천마가 되어 너희들을 쓸어버리겠노라.”
천마의 정신!
“천마후 아크바르!”
나는 상장 안에 있는 폭탄 천마 코트를 몸에 걸쳤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폭탄 천마 코트는 터지기만 하면 이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었다.
“나 혼자 죽지 않으리라. 날 죽이는 자, 나와 함께 지옥에 떨어지리라! 날 죽이지 않아도 너희는 죽을 것이다!!!”
“이 미친 새끼가! 자, 잡아!”
야나가 소리쳤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