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2화 > 1692. 헌터 VS 뱀파이어
나는 정장 바지를 입고 창고에서 떨어진 곳에 앉았다. 화상을 입은 왼쪽 팔뚝이 쓰라렸다.
‘잘도 타는군.’
여긴 인적이 드문 곳이다. 총성이 일어나도 찾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총과 비교도 안 되는 폭발이 일어났다. 창고 전체가 불타오르고 검은 연기가 치솟는다. 이 정도면 근처에 있는 누군가가 119에 신고했을 것이다.
‘일이 곤란해지기 전에 회사에 보고해야 한다. …신입 사원인 내가 과장에게 직접 보고하면… 한 소리 들으려나?’
보고는 주서현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회사의 특별 대우받는 주서현이니 이 정도 사고쯤은 그냥 넘어갈 것이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주서현에게 연락했다. 주서현은 거의 1초 만에 전화를 받았다.
-…….
주서현은 침묵했다. 전화를 받은 게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주서현 대리님. 접니다.”
-어디야?
“어, 그러니까 여기가….”
나는 장소를 설명하며 사정을 말했다. 주서현은 내 말을 묵묵히 듣고는 말했다.
-알았어. 뒤처리는 회사에 맡기면 돼. 다친 곳은 없다는 거지?
“왼쪽 팔뚝에 화상을 좀 입었습니다. …그리고 손가락 4개도 부러졌고요.”
-지금 갈 테니 거기 가만히 있어.
부와아아아아아아앙!
페라리가 과속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전화를 끊고 멀쩡한 손가락 4개를 바라본다.
‘이건 부러뜨려야 한다.’
주서현은 손가락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 완벽한 연기를 위해서 손가락 4개를 부러뜨려야 한다. 그것도 내가 직접 부러뜨린 티가 안 나도록 정교하게.
‘시발…. 지금의 내가 그렇게 정교하게 내 손가락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주서현은 전문가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면 바로 눈치챌 것이다.
오른손으로 왼손가락을 잡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행동을 멈췄다.
‘아가리만 잘 털면 손가락은 안 부숴도 될 것 같은데…?’
우선 바지부터 벗었다.
***
끼이이이이이익!
붉은 페라리가 불타는 창고 앞에 도착했다. 타이어에서 메케한 냄새가 났지만, 주서현은 신경도 쓰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저 멀리,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앉아 있는 인영을 발견했다. 성유진이다.
주서현은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걷는 건지, 뛰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성유진의 곁으로 다가간 그녀는 멈칫했다. 성유진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였기 때문이다. 주서현은 저도 모르게 성유진의 몸을 훑어봤다.
익숙했다. 그래서 더 짜증 났다. 주서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코를 막았다. 코를 막았는데도 성유진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성유진의 피부 감촉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랫배가 간지럽다.
‘…제길.’
자신을 범하는 성유진의 모습을 떠올린 그녀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다가, 성유진의 왼쪽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화상을 입어 빨갛게 달아오른 피부. 그걸 보는 순간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서현은 성유진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성유진.”
“어, 주서현 대리님? 엄청 빨리 오셨군요!”
성유진이 벌떡 일어났다. 성유진은 알몸이다. 그의 사타구니 사이에 익숙하면서도 묵직한 물건이 덜렁거린다. 주서현은 빨라지기 시작한 심장을 무시하고 입고 있던 정장 자켓을 성유진에게 던졌다.
“꼴이 그게 뭐냐. 이걸로 하반신이라도 가려.”
“아, 네. 감사합니다.”
“병원에 데려다 줄 테니 차로 가자.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듣겠어.”
주서현의 눈이 성유진의 손을 훑었다. 야나는 손가락을 부러뜨렸다고 했다. 허나 성유진의 손가락은 양쪽 모두 멀쩡했다.
야나가 굳이 자신에게 그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주서현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근처에 뱀파이어의 기척은 없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무언가 이상했다.
주서현은 조수석에 성유진을 태우고 자초지종을 들었다.
“납치당했을 때, 아냐를 비롯한 뱀파이어 60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렇겠지. 야나는 커먼급과 슬레이브급을 잘 부리기로 유명한 네임드 뱀파이어니까.”
“그리고 폭탄이 있었습니다. 대량의 폭탄이요. 주서현 대리님을 죽이기 위해 준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주서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야나의 특성상 폭탄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폭탄을 쓸 거면 굳이 성유진을 납치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성유진은 폭발 속에서 멀쩡한 거지?
“야나. 그년에게 엄지를 제외한 왼손 손가락이 전부 부러졌습니다. 진짜 욕 나오게 아팠죠.”
“…부러졌다고? 지금은 멀쩡하잖아.”
“제가 전부 말씀드릴 테니 일단 들어주십시오.”
“…….”
“뱀파이어 놈들은 그 후에 저를 구석에 처박아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더군요. 저는 조용히 폭탄이 쌓여 있는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멍청한 뱀파이어 놈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하더군요.”
“…….”
뱀파이어의 감각은 인간 이상이다. 60명이 넘는 뱀파이어가 있었는데 그중에 성유진을 감시하는 뱀파이어가 한 명도 없었다고? 주서현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반박을 꾹 참았다.
“전 폭탄을 터트렸습니다. 인질이 되어 주서현 대리님의 발목을 잡느니, 차라리 다 같이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뱀파이어 60마리에 노블급 하나가 끼어 있으면 이득인 교환이잖아요?”
“멍청한 짓이었어. 얌전히 기다렸으면 내가 해결했을 거야.”
“아뇨. 아무리 주서현 대리님이라도 하더라도 전력이 부족해요. 주서현 대리님이 오셨다면… 아마 저랑 주서현 대리님은 같이 끝났겠죠. 야나. 그년의 성격상 쉽게 죽지도 못했을 테고요.”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폭탄을 터트렸다며. 설마 폭발이 너만 피해 갔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
성유진은 입을 뻥긋거리며 뜸을 들였다. 그는 뭔가 생각하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믿을 실지, 안 믿을 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전 한 번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했죠. 정신을 차리자마자 창고 밖으로 나갔어요. 왼팔 화상은 그때 입은 겁니다. 알몸인 것도 다시 정신을 차리니 옷이 전부 없어져 있었거든요. 아마 폭발에 휘말려 날아간 거겠죠. …믿기 힘드시죠?”
“아니, 믿어.”
주서현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틀란티스의 성유진도 심각한 피해를 받았는데 한순간에 멀쩡히 회복하는 걸 봤다. 아마 그 힘이 아닐까 싶었다.
‘성유진은 아틀란티스의 성유진이 맞아. 그건 이젠 부정할 수 없어. 하지만 기억은 없다? 나는 기억이 있고, 성유진은 없다…? 말이 안 되잖아.’
성유진의 말에 느껴지는 의문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성유진을 납치한 야나는 결코 만만한 뱀파이어가 아니다. 성유진의 말처럼 어처구니없이 자기 폭탄에 당해 죽을 리 없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그것도 엄청 중요한 뭔가가…!’
그걸 밝혀내기가 쉽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했다. 평범한 병원은 아니다. 회사 전용 병원으로 대기 시간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무료다.
성유진은 약을 바르고 붕대를 찼다. 의사의 말로는 심각한 화상은 아니라고 했다.
“주서현 대리님. 아까 의사 눈빛 봤어요? 의사가 완전 절 변태로 보던데요.”
“변태잖아.”
“…농담이시죠? 순간 정색하셔서 깜짝 놀랐네. 정색하며 농담하지 마세요. 진담으로 착각할 뻔했으니까요.”
“…….”
“근데 어디로 가는 겁니까? 여긴 숙소로 가는 방향이 아닌데.”
“우리 집.”
“네?”
“회사 숙소 보다 우리 집이 더 가까워. 아니면 그 꼴로 숙소에 들어가게?”
“집에 남자 옷이 있으십니까?!”
“없어. 대신 펑퍼짐한 옷은 몇 개 있어.”
“옷 가게는… 너무 늦어서 팔지 않겠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거절하고 싶지만, 이대로 숙소에 갔다가 걸리면 조리돌림을 계속 당하겠죠. 제가 회사 생활을 잘하지 못해서 적이 좀 많거든요.”
“정보부?”
“아, 네. 특히 그쪽 부서들이 절 싫어하더라고요.”
“곽수혁 과장 때문이지? 내가 가서 이야기할게.”
“주서현 대리님이 직접요?”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 들을 거야.”
성유진은 빙긋 웃었다. 주서현이 정보부에 가서 날 위해 곽수혁에게 뭐라고 한다? 곽수혁의 일그러진 얼굴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안 그래도 곤란했는데 말해주시면 감사하죠. 아, 혹시 괜찮으면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개인 사정이긴 한데….”
“무슨 부탁?”
“제 가족을 죽인 뱀파이어가 누군지 알고 싶습니다. 저번에 정보부에게 물어봤는데 제대로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주서현 대리님이 물어보면 다르지 않을까 해서요.”
“…알았어. 물어볼게. 정보를 원하는 건… 가족의 복수야?”
“네. 반드시 복수하고 싶습니다.”
“…….”
주서현은 한순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성유진은 정말로 가족의 복수를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유진은 정말로 이 세계에 태어나 자라 온 것일까? 아틀란티스에 대한 기억은 없고? 하지만 그러면 성유진의 부활 능력은?
‘성유진의 가족은 진짜 가족인가…?’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진다.
잠시 후, 그들은 주서현의 집에 도착했다. 회사 숙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좋은 집이었다. 저택에 가까운 집이다. 겉으로 봐도 최소 100평은 되어 보이고 3층까지 있다. 덤으로 정원까지 딸린 집이다.
“…좋은 곳에 사시네요. 근처에 아무것도 없고요.”
“뱀파이어가 날 습격할 수 있으니까.”
“숙소 생활은 안 하시나요? 보안 쪽에서 회사 숙소가 더 낫다는 말은 들었는데요.”
“직원들이 불편할걸.”
성유진은 주서현이 회사 숙소에 생활하는 걸 상상해봤다. 직원들이 주서현의 눈치를 볼 것이 분명했다.
주서현은 집 앞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우고는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녀는 담담히 대문으로 걸어갔다. 지문 인식기에 손을 뻗던 그녀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멈칫했다.
“피해!”
“네?!”
갑자기 주서현이 몸을 돌리더니 성유진을 향해 뛰었다. 성유진은 주서현을 받았따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주서현의 집이 폭발했다.
성유진은 주서현의 몸을 꽉 끌어안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실패했다!”
“눈치 빠른 년!”
“닥치고 도망쳐!”
집 근처 숨어 있던 뱀파이어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망친다. 성유진은 자신의 아래에 깔려있는 주서현을 바라봤다.
숨결이 가깝다. 주서현의 냄새에 몸이 멋대로 반응한다. 자지가 발기했다. 팬티 없이 주서현의 자켓만 걸치고 있었기에 발기한 자지가 주서현의 허벅지를 찔렀다. 주서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성유진의 몸을 밀었다.
“비켜.”
“아, 네. 죄송합니다.”
성유진이 비키고 주서현이 몸을 일으켰다. 주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숨결이 뜨겁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녀는 불타는 자신의 집을 보다가 성유진에게 말했다.
“성유진. 오늘은 네 집으로 가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