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4화 > 1694. 헌터 VS 뱀파이어
“제 입을 강제로 벌리려고 하면 바로 삼킬 겁니다. 그 후에는… 똥에 섞여 나오기를 바라야겠죠. 그게 아니면 저를 죽이고 배를 가르시던가.”
성유진이 히죽 웃는다.
주서현은 미간을 좁혔다. 저 표정을 보니 지금 이 상황이 뭔가 익숙했다. 주서현이 양손에 힘을 주었다.
쿵!
성유진이 뒤로 넘어져 바닥에 쓰러지고, 주서현이 그 위에 올라탔다.
‘…어쩌지?’
지금 성유진은 주서현이 잘 알고 있는 또라이의 표정을 짓고 있다. 강제로 입을 벌리려고 하면 열쇠를 정말로 삼킬 것이다.
‘내가 성유진을 덮치기까지 했는데 지금 여기서 물러나라고?’
정조대의 열쇠는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다. 문제는 손을 닿으려고 하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냥 이대로 물러나야 하나?’
히죽 웃고 있는 성유진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짜증이 났다. 결국은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라는 저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
‘어차피 손에 넣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손을 움직여서 강제로 먹도록 만들까?
그녀의 시선이 성유진의 입술로 향했다. 순간적으로 몸 안의 모든 열기가 그녀의 머리로 모여들었다.
주서현은 이를 악물었다. 과거의 기억과 이 세계에 오고 가끔씩 꾸었던 부끄럽고 창피한 꿈들이 떠오른다.
주서현은 꿈속에서도 성유진과 싸웠다. 그리고 꿈속에서 항상 성유진에게 졌다. 패배한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성유진의 능욕뿐이었다. 그 입이 자신의 온몸을 핥고, 자신은 쾌락에 빠져 성유진의 밑에서 앙앙거린다.
치욕스러운 기억이고, 말할 수 없는 꿈이다.
정조대 열쇠만 가진다면 성유진에게 능욕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주서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잠깐.’
열기를 뱉어내듯 한숨을 내쉰 그녀는 성유진의 시선이 음흉하다는 걸 알았다. 그는 셔츠 한 장만 입은 자신의 가슴을 보고 있었다.
“너…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거지?”
“네? 갑자기 또 무슨 말입니까? 이상한 말로 정신을 쏙 빼놓을 모양인데, 그런 수법은 안 통합니다.”
주서현은 그녀의 입 안에 있는 열쇠를 확인했다. 입 안쪽에 있었다. 손을 넣어도 단숨에 빼내긴 어려웠다.
“주서현 대리님. 슬슬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
주서현은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성유진의 입에서 열쇠를 안전하게 빼낼 수 있을까?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그 방법을 썼을 때, 그가 아는 성유진이라면 절대로 열쇠를 삼키지 않을 것이다.
“주서현 대리님. 이상한 생각이 들려고 합니다. 빨리 비켜주시죠.”
성유진이 재수 없게 웃으며 말했다. 마치 너는 여기까지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역설적으로 그의 조롱 섞인 웃음이 자신의 각오를 굳히게 만들었다.
어차피 더럽혀진 몸. 더 더럽혀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밤이 늦었으니 빨리… 읍.”
주서현은 성유진이 입을 벌렸을 때 자신의 입을 맞추고 혀를 집어넣었다. 성유진의 두 눈이 커진다.
주서현은 당황한 성유진의 표정을 보고 짜릿함을 느꼈다. 항상 자신을 범했던 그를 역으로 범하고 있다. 그것은 즉 복수가 아닐까.
‘예상했던 대로….’
성유진은 열쇠를 삼키지 않았다. 혀를 움직이며 키스에 열중한다. 주서현은 성유진과 혀를 섞으며 기회를 엿봤다. 성유진의 혀가 밀려나는 그 순간을 노려 가장 안쪽에 있는 열쇠를 혀로 낚아챈다.
‘됐어…!’
머리를 들고 혀를 빼려고 한다. 하지만 성유진이 허락하지 않았다. 성유진의 양손이 그녀의 머리를 잡으며 눌렀다.
“흐우웁….”
주서현과 성유진은 혀 사이에 정조대 열쇠를 두고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열쇠의 딱딱한 감촉과 혀의 부드러우면서도 미끈한 감촉.
주서현은 점점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도 이랬다. 이상하게 그와 키스할 때면 빠르게 몸이 뜨거워진다.
‘이대로는 안 돼.’
주서현은 있는 힘을 다해 성유진의 혀를 빨아들였다. 기습적인 움직임에 성유진의 혀와 열쇠가 입안으로 들어온다.
‘됐어!’
주서현이 성유진이 어깨를 밀며 상체를 일으켰다. 정조대의 열쇠를 얻었으니 화장실이든, 어디든 가져가서 정조대를 풀면 된다.
하지만 성유진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도망가려는 그녀를 역으로 붙잡아 바닥에 쓰러뜨린다. 서로의 자세는 반대가 되었다.
“주서현 대리님이 먼저 시작한 겁니다.”
“…….”
성유진이 입을 맞춰온다. 주서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몸에 힘을 주지만, 성유진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주서현의 단련된 몸 이상으로 성유진의 몸도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윽….”
입을 계속 꾹 다물자, 성유진의 입이 아래로 턱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놀란 주서현은 입을 벌렸다. 성유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서현의 입에 혀를 넣는다.
“흐읏.”
쪼옥, 쪼옥, 쪽.
성유진이 혀를 계속 빨아댄다. 주서현은 버티다가 결국 놓치고 말았다. 성유진은 정조대 열쇠를 입에 물고 씩 웃었다.
“이 열쇠는 제겁니다. 아, 이런.”
열쇠가 주서현의 가슴골로 떨어졌다. 성유진이 웃으며 얼굴을 숙여 가슴골에 입을 맞추려는 찰나, 주서현이 성유진을 찌릿 노려봤다.
“너, 사실은 기억이 있지?”
“또 그 소립니까? 전 기억 상실증 같은 게 아니에요.”
“넌 날 알고 있어. 아틀란티스의 일도 알고 있어. 그 열쇠가 어디에 쓰는 건지도 알고 있지. 그러니까 이렇게 필사적으로 내게 열쇠가 넘기지 않고 막는 거겠지.”
“말했잖아요. 열쇠에도 신기한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런 열쇠를 남에게 넘길 순 없죠.”
“헛소리 집어치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했어. 훈련소에서는 검을 썼는데, 이후에는 검을 안 쓴다? 내 눈썰미 때문이겠지. 나는 네가 쓰는 검술을 알아볼 수 있으니까.”
“제 검술은 검도입니다.”
“야나를 비롯한 뱀파이어 60명을 혼자서 처리한 것도 그래. 폭탄이 있다고 해도 야나 패거리가 그리 쉽게 당할 리 없어. 하지만 네가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내가 아는 성유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너는 그 비열하기 짝이 없는 성격과는 별개로 전투 능력만큼은 내가 본 그 어떤 인간보다 뛰어나니까.”
“아까 일은 전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운이 꽤 따라줬습니다. 야나라는 뱀파이어는 잔뜩 방심하고 있었다니까요?”
“이 집에 왔을 때도 뭔가 어설펐어. 넌 사실 이 세계의 기억이 없는 거야. 그러니 이 집이 낯선 거고. 넌 이 세계의 성유진이 아니라, 아틀란티스의 성유진이잖아. 그 검이랑 열쇠. 아틀란티스에서 가져온 거지? 그것뿐만이 아닐 거야. 폭탄도 야나의 것이 아니라 네 거야. 넌 아틀란티스에 있을 때도 아공간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거참. 알아듣지 말을 계속하시네요. 흥이 다 식어버렸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할까요? 저도 주서현 대리님에게 실수했지만, 주서현 대리님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이번 일은 그냥 같이 실수한 걸로 하죠.”
성유진이 일어나려고 했다. 주서현은 되려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직 안 끝났어.”
“주서현 대리님. 그만하죠. 이러다가 진짜 돌이킬 수 없게 될 겁니다.”
“내 질문에 대답해. 제대로 질문에 답하면 풀어 줄 테니까.”
“…후. 네, 뭐. 해보세요.”
“네 고등학교 시절 여자친구의 이름은?”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는 겁니까? 혹시 질투…?!”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
“…….”
성유진은 입을 움찔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주서현은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묘한 희열을 느꼈다.
“그래. 대답하지 못하겠지. 모르니까. 자료에는 어렸을 때부터 네 정보가 적혀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부일 뿐이야. 잠깐 사귀었던 여자친구의 이름 같은 개인적이고 쓸데없는 정보는 빠져있거든.”
“…잠깐 기억이 안 나서 그렇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이니까요. 기억해낼 테니 잠시만 기다려줘요.”
“그럴 필요 없어. 넌 여자친구가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
성유진이 얼굴이 일그러진다. 주서현의 얼굴에 미소가 걸린다. 그녀는 성유진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다른 질문이야. 제대로 답한다면 내가 잘못 짚은 거로 인정하고 사과할게. 2002년. 대한민국에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인지 너도 알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
“2002년이면… 월드컵 때네요. 대한민국이 4강에 올랐죠. 대단한 열기였지요.”
“틀렸어. 이 세계의 월드컵은 취소됐어. 16강에서 한국에 진 이탈리아에서 뱀파이어 마피아가 테러를 일으켜서 축구 선수들이 다 죽었어.”
“……그게 말이 됩니까?”
“이 세계의 역사가 그런 걸 어쩌겠어. 그 유명한 역사를 모르는 넌… 이 세계의 성유진이 아니야. 언제까지 답답한 연기를 하고 있을 거야, 성유진.”
“…….”
성유진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한숨 쉬듯 헛웃음을 흘렸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성유진의 연기를 간파하고 얻은 승리를 기뻐하던 주서현은 긴장했다. 그녀가 간과한 게 있었다. 지금 그녀의 손에는 검이 없다. 성유진의 검은 저 멀리 떨어져 있고, 그녀의 검은 1층에 있었다.
빈손.
검술을 제외하고 신체 능력만 따지면 성유진이 더 우세하다.
“그래. 네 말대로야.”
성유진이 손을 움직여 주서현의 머리채를 잡는다. 수서현은 이를 악물었다.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솔직히 검을 든 너랑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거든. 아틀란티스에 있을 때의 힘을 대부분 잃었으니까. 나와 달리 네겐 검의 재능이 있었고 말이야. 근데 지금 너한텐 검이 없네?”
“성유진…! 죽여버리겠어!”
주서현이 온몸에 힘을 줬다. 자신의 위에 있는 성유진을 떨쳐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이야. 오랜만에 그 소리를 들으니 반갑네.”
성유진은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주서현은 반항적인 여자였다. 매번 패배하고, 매번 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성유진은 머리채를 잡고 주서현을 조련했다. 그렇게 주서현의 몸에 주인이 누군지 억지로 각인시켰다.
주서현에게 1년이 지난 지금, 그 각인된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주서현은 저도 모르게 숨을 헐떡였다.
“죽여 버리겠어…! 여기서라면 널 죽여버릴 수 있어…!”
“흐음. 그래. 기회를 줄까?”
성유진이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자유로워진 주서현은 기뻐하기보다는 당혹스러웠다. 성유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성유진은 주서현에게 월광 소나타 7을 건넸다. 얼떨결에 검을 쥔 주서현은 본능적으로 검을 뽑았다.
“날 죽일 기회를 줄게. 죽여봐.”
성유진은 주서현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