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7화 > 1697. 헌터 VS 뱀파이어
“……!”
주서현은 번쩍 눈을 떴다.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른다. 성유진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은 성유진에게 범해졌다. 주서현은 몰려오는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이불이 스르륵 내려가고 풍만한 젖가슴이 출렁인다.
고개를 살짝 숙여 아래를 본 그녀는 아연실색했다. 하얀 젖가슴에 빨간 점 같은 키스 자국이 가득했다.
‘성유진에게 복수할 기회를 놓치다니…!’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무언가가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알몸의 성유진이었다. 성유진이 바로 옆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는 성유진을 보니 복수심이 치솟았다. 지금 성유진이라면 맨손으로도 쉽게 죽일 수 있다.
‘…지금 죽일 생각이었다면, 어제 죽였겠지. 지금 성유진을 죽여도 의미 없어. 내 복수는 아틀란티스에서 성유진과 싸워 이겨야 완성돼.’
짜증이 나도 이 세계에선 참는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잡고 있는 성유진의 허리를 떼어 내고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다 정조대를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와락 찌푸린다.
잠들기 전에 성유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 정조대는 네가 내 거라는 증거야.
“나는 네게 아니야. 아틀란티스에서 반드시 죽여버리겠어.”
방 밖으로 나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과 스마트폰을 주웠다. 바닥에 뿌려져 있는 액체들을 보니 격렬했던 어젯밤이 떠올랐다. 그녀는 보지가 간질대는 걸 애써 무시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시간은 오후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아틀란티스였다면 지금까지도 성유진에게 범해지고 있었을 거야.’
이 세계에 와서 그와 그녀는 신체 능력이 떨어졌다. 단련한 게 있어서 일반인보다는 강하지만, 아틀란티스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코끼리와 강아지 수준의 차이가 있다.
스마트폰을 확인한 그녀는 곧 눈살을 찌푸렸다. 배경 화면이 바뀌어 있었다. 성유진과 뺨을 맞대고 마치 연인처럼 셀카를 찍은 사진이었다. 문제는 성유진은 비릿하게 웃고 있고, 그녀는 반쯤 정신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목에 차고 있는 장미 목걸이가 유독 눈에 띈다.
‘언제 찍은 거야? 내 스마트폰 비밀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고?’
사진을 삭제하려던 찰나 쌓인 메시지와 부재중 통화를 발견했다. 대부분 회사의 것이었다. 과장과 부장의 통화도 몇 개나 쌓여 있다. 어제 많은 일이 있었다. 노블급 뱀파이어인 야나가 죽고 자신의 집도 뱀파이어에게 테러당했다. 회사가 난리를 치는 것도 당연했다.
‘회사에 가야겠어. 이 사진은 대체 왜 안 지워지는 거야?’
사진은 지우는 것을 포기한 그녀는 주머니에 들어있는 장미 목걸이를 확인했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목에 찼다. 이 목걸이가 있어야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된다.
‘성유진은 여기에 내버려 두자. 같이 회사에 가면 일만 더 커질 거야.’
집 밖으로 나가기 전 화장실에 들른 그녀는 경악했다. 목과 쇄골에 키스 마크가 찐하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대로 회사에 갔다가는….’
안 그래도 회사에서 주목받는 자신이다. 이대로 회사에 가면 이상한 소문이 돌 것이 분명했다. 평소라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성유진과 그렇고 그런 소문이 돈다면 짜증 나서 못 견딜 것이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옷을 여미었다.
옷을 너무 여미니 이상하게 보였다. 평소 그녀는 윗단추를 풀고 다녔다. 단추를 끝까지 채우면 답답했기 때문이다.
‘…회사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겠지. 그래도 키스 마크를 보이는 것보다는 나아.’
목은 어떻게 가려야 할까.
화장품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허나 화장을 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화장품이 없었다. 화장품을 구매하거나 성유진의 집에 있는 걸 찾더라도 사용할 줄 몰랐다.
‘…차에 손수건이 있을 거야. 스카프를 매는 방식으로 가리자.’
주서현은 성유진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왜 이 방으로 왔는지 모른다. 발길 가는 대로 오다 보니 이 방에 오게 됐다.
“으음…. 서현이 보지 너무 축축해….”
성유진이 잠꼬대 했다. 주서현은 얼굴을 붉히며 잠든 성유진을 노려봤다. 잠꼬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성유진…. 넌 언젠간 내가 반드시 죽여버리겠어…!”
***
주서현이 회사에 도착했다. 그녀는 회사의 분위기가 평소와 많이 다르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경비원부터 시작해서 회사원까지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뛰어다니고 있는 자들도 보였다.
바짝 긴장해 있는 경비원들은 주서현을 보자마자 달려왔다.
“주서현 대리님! 습격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한국의 미래가 사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경비원 중에는 무전기를 통해 상부에 보고하는 자들도 있었다.
“주서현 대리님이 오셨습니다! 예! 무사하신 것 같습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주서현 대리님! 특수부 부장님께서 어서 올라오시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주서현은 호들갑 떠는 그들과 달리 냉정하게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회사 직원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부분이 자신을 걱정하는 말이었다. 주서현은 그들에게 짧게 대답했다.
‘성유진의 걱정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군.’
어쩐지 짜증이 났다.
자신을 알고 있다면 당연히 그 파트너인 성유진도 알고 있을 것이다. 허나 성유진의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회사 직원들에게 실망감을 느끼며 특수부로 향했다.
주서현은 특수부의 인원이 적다는 걸 알아차렸다. 업무를 보기 위해 회사 밖으로 나갔다고 해도 평소보다 그 수가 훨씬 적었다. 남아 있는 특수부 직원들 모두가 무척 바빠 보인다.
“주 대리!”
복도를 헐레벌떡 뛰어다니던 구형진 과장이 주서현을 보며 소리쳤다. 항상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던 그는 오늘은 웬일인지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테러를 당했다는 말을 들었네! 무사해서 다행이야! 어디 다친 곳은 없나? 안 하던 스카프를 했군! 혹시 목을 다쳤나?”
“아무 문제 없습니다. 바빠 보이시는군요. 무슨 일이라도 터졌습니까?”
“아직 자세한 설명을 못 들었나 보군. 부장님께 가기 전에 짧게나마 말해주겠네. 밤사이에 뱀파이어 놈들이 회사 직원들을 습격했네. 타겟은 자네를 비롯한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네. 현재 확인된 사망자만 50명이 넘네. 이 빌어먹을 모기 새끼들이 본격적으로 회사에 이빨을 드러낸 거지. 놈들 때문에 회사는 지금 불붙은 망아지 같은 꼴이라네!”
“뭐라 할말이 없군요.”
“본래라면 자네의 위치를 추적해서 찾아야 했는데…. 일이 바쁘다 보니 미뤄졌다네. 자네가 살아 있다는 걸 믿고 있었거든. 아냐를 비롯한 뱀파이어 60마리를 죽인 자네의 파트너는 어디에 있나?”
“부상을 입어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보고는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진료 기록으로는 화상을 입었다고 하던데… 그 이후에 테러로 인해 입은 부상인가. 부상이 심각하지 않기를 바라겠네. 보고는 부장님에게 가서 말하게. 나는 해야 할 일이 더럽게 많아서 말이야.”
구형진 과장이 그녀를 지나가며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언성이 점점 높아지는 것을 보니 좋은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다.
주서현은 특수부 부장실로 갔다. 특수부 부장을 만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거의 3개월 만인가. 주서현은 특수부 부장이 조금 껄끄러웠다.
부장실에 노크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간다.
민트색 셔츠를 입은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반백의 머리카락은 땋아 올렸다. 나이는 올해 50대 중후반이지만, 날카로운 눈과 꼿꼿이 세운 허리 때문인지 늙어 보이지 않는다.
강명숙.
특수부 부장. 부장이지만 임원급 대우를 받고 있다. 듣기로는 본인 스스로 임원직을 거부했다고 한다.
주서현은 그녀가 껄끄러웠다. 큰 이유는 없다. 그저 곁에 있으면 껄끄럽다.
“우리 회사의 보물인 주 대리가 왔군. 오랜만이야. 잘 지냈나?”
“…오랜만입니다.”
“파트너를 선택했다고 들었다. 이름이 성유진이랬나? 서류를 보니 성적은 꽤 좋은 것 같더군. 근데 도살자 주서현이 성적 때문에 파트너를 선택했을 리 없을 테고…. 혹시 네 이거냐?”
강명숙이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주서현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아닙니다.”
“아닌 척하기는. 밤에 질펀하게 섹스하고 출근한 거 아니야? 네가 스카프를 한 것도 이상하군. 그 아래에 키스 마크라도 있나?”
정곡이 찔렸다. 하지만 주서현은 무표정한 얼굴을 끝까지 유지했다.
“그만하시고 일로 들어가죠. 지금 농담할 때는 아니지 않습니까. 직원들이 습격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평소처럼 같아야지. 사람은 흥분하면 가끔 멍청한 판단을 내리거든.”
강명숙이 책상으로 시선을 내렸다. 노트북 모니터를 스윽 본 그녀는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이 작정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우리 직원을 습격할 리 없지. 아마 조만간 회사도 습격당할 거다. 그 전에 서울에 있는 뱀파이어 놈들을 모조리 찾아내 죽여야 한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놈들을 내버려 두면 끝까지 기어오를 거다.”
“지금 상태에선 인원이 부족할 텐데요.”
“곧 소집령이 떨어질 거다. 지방에 있는 직웓늘도 서울로 올라오니 문제없다.”
“제가 할 업무는 무엇입니까?”
“평소처럼 뱀파이어를 도살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잠깐. 네 파트너 말이야. 예거가 될 재목인지 시험하기로 했다.”
주서현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걔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너는 입사하고 일주일 만에 예거가 되지 않았나. 그는 하루 만에 뱀파이어 60마리와 야나까지 죽였다. 말도 안 되는 공적이지. 난 그 실력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궁금해. 주 대리. 넌 안 궁금하나?”
안 궁금했다.
성유진의 실력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걱정하는 건 성유진의 실력이 아니다. 성격이다. 어젯밤의 일로 성유진은 자신의 성질을 숨기는 걸 그만둘 것이다. 그런 그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는 누군가가 자신을 평가하는 것.
성유진을 잘 알고 있기에 말릴 수밖에 없다.
“성유진의 실력은 현직 예거 이상입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시험은 생략해 주십시오.”
“미안하군. 자네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이런 건 철저하게 확인해야 하는 법이지. 그만 나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