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3화 > 1713. 헌터 VS 뱀파이어
[죽음 저항이 발동했습니다. 앞으로 15초간 죽지 않습니다.]
망했다.
완전 회복을 쓴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죽었다. 완전 회복을 사용할 수 없다. 포션으로는 안 된다. 죽음 저항이 없으면 즉사했을 상처는 최상급 포션으로 회복할 수 없다. 거기에 이 세계에선 포션의 효과도 떨어져 있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법은 세 가지다.
엘릭서, 죽은 자의 소생, 절대 황권.
이 중에서 가장 싸게 먹히는 건 엘릭서다. 1만 5천 포인트. 죽은 자의 소생은 30만 포인트. 절대 황권은 랜덤 뽑기에서 구매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근데 가성비를 따졌을 때 엘릭서도 쓰기 아까워.’
블러드 컴파스.
퀘스트 성공 보상으로 얻는 물건이었다. 가격은 1만 포인트. 추적에 최적화된 일회용 물건이다. 엘릭서와는 5,000포인트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만큼 블러드 컴퍼스가 좋은 물건인가? 그럴 리가. 엘릭서가 효과에 비해 싼 거다. 가성비가 좋다고 말할 수 있다.
‘애초에 블러드 컴파스에 큰 미련도 없었어. 도우미 시스템이 재밌어 보여서 이 퀘스트를 한 거니까.’
결론을 내렸다.
퀘스트는 포기다. 처음으로 유희 생활 어플 퀘스트를 실패한다.
좀 짜증스럽긴 해도 보상으로 걸린 게 생각보다 적어서 그렇게까지 아깝지는 않았다.
[죽음 저항의 남은 시간: 10초]
“성유진!”
주서현이 내 몸을 붙잡았다. 그녀도 정상인 상태는 아니었다. 오른팔이 부서졌다. 그냥 부서진 게 아니라 철저하게 부서졌다. 그 형태도 겨우 볼 수 있을 정도다. 피투성이의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저 두 눈에 맺힌 건 땀인가, 눈물인가.
‘눈물이겠지.’
그게 더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다. 주서현을 구하려다 이 꼴이 됐는데, 아무리 주서현이라도 날 위해 눈물이라도 흘려줘야지.
‘이참에 좀 더 감동스럽게 가볼까.’
[죽음 저항의 남은 시간: 6초]
“주서현…! 이 검은… 소나타는 네가 가져…!”
억지로 피를 토하면서 말했다.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는 데만 3초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내가 죽으면 주서현은 아마도 아틀란티스로 돌아갈 것이다. 올 때도 무기를 가지고 왔으니, 갈 때도 무기를 가지고 가지 않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주서현에게 멋진 인상을 남길 수 있다면 월광 소나타 7 정도는 소모할 수 있다.
“왜, 왜 나를 구하려고 무리한 거지?!”
“그냥….”
멋진 말을 하고 싶은데 시간은 없었다. 1초 만에 할 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성유진! 너는…!”
[죽음 저항의 남은 시간: 0초]
[사망하셨습니다.]
옛날 기억이 떠오른다.
유희 생활을 각성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유희 세계에서 사망한 적이 있다. 그때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유희가 종료되고 정산이 시작됐다.
‘뭐지?’
근데 지금은 유희가 종료되지 않았다. 나는 죽어 있는 상태였다. 고통이 없다. 어쩐지 몸이 굉장히 가볍다. 아예 질량 자체가 없는 것처럼. 그리고 앞이 보인다.
“…….”
주서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하나밖에 안 남은 손으로 내 시체를 잡고 있었다.
‘유체이탈…? 혹시 내가 귀신이 된 건가? 뱀파이어나 늑대인간, 마녀가 있는 세계니… 귀신이 있어도 이상한 건 없을지도….’
[도우미가 사망하지 않았습니다.]
[퀘스트가 계속 진행됩니다.]
[도우미의 의사를 무시하고 퀘스트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유희 생활이 이유를 알려줬다.
그래. 이 퀘스트는 보통 유희랑은 달랐다. 나는 유령 상태가 돼서 주서현을 지켜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퀘스트는… 진행하자. 주서현의 반응이 궁금하니까.’
[퀘스트를 계속 진행합니다.]
[진행 속도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주서현은 내 시체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월광 소나타 7을 손에 쥐고 일어난다.
그녀는 거리를 벌린 상태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윤서진을 노려봤다.
“…죽여버리겠어.”
“멋진 살기다, 도살자. 그런데 넌 오른손잡이가 아니었나? 왼손으로 날 죽일 수 있겠나?”
“…….”
주서현이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몸이 흔들린다. 오른팔이 진동으로 박살 나며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한순간에 팔을 잃었으니 균형을 잡기 쉽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두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살벌했다.
“널 뱀파이어로 만들 절호의 기회군.”
윤서진은 말과 달리 다리를 움직이지 않았다. 주서현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그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옆구리에서 피가 계속 나온다.
‘소나타가 가진 대마력이 독처럼 작용하고 있어.’
그 뱀파이어 로드마저 쉽게 적응하지 못할 정도로 독하다. 윤서진은 정상인 상태가 아니다. 주서현이 계속 다가가자 윤서진은 뒤로 물러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누가 봐도 내가 더 유리하다만… 그 도살자를 상대로 모든 걸 장담할 수는 없지. 나는 도박을 하지 않는다.”
“도망… 친다고?”
주서현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녀의 입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나는 확실한 순간에서만 싸운다. 그게 내가 뱀파이어 로드가 된 비결이다. 그리고 지금은 변수가 많다. 허나 서로 정상인 상태에서 정면 대결을 한다면 내가 이긴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너는 오른팔을 잃었지. 다음에는 확실한 결착이 날 것이다. 뱀파이어 여왕이 되어 이 세계를 군림할 네 모습이 벌써 보이는 것 같군.”
“닥쳐…! 지금 당장 죽여버리겠어…!”
주서현이 윤서진에게 달려간다. 그녀의 몸은 시종일관 비틀거렸다.
“너무 노골적이군. 그딴 연기에 속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 검은 너무 위험하다.”
“윤서진…!”
“우리는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그날을 고대하겠다.”
윤서진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달려가는 그의 몸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으며, 옆구리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내렸다.
주서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놓지 않던 검마저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쓰러진다.
‘주서현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죽을지도 모르겠어.’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와 총성이 들린다. 조금만 버티면 그녀는 병원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는 주서현에게 손을 뻗었다. 손은 주서현의 몸을 만지지 못하고 통과되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
자리에 주저앉은 주서현은 멍하니 땅바닥을 쳐다봤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성유진이 떠오르고 있었다.
죽일 놈.
원수.
강간범.
복수 대상.
그 짜증 나는 성유진이 죽었으니 속이 시원해야 했다. 그러나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성유진은 내가 죽여야 했어! 내 손으로 직접! 내가, 내가 죽여야 했는데…!’
그 성유진은 자신을 구하다가 죽었다.
왜?
놈에게 자신은 단순한 노리개가 아니었던가? 육변기, 성욕배출구, 성노예. 놈은 그렇게 자신을 취급했다. 근데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자신을 구했다. 이유도 어처구니없었다. 그냥이란다.
“망할… 새끼….”
주서현은 뚝뚝 흐르는 눈물을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 닦아냈다.
슬퍼서 흐르는지, 아파서 나오는 눈물인지, 분함의 눈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분해서 흐르는 눈물이라고 믿고 싶었다.
‘왜 성유진이 웃는 얼굴이 떠오르는 거야….’
휴일에 함께 놀러 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른 뭣 같은 기억들을 두고 왜 이런 기억이 떠오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성유진…. 빚은 갚겠어.”
그는 자신을 구해줬다.
주서현은 그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허나 이미 죽어버린 성유진이다. 목숨의 빚을 갚을 방법은 하나뿐이다.
“복수해주겠어. 윤서진을 죽이겠어.”
하지만 이 상태로 불가능하다. 한쪽 팔을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건 굉장히 치명적이다. 병원에 간다? 완벽하게 부서진 오른팔을 고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포션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녀가 가진 포션은 없었다.
주서현은 왼손을 뻗었다. 그녀가 쥔 것은 검이 아니라 주사기였다. 윤서진이 습격당하는 순간에 떨어뜨린 주사기. 이 안에는 윤서진의 피가 들어있었다.
뱀파이어가 된다.
그럼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주서현의 입이 떨렸다. 힘을 얻는 대가로 인간을 포기해야 한다. 인간을 포기한다는 건… 이 세계에서 지켜온 신념이 박살 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자신을 구한 성유진이 떠오른다. 동시에 윤서진을 향한 증오와 분노도 커진다. 복수심이 그녀의 몸을 지배한다.
그녀는 복수귀였다.
복수를 위해 뭐든지 포기할 각오는 아틀란티스에 있을 때부터 했었다. 복수를 위해 괴물이 되는 것쯤은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그녀는 주사기를 들고 목에 꽂았다. 주사기를 누른다. 윤서진의 피가, 뱀파이어 로드의 피가 그녀의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진다.
“아, 아아아아아아…!”
주서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흘러내린다.
온몸이 뜨겁다. 그 뜨거움에 뇌가 타버릴 것 같았다. 무엇보다 감각이 요동친다. 전신이 바뀌고 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왼손을 움직여 검을 찾았다.
검.
그녀가 자신 이상으로 믿을 수 있는 것. 검이 곧 그녀였고, 그녀가 곧 검이었다. 주서현은 월광 소나타 7의 검자루를 콱 움켜쥐었다.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 시작점은 그녀의 오른팔이었다. 완전히 박살난 오른팔이 재생을 시작한다. 근육과 뼈가 새로이 맞춰지는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고통이 동반됐다.
“……!”
주서현은 이를 악물며 그녀를 견뎠다.
고통에 패배하지 않고 정신을 유지한다. 예전에 어디서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뱀파이어가 괴물이 되는 이유는 변화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놓기 때문이라고.
‘머릿속까지 뱀파이어로 변할 순 없어.’
그녀는 힘에 잡아 먹히기 위해 뱀파이어가 되는 게 아니다. 힘을 사용하기 위해 뱀파이어가 되는 것이다.
절정으로 치닫던 고통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녀는 오른팔의 감각과 길쭉해진 송곳니의 감각을 느꼈다. 배가 고프다. 그녀의 시선에 성유진의 시신이 눈에 들어온다. 엉망진창인 몸이지만 피는 아직 신선했다.
“…….”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흡혈 충돌을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서현의 머리카락은 피처럼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